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14)

‘당신은 아픈 아버지와 적대적인 이복동생 같은 건 없었잖아요.’

블레논도 만약 황제가 정정하고 그와 제위를 두고 다투는 야심 찬 동생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았을 거다.

스물여섯 살이면 아직 젊으니까 괜찮아, 하며 인내심을 길렀겠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블레논은 초조한 본심을 감추며 생긋 웃었다. 황제는 엄숙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너는 반드시 황제가 될 거다.”

그는 최초의 약속을 진지하게 되뇌었다. 블레논은 그 약속에 자신의 전부를 걸었다.

“모든 길이 빠르게 끝나는 건 아니야. 조급해서 일을 그르치지 말고 때를 기다려라.”

자신이 2년 뒤에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네, 폐하.”

마찬가지로 무지한 아들은 숙연하게 끄덕였다. 아버지의 조언대로 조급함에 휩쓸리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블레논이 그때의 결심을 완전히 뒤엎게 되는 건 그로부터 몇 달 뒤였다.

황제의 건강은 정말로 나아지고 있었다. 그게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건 첼루나만 알았다.

황제가 병상을 벗어나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내내 전전긍긍하던 황태자 측은 한시름 놓았다.

황녀 측은 긴장했지만, 예전처럼 절망하지는 않았다.

황녀가 아예 외국으로 쫓겨났던 시절과는 차원이 달랐다. 서부에 나가 있던 황녀 측 귀족들도 이제는 수도로 복귀했다.

싸움은 이제 다시 대등했고, 공중에는 첨예한 긴장이 감돌았다.

황제의 건강이 잠깐 나아진 틈에 황녀는 전생과 같은 청을 올렸다. 바로 본인과 모리안의 결혼 허락이었다.

올해 텔레스의 나이 스물다섯, 조금만 더 버티면 제국에서 노처녀 소리를 들을 나이였다.

그녀가 번듯한 약혼자가 있음에도 여태 차일피일 국혼이 미뤄졌던 건 그녀가 그간 고국에 없었고, 더 최근에는 황제가 아팠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황녀는 잽싸게 결정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후계자가 필요한 건 동생도 오빠와 마찬가지였다.

<폐하는 내후년을 넘기지 못할 겁니다. 저나 의사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이건 의학이나 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해진 수명의 문제입니다.>

공주는 분명 제게 그렇게 아뢰었다. 그 은밀한 폭로를 들은 텔레스는 마음을 정했다.

황제의 건강이 잠깐 나아진 지금 서둘러 결혼하지 않으면 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곳은 미혼 상태에서 낳은 자식은 거의 사생아 취급을 받는 보수적인 사회였다.

‘내가 지금 당장 아이를 낳는다 해도 후계 인정을 받기 어려울 거다, 이 말이지.’

그러니까 지금 당장 텔레스가 약혼자를 붙들고 침실로 향한다 해도 그렇게 태어난 황손은 입지가 탄탄하지 않을 것이다.

텔레스는 약혼자가 아닌 남편이 필요했다. 그래야 떳떳하게 아이를 가질 수 있으리라.

여기까지 계산을 마친 텔레스는 무심코 한숨지었다.

약혼과 결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 이토록 냉정한 저울질밖에 할 줄 모르는 자신은 정말 어쩔 수 없는 황족이구나, 싶어서.

나는 얼마나 무감정한 괴물인가.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 오빠와 어려워하는 부모도 나를 닮았겠지. 우리는 진짜 사랑이 뭔지 모른다.

‘……모리안한테만 미안하게 됐나.’

군주로서는 훌륭할지 몰라도 사람으로서는 어딘가 조금 고장 난 아내와 평생 함께해야 할 텐데.

한 번도 제게 사랑을 얘기하지 않은 그 남자는, 나중에 제 선택을 후회하게 될까.

텔레스는 곧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그 후회조차 그가 선택한 몫이다.

모리안 본인이 그녀에게 말했듯, 그녀는 저를 따르는 이들에게 아무것도 강요한 적 없었다.

<저를 위해 그 무엇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누구를 위해서도요. 당신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결정을 내리십시오.>

<그 또한 저와 다른 사람들의 선택이죠. 당신과 함께 위험에 뛰어들기 싫으면 이제라도 당신을 버리면 그만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당신은 가끔 자의식 과잉일 때가 있습니다. 정말 제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희생을 강요해서 당신을 따르기로 했겠어요?>

<당신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선택한 거지요. 당신이 엄청나게 잘났다는 건 인정합니다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니 마치 고작 당신의 선택 하나가 모두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고뇌하실 필요 없습니다.>

<통치자의 결정이 다수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사실이니 신중할 필요야 있겠지요. 그런 면에서 당신은 이미 자격을 갖췄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 역시 기억해 주세요.>

<당신도 그냥 다른 여느 인간처럼,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시면 됩니다.>

냉정한 듯 따스하던 약혼자의 조언 하나하나가 텔레스의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졌다.

본인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심장의 구석구석에 더운 전율이 퍼지는 느낌이었다.

“다른 여느 인간처럼…….”

텔레스는 저도 모르게 되뇌었다. 다른 여느 인간이라. 평범하게, 라는 뜻이겠지.

그러나 정확히 어떻게 해야 평범할 수 있는지 텔레스는 잊은 지 오래였다. 어쩌면 애초에 배운 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텔레스는 문득 상상했다. 제게 허락되지 않은 평범한 삶.

만약 자신이 제 오라비와 목숨 걸고 싸우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황족이 아니라 그저 어느 적당히 유복한 집 여식이었다면.

