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람된 말씀이지만, 공주님은 참 영악하신 분입니다.”
긴긴 침묵 끝에 앰벌리가 말했다. 담담한 비난에 죄책감을 느끼며 첼루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다 그의 눈빛이 의외로 온화한 걸 보고 조용히 놀랐다.
“그런 영악함 때문에도 공주님이 더 좋았습니다.”
솔직한 고백이었다. 또한, 과거형이었다. 첼루나는 명치끝이 묵직하게 아렸다.
앰벌리를 아끼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오랫동안 불편해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냉혈한이 아니었다.
애써 짝사랑을 정리하는 남자의 부드러운 고백 앞에서 괜히 마음이 아팠다.
“사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왕 하셨으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사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알고 이용당한 거니까요.”
어쩌면 본인도 조금 삐뚤어졌기에 그럴까. 앰벌리는 순진한 사람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꽃밭이라며 멋대로 비웃었다.
얼핏 보면 대책 없이 착한 듯한 데아론 텔로아 같은 사람들이 앰벌리는 아니꼬웠다. 어쩜 저리 무를 수 있을까.
사생아로 태어나 온갖 멸시는 다 받았으면서 제비꽃색 눈은 어김없이 따스하고 청명하다.
첼루나와 앰벌리는 서로 비슷한 성향이면서, 그런 올곧은 온기에 보이는 반응은 달랐다.
첼루나는 저와 다르기에 속절없이 끌렸고, 앰벌리는 저와 다르기에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본인이야말로 아무것도 몰랐기에 앰벌리는 데아론 같은 사람들이 싫었다.
대책 없이 무른 듯한 그 사람들이 실은 얼마나 강인하기에 악의에 물들지 않고 선량함을 유지했는지.
그런 앰벌리라서, 그의 눈에 비친 첼루나 공주는 다만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아직 모두에게 미움받던 시절, 악착같은 자존심만 남아 오만한 시선을 꼿꼿이 쳐들던 모습이 좋았다.
나중에는 그녀가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자 여기저기서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정이 뚝 떨어졌지만, 그녀가 하녀들 편에서 황후궁 기사들에게 화내는 모습을 보고 호감이 돌아왔다.
성녀의 이름을 얻자마자 유순한 모습을 확 버리고 공개적으로 황녀에 대한 지지를 표하는 과감한 모습이 좋았다.
이유가 불확실한 호의를 의심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떠보는 모습이 좋았고, 나중에는 제 마음을 짐작하고도 오히려 이를 무기 삼아 저와 거래를 시도하는 게 아찔하게 겨웠다.
절대 도덕적이지만은 않은 방법으로 생존과 승리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그 간절함이, 교활함이, 눈부신 욕심과 집념이.
그 모든 모습까지 아울러, 앰벌리는 첼루나 공주를 사랑했다.
그는 평민 출신으로 여기까지 오느라 아득바득 계산적으로 살아온 탓에 사랑이 어떤 건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공주를 향한 자신의 저릿한 마음을 곰곰이 뜯어보면, 그래. 아마도 이런 게 사랑이었다.
“공주님이 어쩌면 데아론 텔로아 경을 평생 사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앰벌리는 쓸쓸하게 털어놓았다. 데아론의 이름을 말할 때 입맛이 떫었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 속이 쓰렸다.
그냥 총애라고 에둘러 언급할 수도 있었다. 애초에 황족이란 족속은 사랑이라는 훈훈한 단어보다는 총애나 귀애 같은 수직적인 단어가 어울리는 자들이니.
그러나 첼루나의 저 불타는 황금 눈을 보며, 앰벌리는 감히 그런 부정확한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알면서도 공주님 곁에 머물며 목숨을 걸었습니다. 죄책감 느끼지 마십시오. 저 역시 공주님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한 선택에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 싸웠잖아, 그렇지? 당신도, 나도, 내내 서부에 있었던 당신 애인도.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첼루나는 떨떨하게 말했다. 늘 어렵게만 생각했던 앰벌리 라크문에게 이런 진솔한 위로를 듣자 기분이 이상했다.
“설령 내가 윗사람이라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상황일지라도 방금 내가 들은 말은 진짜라고 여기지. 여기서 그대의 진심을 의심하는 건 정말 몹쓸 짓 같으니까.”
“몹쓸 짓이 맞을 겁니다.”
앰벌리는 옅게 웃었다. 첼루나는 마주 웃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이 남자의 마음이 슬펐다.
한때 평생 데아론을 짝사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녀다. 보답받지 못한 사랑은 상상만으로도 아팠다. 자신이 타인에게 그런 고통을 안기게 되었다는 게 퍽 미안했다.
“내가 계속 그대를 내 호위로 두는 것도 몹쓸 짓이겠지?”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연애하는 모습을 저를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 주는 가학적인 짓거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데아론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싫었다.
“한다면 황녀 전하께 그대를 추천할 수도 있어. 어때?”
“제 마음을 배려하느라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공주님께서 불편하시다면 언제든지 소속을 옮기겠습니다.”
“……전하와 한번 얘기해 보지. 소속이 너무 자주 바뀌면 경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니, 뭐가 그대를 위한 최선인지 고민해 볼게.”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를 배려하느라 애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앰벌리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랫사람의 경력을 걱정하는 황족이라니.
본인이 어릴 적에 무력했던 기억 때문일까. 한때는 까칠하고 난폭하여 아랫것들을 가장 괴롭혔을 것 같은 공주님이 실은 세 황족 남매 중에서 가장 겸손하고 친절하다.
