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정식으로 황녀의 시동생이 된 그는 거의 자기 형만큼이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한때 그의 출신을 이유로 대놓고 배척하던 귀족들조차 지금은 기름기 가득한 미소로 그에게 다가왔다.
이제 사뭇 늠름해진 스물한 살 청년을 수줍은 시선으로 흘긋대는 숙녀들도 있었다.
그가 첼루나 공주와 연인 사이라고 공공연히 소문나지 않았다면 아마 적잖은 여인들과 그 아비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데아론 경, 축하드립니다.”
“그대가 서부에서 보인 활약에 대해 들었소. 같은 기사로서 그대와 같은 인재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요.”
“데아론 경, 제 동생을 경께 소개해 드려도 될까요?”
“경, 잠시만…….”
곳곳에서 쏟아지는 찬사와 질문과 청탁이 데아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는 옛날 상처받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을 때의 연기력으로 모두와 친절하게 대화했다.
비록 말투와 손짓은 형식적으로 상냥하며 정중했으나, 그의 눈빛은 자세히 보면 냉담했다.
그는 지금 제게 웃으며 접근하는 사람들의 태반이 과거 자신의 모친을 들먹이며 어떤 식으로 이기죽댔는지 선명히 기억했다.
그가 기사로서 활약을 쌓고 법적으로 황족의 인척이 되자 사람들은 전부 나긋한 가면을 쓰고 다가왔다.
데아론은 똑같은 가면으로 그들을 상대하면서도 단 한 사람을 그리워했다.
‘첼루나.’
오직 그녀만이 그가 가장 외롭고 초라할 때 그에게 다정했다.
그의 마음이 그리움으로 부풀었다. 자신의 빛이자 온기인 공주님을 한시바삐 만나 따스한 눈빛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첼루나가 보이지 않았다. 데아론은 그녀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기묘한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다. 하지만 왜? 그 영문까지 그는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데아론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께 무신경하게 굴었나?
아무리 각자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바빠도 이렇게까지 서로 마주치지 못하는 건 이상했다.
피로연이 시작한 건 이른 오후였고 어느덧 거의 저녁이니, 벌써 몇 시간째 그들은 서로 엇갈린 셈이었다.
‘그분도 나를 찾고 있다면 이렇게 못 만날 리가 없는데.’
아까부터 데아론은 틈틈이 주변을 두리번대며 첼루나를 찾고 있었다.
만약 그녀도 똑같이 적극적으로 그를 찾았다면 둘은 이미 마주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대체 어디 가신 거야?’
이제 데아론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생겼나? 어디선가 혼자 끙끙대고 있을 공주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초조해졌다.
“실례합니다. 잠시 형님께 좀…….”
데아론은 결국 아무렇게나 중얼댄 핑계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물리쳤다. 그는 이제 아예 작정하고 첼루나를 찾기 시작했다.
가을날은 가을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둑해진 하늘에 말간 노을빛이 번졌다.
최고급 궁정 악단은 계속해서 곡을 연주했고, 감미로운 배경 음악과 사람들의 쾌활한 말소리는 연회장에 골고루 번졌다.
데아론은 실내를 빙 돌았다. 한 바퀴를 완성하고 나서야 데아론은 연회장에 첼루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불안스레 입술을 씹었다.
‘테라스.’
그는 문득 떠올렸다. 자신이 공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곳.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면서도 동시에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는 추억을 따라 이동했다.
연회장을 벗어나 테라스에 진입하자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졌다. 불빛이 닿지 않는 이곳은 훨씬 어둑하고 서늘했다.
데아론은 조심스레 걸었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감각이 예리한 기사는 긴장하며 멈칫했다. 그러다 어둠에 반쯤 잠긴 윤곽을 알아보고 안도로 한숨지었다.
“공주님.”
“……데아론?”
골똘히 창밖을 바라보던 첼루나는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데아론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혼자 뭐 하세요?”
데아론은 연인의 코앞에서 멈췄다. 첼루나는 물러서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 다가서지도 않았다.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어. 좀 혼자 있고 싶어서.”
첼루나는 묽게 웃었다. 어쩐지 혼자서 아득한 곳에 떨어져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익숙지 않은 괴리감에 데아론은 눈가를 굳혔다.
“그래도 춥게 있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다정하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연미복 재킷을 벗어 첼루나의 어깨에 둘렀다. 묵직한 온기가 저를 감싸는 느낌에 첼루나는 조금 물러졌다.
“너는 안 추워?”
반사적으로 연인의 재킷을 꼭 움켜쥐며 첼루나는 물었다. 데아론은 옷깃을 더욱 단단히 여며 주었다.
“방금까지 연회장에 있었잖아요. 거기는 되게 더워요.”
두 연인은 서로 가만히 마주 보았다. 각자의 얼굴을 비추는 조명은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달빛뿐이었다. 제비꽃색도 황금색도 전부 창백한 은빛에 물들었다.
“첼루나, 뭐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요?”
데아론이 먼저 물었다. 이미 서로 사랑한 기간이 길었기에 궁금한 것을 참는 게 더는 익숙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비밀은 없었다. 그가 알기로는.
“걱정까지는 모르겠고, 아마 고민쯤은 되겠지. 그냥 잡념이 좀 많아. 기분도 뒤숭숭하고.”
첼루나는 최대한 솔직하게 답했다. 본인도 아직 생각과 감정이 온전히 정리되지 않았기에 이 정도 설명이 최선이었다.
