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약 2년간 황제의 건강은 나아지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돌이킬 수 없는 발작이 일어날 테고, 죽음은 자주 그렇듯 신속하고 당황스럽게 들이닥치겠지.
그게 전생에 첼루나가 경험한 아비의 죽음이었다. 그녀에게 황제의 죽음은 제대로 만난 적도 없는 어미의 죽음만큼이나 갑작스럽고 허무했다.
영원할 것 같던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돌아가시다니. 당신이 내게 가득 남긴 상처가 다 아물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그런데, 너.”
황제의 말투는 돌연 무례해졌다. 불퉁하게 지목당한 첼루나는 흠칫 떨었다. 텔레스는 불편한 안색이 되었고, 블레논은 무표정했다.
“너는 무슨 자격으로 여기 왔지?”
그 차가운 추궁에 첼루나는 말을 잃었다. 순식간에 싸해진 분위기에 궁인들도 숨죽였다.
“……죄송합니다.”
첼루나는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텔레스가 싸늘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첼루나한테 함께 폐하를 찾아뵙자고 먼저 권했습니다.”
전혀 죄송하지 않은 말투였다. 아비를 똑바로 쏘아보는 시선이 차가웠다.
첼루나는 당황했다. 블레논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네가?”
가장 경악한 사람은 아마도 황제 본인이었다.
여태 제게 살가운 적 없던 큰딸이지만, 그래도 저렇게 대놓고 불손한 태도는 처음이었다.
“……황녀의 생각이 짧았군. 막내까지 데려오면 어떡해? 병문안은 한 번에 한두 명으로 충분하다. 세 명까지는 너무 많아서 피곤하구나.”
숫자가 문제가 아닐 텐데. 황제의 같잖은 변명에 첼루나는 하마터면 실소가 나올 뻔했다. 텔레스는 실소든 뭐든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다 잘 지낸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 정도면 됐다. 셋 다 이제 물러가.”
어이없을 만큼 짧은 문안이었다. 블레논도 덩달아 쫓겨나게 되었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어차피 황제가 추후 어떻게 행동할지 예상이 가능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폐하.”
“아니야, 심려는 무슨. 그냥 너무 피곤할 뿐이야.”
황태자가 또다시 대표로 인사하자 황제의 눈빛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 노골적인 편애에 이번에는 텔레스도 헛웃음을 지을 뻔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했건만.
“잘 들어가렴. 블레논, 텔레스……, 첼루나, 모두.”
끝에 덧붙인 막내의 이름은 누가 들어도 형식적인 절차였다.
남매는 아버지께 공손히 인사한 뒤 각자 복잡한 마음으로 방을 나왔다.
“일부러 병문안 빨리 끝내고 싶어서 그런 거면 칭찬해 줄게. 목표 달성했네.”
블레논은 앞을 보며 작게 중얼댔다.
빈정대는 말투는 신랄했지만 표정은 담백해서 바로 옆에 있는 텔레스를 빼면 블레논이 독설 중이라는 걸 알 수가 없었다.
“제발 닥쳐.”
텔레스는 짤막하게 속삭였다.
그녀 역시 말투와 달리 표정은 평온하여 블레논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실제로 뭐라 말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첼루나 혼자 조용했다. 그녀는 애써 울분을 삭이는 중이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대놓고 치욕을 당하는 건 정녕 오랜만이라 상처가 더 깊었다.
언제쯤 이런 지긋지긋한 모욕감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첼루나는 싸움이 전부 끝나고 언니가 황제가 된 이후를 상상해 보려 애썼지만, 전생에 그녀의 삶은 딱 그때 끝났기에 그 이후를 상상하는 게 어려웠다.
이번에는 과연 오래오래 행복하게, 동화 같은 결말을 얻을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다시 첼루나를 두려움으로 좀먹었다.
갈림길이 나왔다. 각각 황태자궁과 황녀궁, 공주궁 쪽으로 갈리는 길이었다.
블레논은 미련 없이 황태자궁 쪽으로 돌아섰다. 첼루나도 황녀에게 꾸벅 인사한 뒤 공주궁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언니의 음성이 동생을 붙잡았다.
“첼루나, 지금 안 바쁘면 잠깐 나랑 같이 갈래?”
텔레스는 상냥하게 권했다. 첼루나는 그 친절이 아까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한 연민인 걸 알고 수치심과 감동을 동시에 느꼈다.
텔레스는 온화하게 덧붙였다.
“마침 날씨가 좋으니까, 테라스에서 창문 열어 놓고 다과나 들까 해서.”
산들바람이 불어 너무 덥지 않은 여름날이었다. 야외 다과를 즐기기에 딱 적당한 날씨이긴 했다. 첼루나는 정중히 대답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생은 언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편, 또 다른 누군가도 가족에게 비슷한 초대를 받았다.
“황태자 전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충분히 예측한 전개에 블레논은 느긋하게 돌아보았다. 황제의 시종이 쪼르르 다가와 귓속말로 아뢰었다.
“황제 폐하께서 지금 다시 오라 하십니다.”
피곤하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핑계였다. 황제는 딸들 없이 아들과 대화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즉석에서 아들만 남으라고 하면 황녀가 항의할 빌미가 생기니 일부러 조금 시간을 벌었다.
“알겠다. 지금 가지.”
블레논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는 효자답게 빙긋 웃었다.
황태자는 아직 아이가 없었다. 부부가 게으르게 군 건 아니었다.
그들에게 동침은 쾌락의 추구보다 의무의 이행에 가까웠고, 황태자도 황태자비도 각자 제 의무를 소홀히 할 자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직도 비에게 태기가 없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아내에게 문제가 있나? 아니면 남편에게? 둘 다 아직 창창한 20대인데 벌써 너무 조급하게 구는 건가?