텔레스 황녀는 우아하고 인자했으나 절대 궁인들을 자신과 동급으로 보지 않았다. 그건 그녀가 딱히 재수 없어서가 아니라, 신분제 사회에서 당연한 얘기였다.
황족이 베푸는 상냥함은 그저 수직적인 은혜였다.
그들은 너그러운 주인으로 군림하며 자기보다 아래 있는 자들을 사랑과 지혜로 품었다. 그게 황족이 따르는 성군의 길이었다.
첼루나는 달랐다. 아마 그녀는 본인이 절대 황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실제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기도 했고.
그녀는 내려다보는 쪽보다는 올려다보는 쪽의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었다.
약하고 외로울 때의 상처는 그녀를 좀먹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녀를 더욱 강하게 다잡았다.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공주님.”
한때 약했기에 지금은 더욱 강하신 공주님. 예전에 까칠하고 싸늘했던 만큼 지금은 상냥하고 따스하신 공주님.
그런 당신을 어찌 연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경애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불러서 사과하시고 제 의견을 구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앰벌리는 여러 의미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주군에게 점잖게 고개를 숙였다. 첼루나는 여전히 복잡한 표정이었다.
“새겨듣겠다.”
한낱 호위의 간청을 새겨듣겠다는 공주님. 앰벌리는 자신이 이 사람을 아주 오래 사랑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데아론 텔로아를 떠올리면 지독한 증오가 차오르다가도, 그 사람의 눈짓 하나에 행복하게 웃는 공주님을 생각하면 그 증오조차 녹았다.
만약 데아론 텔로아가 공주님의 마음을 희롱하는 시정잡배였다면 진즉 죽여 버렸겠지. 그러나 앰벌리는 이제 질투마저 불가능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이제는 고통을 혼자 삭이며 연정의 마모를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싸움에서 공주님의 편이 반드시 승리하기를 바랐다.
황제의 증세가 호전됐다. 그래 봤자 그가 환자라는 사실은 여전했지만, 이제 그는 침실에서라도 업무를 보고받고 문안객을 접견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황제의 자식들도 꾸준히 병문안을 가야 했다. 그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효심보다는 남들의 눈을 의식한 의무감에 가까웠다.
전생에도 그랬다. 안 그래도 서로 대립각이 첨예한 와중에 둘 중 하나라도 불효자 낙인이 찍히는 건 사양이었다.
상대방이 제게 불리한 여론을 조장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황태자와 황녀는 거의 전투적으로 병문안과 병간호에 힘썼다.
공주는 항상 논외였다. 아비에게 외면당하는 게 익숙한 첼루나는 이번 생에도 비슷한 흐름일 거라고 무의식중에 넘겨짚었다.
“함께 병문안을 가자고요?”
그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 첼루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 설마 안 갈 생각은 아니었지?”
텔레스는 동생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상대방이 너무 놀라서 황녀 본인도 덩달아 당황했다.
과거의 천덕꾸러기 공주와 현재의 이름난 성녀는 그 위상이 전혀 달랐다.
전생에는 첼루나가 황제의 병문안을 가든 말든 아무도 개의치 않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황태자나 황녀와 비슷한 정도로 주목했다.
첼루나는 아찔해졌다. 주기적인 병문안은 전혀 계획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전생과 달라졌을 줄이야.
하긴, 여태 자신의 회귀로 인해 많은 변화가 있었으니 이 정도는 사소한 축에 속했다.
“그건 아니에요.”
첼루나는 즉시 부정했다. 텔레스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으나, 굳이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럼 황태자랑 시간을 맞춰서 셋이 함께 가자. 그자랑 병문안까지 따로 가는 건 대외적으로 좋은 이미지는 아닐 거야.”
아픈 아버지 앞에서까지 파벌을 고집하는 모습은 백성에게 별로 좋은 본보기는 아니다.
진심이든 아니든, 황실은 국민 앞에서 적당히 연기해야 했다.
“네, 황녀 전하.”
첼루나는 얌전히 대답했다. 그녀는 황녀가 주변에 자기 사람들만 있을 때는 블레논을 황태자라고만 부른다는 사실이 퍽 씁쓸했다.
‘황태자 전하도 아니고 오빠도 아니고 이름도 아니고, 그냥 황태자.’
존칭 또는 가족을 나타내는 호칭, 친근한 본명도 아니다. 그저 건조하게 그의 직책을 가리키는 단어가 전부였다.
피 섞인 우리가 어쩌다 이런 관계가 되었을까. 만약 또 다른 세계가 있다면 그곳에서는 우리 모두 정말 사이좋은 남매였을지 궁금했다.
분명 후회는 없는데, 때때로 미련이 남았다. 더는 실망할 게 남아 있지 않을 때마저 새삼 상처가 생기듯.
“네가 폐하를 많이 불편해하는 걸 알아. 부디 견뎌 주렴.”
텔레스가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첼루나는 언니를 무감하게 보다가, 공손히 대답했다.
“염려하지 마세요, 전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생에도 그렇게 챙겨 주셨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괜스레 서운한 감정은 고이 묻어 두었다.
황녀는 황태자와 병문안 날짜를 조율했고, 첼루나는 거기 맞추기로 했다.
하여, 세 남매는 오랜 적의를 전부 해소한 척 다소곳한 자식의 모습으로 아빠 앞에 섰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점점 나아지는 중이다. 조만간 완쾌했으면 좋겠구나.”
황제는 파리한 낯으로, 그러나 선명한 음성으로 황태자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첼루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완쾌는,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