“뒤숭숭하다니, 별로 유쾌한 뜻은 아닌데.”
데아론은 걱정스레 중얼대며 첼루나의 손을 잡았다. 첼루나는 그 자연스러운 온기가 좋았다. 그녀는 간절히 맞잡으며 아예 깍지까지 꼈다.
“무슨 고민인데요? 말해 주고 싶으면 말해 줘요. 억지로 털어놓을 필요는 없고.”
“……결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결혼?”
“응, 황녀 전하가 결혼하시는 걸 보니까 별생각이 다 나더라.”
“예를 들면?”
조곤조곤 문답이 이어졌다. 첼루나는 문득, 데아론의 혈색이 은은한 달빛 아래 다소 붉게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녀는 당황했다.
‘대체 이 대화의 어느 지점에 얼굴을 붉힐 만한 게 있었지…….’
그녀는 곰곰이 되짚었다. 그러다 모종의 가능성을 깨닫고 본인은 오히려 핏기를 잃었다.
‘아.’
어쩌면, 이 아이도 나와 같은 미래를 상상해 봤을 것이다.
“너랑 내가 언젠가 부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
엉겁결에 너무 솔직하게 대답해 버렸다. 말을 뱉어 놓고 첼루나는 조금 후회했다. 데아론의 홍조가 짙어졌다.
“이거, 청혼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죠?”
그가 짐짓 장난스레 물었다. 농담인 척 꾸민 어조는 기실 수줍은 떨림을 감추기 위한 장치였다. 심장이 전력 질주라도 마친 것처럼 미친 듯이 뛰었다.
“내가 청혼하면 받아 줄 거야?”
첼루나는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제야 데아론은 첼루나의 태도가 지나치게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위화감을 느꼈다.
“제가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까?”
데아론의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 나만 들뜬 건가? 뒤늦은 공포가 몰려왔다. 나 혼자 설레서 터무니없는 망상에 휘둘린 거야?
혹시 자신과 연인의 애정의 깊이가 서로 어긋나는 건 아닐까, 그는 그제야 두려워졌다.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 막상 상대방의 속도를 배려하지 못한 건 아닐까.
오늘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는 자기 형과 황녀를 보며 데아론은 비록 찰나만이라도 자신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지금 형님이 선 자리에 내가 서고, 전하께서 계신 자리에 공주님이 있다면.
당신이 나를 보며 평생을 약속하고 내게 찬란한 신부의 모습으로 웃어 준다면.
무슨 느낌일까, 어떤 마음일까,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해 봤을까 잠깐이나마 궁금해졌다.
하지만 지금 첼루나의 표정을 보자 데아론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팔락대던 마음이 차게 식었다. 얼굴에서 홍조가 가셨다.
“……나랑 결혼하면 너는 행복해질까?”
첼루나는 망연하게 속삭였다. 어쩌면 이게 그녀를 가장 괴롭히는 질문이었다.
어찌 그려 보지 않았을까. 바라 마지않는 미래였다.
평생 너와 가족으로 지내는 것. 너의 아내가 되는 것. 네 아이를 가지고 너와 함께 가정을 꾸리는 것.
그러나 문득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이 그녀를 비웃듯 끼어들었다.
자신을 대신해 죽은 연인의 모습이 악몽에 비집고 들어와 그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태연하게 비참한 전생 따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원래 어떤 상처는 그렇게 칼 자르듯 깔끔하게 도려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여 데아론과 함께하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청사진은 있어도, 미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조차 과분한 꿈으로 여겨졌기에 항상 조심스러웠다.
나중에 언니가 무사히 황제가 되고 나면 그때 가서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미루고 미루다가 오늘 여기까지 왔다. 가슴이 답답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데아론은 안타깝게 되물었다. 왜 그딴 식으로 생각하냐고 까칠하게 따지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혼란스러워 묻는 바였다.
“첼루나, 왜 그렇게 자신이 없어요? 뭐가 그렇게 두려우세요?”
진지하게 궁금했다. 데아론은 첼루나의 뺨을 감싸 그녀의 시선을 제게 고정했고, 그녀는 괴로운 와중에도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거 아세요? 가끔 당신은 제가 당신한테 엄청나게 과분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요. 무의식중에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내가 그랬어?”
데아론은 조심스레 털어놓았고, 첼루나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만약 정말로 데아론이 그런 걸 느꼈다면 그녀가 부지중에 그런 티를 낸 게 분명했다.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데아론을 불편하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첼루나는 새롭게 죄책감을 느꼈다.
“네. 가끔 보면 스스로 순진한 꼬마를 홀린 도둑놈 취급하세요. 마치 당신이 제게 무슨 못 할 짓을 한 사람인 것처럼요.”
“하하…….”
“웃으라고 한 얘기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누가 그렇게 생각한대?”
“부정하지 않으셨잖아요.”
“……부정할 게 없어서이지 않을까. 실제로 넌 나한테 아까워, 데아론.”
첼루나는 그제야 연인의 시선을 피하며 오랜 진심을 중얼거렸다.
전생에도 몇 번이고 생각했다. 아, 나는 이 아이의 발목을 잡는 중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내가 네게 아깝다고 생각해?”
“아뇨, 그냥 우리 둘 다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데아론은 당당하게 대답했고, 첼루나는 그 눈물겹게 건강한 생각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다시 그를 보며 말했다.
“그게 너와 나의 차이야, 데아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