하지만, 지금 폐하께서 편찮으신데.
이러다 내가 후계가 없는 상태로 폐하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나는 어떡하지?
“내가 너한테 걱정을 끼치는구나. 갑자기 이렇게 병자가 돼서는, 원.”
아들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황제는 미안한 마음에 진심으로 한탄했다. 효자 블레논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실, 그는 속으로 황제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요. 왜 갑자기 쓰러지셔서는.
오직 정치적으로만 효자인 그는 아비의 여성 편력에 대한 근본적인 원망에 그의 미약한 건강에 대한 짜증까지 더해져 심기가 불편했다.
“곧 털고 일어날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라.”
황제가 약속했다. 그건 아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다짐이기도 했다.
그는 제국 전체를 발아래 둔 막강한 황제였다. 계속 이렇게 병석에만 묶여 있기엔 손에 틀어쥔 권력이 너무 아까웠다.
설마 자신이 내후년에 죽을 거라는 생각을 그는 미처 하지 못했다. 원래 사람이란 자신의 끝을 웬만하면 잘 생각하지 않는 생물이다.
“네가 일을 워낙 잘 맡아 줘서 마음이 놓여.”
“황송합니다, 폐하.”
이번에 블레논은 진심으로 감격했다. 황제의 칭찬이 그저 과한 부성애가 불러낸 빈말이 아니라는 건 블레논도 잘 알았다.
아무리 죽은 황비에 대한 집착으로 눈이 먼 황제지만, 그래도 그는 역시나 군주였다.
지금껏 이 거대한 나라가 무너지지 않고 꾸준히 번영 중인 건 그만큼 현 황제가 안정적인 통치를 유지했다는 증거였다.
단지 아들이 예뻐 죽겠다는 이유만으로 황태자의 국정 처리 능력을 과장해서 칭찬할 자는 아니었다. 국무에 관해서만은 황제도 냉정했다.
만약 황태자의 능력이 영 별로였다면 황제는 에둘러 그를 꾸짖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가 자랑스럽게 칭찬했다는 건 그만큼 황태자가 잘 해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블레논은 자신감으로 부풀었다. 그간 불안했던 마음이 싹 씻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이 나라의 지존이 자신의 국무 능력을 칭찬했다. 대단한 훈장이었다.
‘그래, 원래 내 자리였어.’
내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리야. 권좌를 향한 진득한 소유욕이 일렁였다. 절대 동생에게 빼앗기지 않으리라. 그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나저나, 블레논. 태자비는 혹 소식이 없니?”
황제가 조심스레 물었다. 블레논의 뿌듯함이 훅 사라졌다. 그의 눈빛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직 없습니다, 폐하.”
소식이라 하면 태기를 뜻했다. 황태자와 그의 지지자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바로 그 소식.
아마 이로써 가장 고통받는 건 아이를 가져야 할 황태자비 본인일 것이다.
그녀는 시가와 친정, 심지어 시녀들에게마저도 이중 삼중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저도 애쓰고 있어요. 아이가 무슨 그렇게 맘대로 생기는 줄 아세요?>
신경이 유독 날카롭던 어느 날에 그녀가 위와 같이 메르타 후작에게 화냈다는 사실은 황태자궁의 웬만한 사용인은 다 아는 비밀이었다.
애를 낳아 본 적 없는 사내들이야 여자를 닦달하기에 바빴지만, 클라린 메르타가 사납게 지적했듯 아이는 마법처럼 어느 날 ‘뿅!’ 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수태를 위해서는 쌍방의 노력이 필요했으며 어떤 부부에겐 너무 쉽게 생기지만 또 어떤 부부는 수년을 기다린다.
그러나 황태자 부부에겐 수년이란 시간이 없었다. 만약 이번에 황제가 그리도 맥없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덜 조급했을지도 모른다.
후계 없는 황태자의 자리는 얼마나 위태로운가. 후계를 생산하지 못한 황태자비의 자리는 얼마나 더 쓸쓸한가.
클라린 메르타는 벌써 자신이 쓸모를 잃고 아비와 남편에게 내쳐질까 봐 가련하게 떨고 있었다. 이러다 전하께서 정부라도 들이신다고 하면?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야.’
그러나 정부의 가능성도 사실 요원했다. 블레논은 속이 탔다.
‘폐하께서 계속 병상에 계시는 한…….’
블레논은 정부를 들인다는 발상 자체에 거부감이 있었다. 아버지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황제로서 깔끔한 후계 구도를 유지하리라. 자기 세대와 같은 난전의 반복은 사양이었다.
그러나 만약 개인의 신념이 유일한 문제라면 그는 그 신념을 기꺼이 꺾고 필요에 따라 다른 여자를 품을 의향이 있었다.
다만, 이번에도 역시 황제가 아프다는 게 문제였다.
많은 것이 황제 하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군주정에서 그의 건강은 다른 이들의 삶에도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황제가, 심지어 아버지가 편찮으신 와중에 정부와 놀아나는 황태자라니? 있을 수 없었다.
보수적인 교회와 가십을 좋아하는 대중이 득달같이 달려들리라.
그러니 일단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적법한 아내가 부디 수태하기를, 그리고 웬만하면 아들을 수태하기를.
‘아니면…….’
그 외에 블레논이 떠올린 생각은 딱 하나 있었다. 그러나 너무 무모하고 엽기적인 발상이라 그는 차마 더 길게 곱씹을 수도 없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네 어머니는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을 때 너를 가졌어.”
황제가 위로했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블레논은 별로 안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