데아론은 어릴 적부터 엄마에게 사랑받으며 컸다. 열다섯 살 때까지 그에게는 가족의 따스한 양육이 있었다.
비록 나중에 짓밟히기는 했지만, 그는 삶의 대부분을 다정하고 올바른 자존감을 기르며 자랐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든 회복할 기반이 있었다.
첼루나는 달랐다. 그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실상 고아였다. 그녀는 제대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데아론을 향한 연정도 실은 기형적인 면이 있었다. 스스로 그에게 너무 의존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고치는 법을 몰랐다.
그녀에게 사랑은 생존의 문제였다. 데아론조차 없으면 어둠과 추위에 질식사해 죽을 테니 살기 위해 매달렸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토록 불완전한 나를 네가 완전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네가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나는 또다시 부서질까 봐,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일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라.
“나는, 사실, 지금도 무서워. 언젠가 네가 떠날까 봐…….”
목이 메었다. 눈시울에 따끔한 감각이 번져 뭔가 했더니 소리 없는 눈물이었다. 데아론은 즉시 손을 뻗어 물기를 다정하게 닦아 주었다.
“안 떠나요.”
그가 부드럽게 약속했다. 그는 손으로 첼루나의 얼굴을 닦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강인한 팔이 그녀를 당겨 따스한 품에 파묻었다.
“제게 1년의 시간이 허락된다면 그 시간의 전부를 당신께 바칠 거예요. 10년이 허락돼도 마찬가지고요. 평생 당신 곁에만 있을 거야.”
달착지근한 속삭임은 한 치의 허세도 없이 첼루나의 심장에 차곡차곡 스며들었다.
그녀는 연인을 꽉 안았다. 한 개처럼 뛰는 한 쌍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래,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그녀는 작게 흐느꼈다.
아, 오늘 서로 평생을 맹세하는 부부를 보며 얼마나 부러웠는지.
제게 저런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꿈도 못 꿀 행복처럼 보여서.
“나는 너만 있으면 돼. 너 없이는 너무 외로워. 네가 없으면 나는, 나는…….”
첼루나는 고독에 대한 공포에 몸서리치며 데아론을 한결 꽉 끌어안았다.
그녀는 무려 23년간의 지긋지긋한 전생을 너무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때 제가 얼마나 미움받았는지. 데아론 없이는 제가 얼마나 철저히 혼자였는지.
“그래서 제가 있잖아요. 여기, 이렇게, 지금 당장.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고요.”
데아론은 혼란을 느끼면서도 연인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더욱 가까이 안으며 그녀의 얼굴에 연신 입을 맞췄다.
어째서 첼루나가 이렇게까지 무서워하는지 데아론은 솔직히 이해하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이 없는 그는 오직 현재의 모습으로 첼루나를 판단했다.
과거에 그녀는 천덕꾸러기 공주였으나 이제는 성녀라 불리며 언니에게 신뢰받고 민중에게 사랑받는다. 공주궁 사람들도 그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분은 가끔 자신이 아직도 가족에게 대놓고 학대당하던 열세 살 소녀인 것처럼 굴까.
이해되지 않는 마음에 연인을 추궁하거나 답답하게 여길 수도 있었지만, 언제나 다정한 데아론은 그저 그녀를 가만히 다독여 주기를 택했다.
바로 이런 점이 첼루나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였다.
“그리고 저 말고도 당신을 아끼고 존중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아요, 첼루나. 당신이 아랫사람들에게 얼마나 자상한 주인인데요. 그리고 사제님들하고도 친하시잖아요?”
실제로 첼루나는 회귀 이후 주변 사람들을 구워삶기 시작하면서 공주궁 사용인을 전부 제 편으로 돌렸다.
그녀는 그들에게 친절했고 그렇다고 너무 무르지도 않았으며, 저보다 신분이 낮다고 깔보는 기색도 없었다.
고귀한 황족으로 태어났으나 신분과 상관없이 갖은 모욕을 당했던 첼루나는 그깟 혈통주의에 상당히 회의를 느끼는 편이었다.
사람들은 데아론이 평민 피가 섞였다고 멸시했지만, 내가 여태 만난 수많은 사람 중 그가 가장 인간다운걸. 출신 따위 알 게 뭐야.
적어도 아랫사람들을 자기보다 비천하다는 생각에 업신여기는 일은 없었다.
상대방은 그걸 느꼈고, 첼루나가 예전처럼 까칠하지 않은 지금 그녀를 진심으로 따르며 존경했다.
“당신은 충분히 사랑받는 사람이에요. 사랑받을 가치도 충분하고요.”
몹시 진부한 위로였지만, 그 위로를 건넨 사람이 데아론이었기에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파격적인 진리를 들은 것처럼 첼루나는 마음이 술렁였다.
“그리고 제가 사랑해요, 첼루나. 제가 당신을 사랑해요.”
사실, 그 고백만으로도 충분했다.
“설령 세상 모두가 돌아서도 나는 당신 편이야.”
그러지 말라고 첼루나는 애원하고 싶었다. 제발, 세상 모두가 돌아설 정도면 너도 알아서 나를 버리라고.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지옥까지도 너와 동행하고 싶은 내 이기적인 집착일까.
아니면, 그저 네가 내 입술을 다정하게 틀어막았기에 말할 틈을 빼앗겼기 때문일까.
데아론은 고백에 이어 연인에게 키스했고, 첼루나는 그를 밀어낼 이유가 없었다. 도리어 그의 목을 안고 가슴을 맞붙이며 그를 더욱 촘촘히 옭아맸다.
데아론은 덫에 묶인 사냥감처럼 스스로 속절없이 연인에게 빠져들었다. 설령 출구를 발견한다 해도 못 본 척 눈을 감고 외면하리라.