그런 삶에서도 모리안 네가 내 약혼자였다면.

우리는, 연인이 될 수 있었을까?

“……내가 어떻게 알아.”

어차피 망상으로 그친 가능성인데.

결혼을 앞둔 새신부는 불쑥 우수에 젖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울음이 날 것 같아서 억지로 눈가에 힘을 줘야 했다.

스스로 사랑을 모른다고 철석같이 믿는 황녀는 그날 조금 쓸쓸했다.

국혼이 임박했다. 날마다 하늘이 청명한 가을이었다. 첼루나는 언니의 들러리를 맡게 됐다.

<제가요?>

처음 언니에게 제안을 들었을 때 첼루나는 진심으로 충격받았다.

황녀의 들러리를 서다니, 그건 크나큰 영광이었다. 당연히 전생에 천덕꾸러기 공주는 허락받지 못한 영광이기도 했다.

<그럼 달리 누가 하겠니. 나도 내 들러리가 성녀님 정도는 돼야 체면이 살지 않겠어?>

텔레스는 짐짓 경쾌하게 말했다. 동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첼루나는 떨떠름했다. 여전히 이 모든 호의가 꿈처럼 느껴졌다.

<……감사히 맡겠습니다.>

첼루나는 결국 고개 숙여 인사했다. 황녀가 한 부탁이니 사실상 명령이었다.

자신은 그저 주군의 명을 따르는 신하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병문안을 갔다가 아비에게 모욕을 당한 뒤로 언니는 동생에게 더할 나위 없이 친절했다.

텔레스가 외국에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동생을 신하로서 신뢰했으나 말랑말랑한 애정을 보이지는 않았었다.

이에 대해 첼루나는 원망하지 않았다. 애틋한 자매애가 그리워 텔레스에게 매달린 게 아니니까.

애초에 그리워할 자매애도 없었다.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던 걸 그리워할 수는 없으므로.

텔레스는 이번 생에 첼루나가 스스로 선택한 주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텔레스가 승리해야 데아론도 무사할 테니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첼루나는 언니를 섬겼다.

그런데 제국에 돌아온 뒤로 동생을 향한 언니의 태도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황제의 병문안을 기점으로 그 변화는 더욱 뚜렷해졌다.

첼루나는 언니의 물러진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익숙하지 않아 불편하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데아론 경은 모리안의 들러리를 할 거야. 둘이 잘 어울리겠네.>

<네, 형제가 둘 다 훤칠하니 필시 잘 어울릴 겁니다.>

황녀의 설명에 첼루나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이에 텔레스의 표정이 살짝 이상해졌다.

<뭐, 형제가 서로 잘 어울리기도 하겠지만, 나는 너랑 데아론 경이 잘 어울릴 거라는 뜻이었는데.>

<네?>

첼루나는 멍하니 되물었다. 의외의 반응에 텔레스는 오히려 당황했다. 그녀는 반쯤 장난으로 되물었다.

<원래 신부의 들러리랑 신랑의 들러리가 나중에 서로 맺어진다는 게 정설이잖아?>

사실 정설보다는 통설에 가까웠다. 혼례 준비를 위해 신부 쪽 들러리와 신랑 쪽 들러리가 자주 만나다 보면 서로 눈이 맞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으니까.

어차피 첼루나와 데아론이 서로 연인 사이라는 걸 알기에 가볍게 던진 희롱이었다.

텔레스는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달았다. 대체 정확히 어디서 뭐가 잘못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첼루나, 왜 그래?>

그녀의 동생은 새하얗게 질려 석상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황녀가 깜짝 놀라 재촉하자 공주는 그제야 삐걱삐걱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냥…….>

그것마저 별 시원찮은 얼버무림이었다. 황녀의 당혹이 깊어졌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고, 황녀가 서둘러 화제를 바꾸는 것으로 이전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국혼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첼루나는 텔레스가 암시한 바가 적잖이 곤혹스러웠다.

그녀는 자신과 제 연인이 신랑 신부의 들러리로 나란히 서는 모습을 상상하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결혼…….’

첼루나도 그 속설은 알고 있었다. 결혼식의 들러리들은 십중팔구 자신들이 다음 결혼식의 주인공이 된다고.

그러나 첼루나는 단언컨대 자신과 데아론에 대해 그런 식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와 결혼이라니, 미지의 세계였다.

첼루나의 첫 번째 삶은 스물세 살에 끝났다. 그녀의 경우 회귀 때문에 중간에 끊긴 거지, 데아론의 경우 죽음으로 아예 끝마쳐야 했다.

이번 생에도 첼루나의 온 관심은 스물세 살이 되는 해에 쏠려 있었다.

그해에 황제가 승하하고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날 것이다. 승리로든, 패배로든.

회귀 이후 홀로 대장정을 달려온 느낌이었다. 정신없이 나아가다 보니 종착점이 코앞이었고, 첼루나는 그 이후의 삶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상상이 안 돼.’

싸움이 끝난 후의 나와 데아론. 우리의 평화로운 미래.

전생에는 없던 일이었기에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회귀자인 첼루나에게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결혼, 결혼이라고. 우리가 언젠가……. 약혼도 하고…….’

그 가능성을 아예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전생과 달리 당당하게 연애할 수 있다는 행복에 겨워 감히 달콤한 미래를 그려 보기도 했다.

이번 생에는 희망이 있다고, 우리는 어쩌면 연인 이상이 될 수 있으리라고 남몰래 기대했다.

그러나 결핍과 불행이 익숙한 사람이라면 하루아침에 낙관적으로 변할 수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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