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14)

회귀 이후 지난 몇 년간 첼루나는 행복을 배웠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는 여전히 지난 생의 23년이 흉측한 낙인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데아론이랑?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가능하기야 하겠지. 못 할 이유가 뭐 있겠어? 우리 둘이 이렇게 사랑하는데. 그래도, 하지만, 나는…….

‘……그냥 꿈같아.’

상상만으로도 지독하게 벅차서, 기쁨이 비현실적으로 격해서, 오히려 두려워.

내가 그런 미래를 진지하게 바라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게 얄미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아.

‘생각하지 말자.’

첼루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녀는 다시 냉정하게 집중하려 애썼다.

‘내일의 주인공은 황녀 전하야. 감정에 휩쓸리면 안 돼.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이제 고지가 코앞이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럴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막판에 방심했다가 예상치 못한 변수에 당해 와르르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하여, 첼루나는 거의 전투적인 자세로 내일을 기다렸다.

드디어 결혼식 당일이 도래했다. 황녀의 혼례는 대교회의 아름답고 웅장한 예배당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신부와 들러리는 교회에 미리 도착했다. 치장은 황궁에서 전부 마쳤다.

첼루나는 강렬한 붉은빛 머리칼과 제법 어울리는 연한 금색 드레스를 입고 마차에서 내렸다.

하긴, 첼루나 정도 미인은 무슨 옷을 입든 잘 어울렸다. 그건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아델라!”

첼루나는 또 다른 들러리가 마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반색했다. 첼루나와 똑같은 영광을 얻은 프란체스 백작의 딸이었다.

굳이 외모로만 따지자면 아델라는 첼루나처럼 절대 화려하거나 찬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만연한 눈부신 승리감이 그녀에게 강렬한 광채를 더했다.

국혼에서 들러리라, 웬만한 귀족들이 살인을 저질러서라도 거머쥐고 싶어 하는 자리였다.

이런 중대한 날에 황족 바로 옆에 서게 되다니, 그건 자신을 향한 그 황족의 총애와 신뢰를 여실히 과시할 기회였다.

다른 쟁쟁한 가문의 여식들을 제치고 오늘 아델라는 여기 섰다. 야심으로 똘똘 뭉친 그녀가 행복감에 젖을 만했다.

아델라는 싱글벙글 웃으며 첼루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공주가 제게 내민 손을 잡은 그날을 절대 후회하지 않았고, 앞으로 후회할 생각도 없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오늘 진짜 아름다우세요.”

“너도 오늘 진짜 예뻐, 아델라.”

“빈말일지라도 감사합니다. 설마 공주님과 황녀 전하께 비할 만할까요.”

아델라는 조금의 씁쓸함도 없이 상대방을 발랄하게 추켜세웠다. 어차피 황족과 외모로 경쟁하려고 온 것도 아니니 씁쓸함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아델라가 원하는 건 가주로서 명예와 실권이지 미녀라는 찬사가 아니었을뿐더러, 두 황족 여인이 워낙 압도적으로 아름다워 경쟁하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

애초에 경쟁이 될 수 없는 외모였다. 첼루나 공주의 미색은 거의 초인적이었고, 오늘을 위해 가장 화려하게 꾸민 새신부는 차마 쳐다보기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텔레스도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전통적인 순백의 예복 위에 오직 황족에게만 허락되는 색색의 보석을 두르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문자 그대로 빛이 났다.

“이제 들어가자.”

텔레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였다.

아델라는 황녀 전하가 역시 고고하신 황족답게 하나도 긴장하지 않았다고 여겼지만, 첼루나는 언니의 손끝이 살짝 떨리는 걸 보았다.

첼루나는 진심으로 신부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그들은 교회로 진입했다.

데아론은 형과 함께 신랑 대기실에 있었다. 모리안은 계속해서 거울을 살폈다.

“너무 퀭해 보이지 않아?”

“제가요?”

모리안이 어깨 너머로 묻자 데아론은 자신의 외모에 대한 걱정을 시작했다. 그러자 모리안은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냐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너 말고 나.”

데아론은 모리안을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퀭하다니? 오늘 모리안은 준수함 그 자체였다. 하도 반짝반짝 화사하게 꾸며 놔서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전혀요.”

데아론은 침착하게 타일렀다. 모리안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여기, 모양이 삐뚤어졌네.”

모리안은 무심코 동생의 옷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데아론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모리안도 우뚝 멈췄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미안.”

모리안은 마침내 중얼거린 뒤 시선을 피했다. 데아론은 스스로 옷깃 매무새를 고쳤다.

“아닙니다.”

예전에 몇 번, 형이 동생에게 검술을 가르치던 시절이었나.

모리안이 저도 모르게 칭찬하는 뜻으로 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려 손을 뻗을 때마다 데아론은 새파랗게 질려 경직했다.

그 뒤로 형은 다시 동생에게 손대려 한 적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워낙 다른 일로 긴장해서, 조심하는 걸 잊었나 보다.

‘젠장.’

모리안은 머리가 아팠다. 안 그래도 국혼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운데 동생에 대한 복잡한 심경까지 더해지자 토할 것처럼 울렁였다.

‘도망치고 싶다…….’

살면서 비겁하다는 소리를 가장 듣기 싫어하는 그가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도망치는 신랑이라니, 그런 후레자식을 보았나.