이 사람과 나누는 숨결이 이토록 순간순간 달콤한데, 굳이 이 황홀경을 벗어나 홀로 삭막한 세상을 견디고 싶지 않았다.
“하아…….”
“사랑해요, 첼루나.”
“흐응, 데아론.”
“사랑해.”
“나도, 흐읏, 사랑해.”
“가능하다면 당신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데아론은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전달했다. 순간의 감정에 취한 허세일 뿐이라고 넘겨짚을 여지가 없었다.
실제로 첼루나는 그딴 착각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녀는 연인의 지고지순함을 의심한 적 없었고, 방금 그의 고백 역시 들리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거, 청혼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지?”
첼루나는 아까 데아론이 제게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이 또한 일순의 감정적인 충동으로 볼 수는 없었다.
“네.”
데아론은 간결하게 말했다. 군더더기 없이 짧게, 모든 수식어를 걷어 내고.
“당신이 원하신다면.”
선택권은 온전히 상대방에게 있었다. 첼루나는 웃는 듯 울었다.
“원하지 않은 적 없어.”
원해도 되는지 몰라서 여태 늘 망설였어. 첼루나의 흐느낌은 데아론의 입술에 잡아먹혔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 거야.”
데아론이 맹세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이곳에서, 오직 달빛만을 증인 삼아 우리는 평생을 약속한다.
“너는 이미 나를 가졌어.”
첼루나가 고백했다. 지난 생에도, 또 이번 생에도, 네가 내 삶의 유일한 빛으로 들어온 뒤로 나는 쭉 네 거였어.
“영광입니다, 공주님.”
데아론은 존대로 돌아와 픽 웃었다. 그러나 말을 높였다고 거리가 멀어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데아론은 둘 사이에 거리 따위 없도록 그녀를 뜨겁게 집어삼켰다.
공식적인 서약도, 예물도, 증서도 없지만. 그 순간부터 그들은 평생을 함께할 운명이었다.
예식에 이어 피로연마저 끝났다. 손님들이 떠나고 불빛이 꺼진 황궁에는 적요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신혼부부의 첫날밤은 황녀의 침실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내일부터는 짧은 신혼여행이 시작될 테고, 부부는 황궁을 너무 오래 비우고 싶지 않다는 신부의 뜻에 따라 이달 내로 수도에 복귀할 것이다.
텔레스는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향했다.
평소보다도 더 관대한 양의 향유를 목욕물에 섞어서 그럴까. 미처 한 걸음을 내딛기 전에도 이미 어지러웠다.
‘도망치고 싶다…….’
문 앞에서 텔레스는 절박하게 생각했다.
불과 한나절 전 신랑 대기실에서 제 남편이 이와 똑같은 생각을 품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그러나 일국의 황녀는 마땅한 의무를 외면하지 않는 법이다.
애초에 의무 같은 걸 떠나 신방 안에서 기다리는 신랑을 두고 줄행랑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후계자를 얻는 데만 집중하자. 그럼 어떻게든 될 거야.’
텔레스는 속으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드디어 문이 열렸고, 그 너머에는 모리안이 있었다.
모리안은 신부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고개만 꾸벅였다. 그도 너무 긴장한 탓에 미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텔레스는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물기를 머금은 사내의 새카만 머리칼을 보자 배 속이 야릇하게 울렁거렸다.
‘아, 젠장.’
의무고 후계자고 뭐고, 그냥 도망치고 싶다.
“다 씻었어?”
텔레스는 몹시 인위적으로 발랄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제 옆을 팡팡 두드렸다.
“이리 와.”
낭만 따위 눈곱만큼도 없는 전개였다. 그러나 여기서 모리안이 불평할 자격은 없었다. 그 역시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삐걱 움직이는 것 외에는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둘 다 타고난 전략가였고 훌륭한 연기자였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햇병아리보다도 미숙한 존재였다.
황제의 딸과 후작의 아들은 각자 사랑을 부정했으며 욕정을 죄악시했다.
방탕한 사생활 때문에 정치적으로 조금도 트집이 잡히지 않기 위해 아예 금욕을 선택했다.
만약 그들이 조금 덜 강박적으로 길러졌다면, 그들의 부모가 건강한 부부생활의 모범이 됐었다면 작금의 어색한 분위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사교계에서 우아한 독설로 적군을 짓뭉개거나 검을 들고 암살자를 베는 거라면 숨 쉬듯 쉽게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그저 열 살 어린애보다도 경험이 없는 한 쌍의 멍청이였다.
“어, 저기, 내가 먼저 벗을까?”
“아니, 뭐, 그냥 둘이 동시에…….”
“으음, 그래.”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창피스러운 대화가 짤막하게 오갔다. 텔레스는 제 버벅거림에 대한 수치심을 참으며 가운 끈을 풀었다.
모리안은 머릿속이 하얗게 질렀다. 호흡조차 멎는 느낌이었다. 하늘하늘한 천이 스르륵 떨어지고 그 아래 뽀얀 곡선이 드러났다.
“시선 돌리면 어떡해.”
텔레스는 황당해서 질책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던 모리안은 새빨개진 얼굴로 다시 그녀를 향했다.
“죄송합니다.”
그가 뻣뻣하게 중얼거렸다. 텔레스는 그를 잠시 보다가, 작게 웃었다.
“너도 벗어.”
상대방이 저토록 바보처럼 구는 모습을 보자 텔레스는 역설적으로 조금 긴장이 풀렸다.
나만 우왕좌왕하는 게 아니구나. 너 또한 마찬가지야. 텔레스는 이상한 부분에서 안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