‘……바보처럼.’

애처럼 긴장해서 전전긍긍하는 쪽은 아마 자기 혼자일 거다. 황녀 전하는 끄떡도 없겠지. 그게 어쩐지 억울해서 모리안은 한층 우울해졌다.

“오늘 정말 근사하십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옆에서 착한 동생이 정중하게 말했다. 그는 형이 긴장 때문에 거의 토할 지경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얼핏 보면 모리안은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고마워.”

모리안은 조금 놀랐다. 그가 데아론을 돌아보았다. 데아론은 한 톨의 거짓 없이 선한 눈으로 제 형을 보고 있었다. 모리안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고맙다.”

그는 어색하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피했다. 울렁거림이 더 심해졌다.

데아론은 이제 형을 격려하는 걸 그치고 연인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지금쯤 예배당에 도착하셨을까? 벌써 보고 싶었다.

‘내 사심 채우려고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데아론은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오늘은 자기 형과 아버지, 후작 부인께 개인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날임을 알았다.

데아론도 그 사실에 집중하고 싶은데, 자꾸만 사적인 잡생각이 끼어들어 집중력을 흐트러트렸다.

‘드레스 입은 모습 보고 싶어.’

데아론은 솔직하게 생각했다. 예복 차림의 연인은 오랜만이었다.

서부에서 복귀한 뒤 황제의 건강 문제로 연회나 무도회 등이 전부 취소되어 치장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평소에도 아름다운 공주님이시지만, 성대한 국혼에 걸맞게 차려입으셨으니 얼마나 더 눈부실까. 데아론은 만남의 순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예식 시간이 다가왔다. 데아론은 제 형이 혹시 기절하지는 않을까 진정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다.

동생의 은밀한 염려가 무색하도록 모리안은 꿋꿋이 임했다. 혼례가 아닌 전쟁에 임하는 태도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사제들과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누군가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렸다.

신랑과 들러리는 각자 자리를 잡았다. 데아론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시작한다.’

본인이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들떴다.

결혼식 특유의 흥분된 분위기와 웅장하게 연주되는 행진곡의 전주, 바로 앞에 선 신랑의 전염성 있는 긴장이 데아론을 흔들었다.

드디어 문이 열렸고, 예배당의 압도적인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광활한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쏟아지는 어지러운 햇빛이 잠시 데아론의 숨을 앗아 갔다.

보통 신랑 측이 먼저 제단 앞에서 기다리는 게 제국의 관습이지만, 신부가 황족일 경우 예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오만한 황족은 언제나 자신이 우위를 점해야 했다. 자신이 그 누구에게 가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제게 알아서 오는 게 맞았다.

하여, 신부는 이미 제단 앞에서 평생의 반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올 수 있으면 내게 와 봐, 그토록 도도한 심정으로.

벨벳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길 끝에 고고하게 자리한 황녀를 보고 모리안은 잠시 호흡이 멎었다.

아.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모리안은 홀린 듯 나아갔다. 신부가, 주군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가까워졌다.

거의 공격적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텔레스는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다.

평소에는 아무리 냉정하고 엄숙해도 사람이라는 느낌이 났는데, 지금은 마치 그런 모든 인간적인 모습과 결별한 듯 차갑게 조각된 대리석처럼 보였다.

그러나 저 새파란 눈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모리안은 날카로운 빛과 위엄찬 보석 틈에 미약하게나마 새어 나오는 여린 시선을 보았다.

모리안은 텔레스가 자기만큼이나 긴장했다는 걸 직감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조공을 받는 오연한 여제나 여신의 모습이었으나, 저 미세하게 일렁이는 푸른 눈빛은 훨씬 연약한 진심을 내비쳤다.

텔레스는, 모리안과 마찬가지로, 떨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순간, 모리안은 더는 두렵지 않았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간격을 단숨에 좁혀 사랑스러운 신부 앞에 섰다.

그는 장갑 낀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고 눈으로 감지되지 않는 가느다란 떨림을 따뜻한 손안에 전부 담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모리안이 속삭였다. 텔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웃었다.

황녀의 지위를 드러내는 위압적인 비단과 보석과 어울리지 않게, 아주 옅은 봄바람처럼.

모리안은 자신이 그 가냘픈 진심에 평생을 걸게 되리라는 걸 알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성대한 예식은 두 사람을 하나로 묶었다. 평생토록, 신의 뜻으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는 사랑을 맹세하고 정표를 나누었다. 서로 진실한 모습만 보이리라 만민 앞에서 언약했다.

어차피 정략혼인 걸 알았지만,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았다.

데아론 역시 벅찬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부부가 서약을 교환하는 시점에 그는 신부 뒤에 선 첼루나를 흘긋했다.

첼루나는 데아론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앞만 바라보았다.

기분 탓일지 모르겠으나, 데아론은 첼루나의 표정이 조금 굳어 있다고 생각했다.

‘왜……?’

데아론의 의아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사제가 주례를 마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렁찬 행진곡과 활기찬 박수가 예식의 끝을 알렸다.

피로연이 뒤따랐다. 장소는 황궁 연회장이었다. 여기서도 데아론은 너무 바빠 첼루나와 말을 섞기는커녕 눈을 마주칠 겨를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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