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14)

“황제 폐하께서는 좀 어떠세요? 차도가 있으신가요?”

“……모르겠어.”

데아론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첼루나는 다소 부정직하게 둘러댔다.

평소에는 연인에게 처절하리만큼 솔직한 그녀라, 불가피한 상황임에도 양심이 아팠다.

‘미안해, 데안. 그런데 네가 회귀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

황제의 건강은 앞으로 나아지지 않을 거다. 약 2년간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겠지.

적어도 전생에 첼루나가 확인한 황제의 운명은 덧없는 죽음이었다.

이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다는 점이 첼루나는 갑갑했다. 혼자 회귀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고독감이 그녀를 새삼 짓눌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공주님. 곧 나아지실…….”

무심코 위로를 건네던 데아론은 문장을 끝마치지 못하고 말꼬리를 뭉갰다.

그는 난감한 표정이 되어 첼루나를 살폈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며 묽게 웃었다.

“달래 줘서 고마워, 데아론.”

그런데 정말 그럴 필요 없어. 내 아버지는 2년 뒤에 돌아가실 테니까.

내 아버지. 내 아버지, 라.

첼루나가 황제를 아버지라 부르는 건 데아론이 후작가 사람들을 가족으로 칭하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일이었다.

심지어 첼루나의 경우 아버지라는 호칭이 아예 금지되었다.

황제의 자식들은 그를 폐하라고 불렀다. 심지어 황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맏아들조차. 그게 지엄한 법도였다.

그토록 까다로운 예법에 가로막혀 안 그래도 어려웠을 부녀 관계였다.

거기다 아버지의 학대와 냉대까지 더해졌으니, 감정은 돌이킬 수 없이 상했다.

그런 아버지의 건강을 온전히 염려할 수 있을까.

본인도 가족과 서먹한 데아론은 혹 제가 너무 무신경하게 굴었을까 봐 이제는 첼루나의 기분을 염려했다.

“제가 너무 함부로 말했나요?”

데아론은 중얼거렸다. 사실 공주님은 속으로 황제 폐하가 콱 죽기를 바라고 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지껄인 걸까?

어떻게 자식이 부모의 죽음을 바랄 수가 있냐고 위선적인 노인처럼 호들갑을 떨며 손가락질하고 싶지 않았다.

왜 세상은 자식에게 무작정 효를 강요하는가. 애초에 자식에게 사랑을 가르쳤어야 할 부모가 그 사랑을 보이지 않았는데.

인간이 받은 만큼 주고 사랑받은 만큼 사랑하는 공평한 존재라면, 저를 미워한 부모를 미워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텐데.

“아니야, 데아론. 그게 어떻게 함부로 말한 거야? 오히려 당연한 말을 한 거지.”

첼루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픈 아버지를 둔 연인에게 아버지의 쾌유를 빌어 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연한 일조차 이상하게 왜곡되는 자신의 환경이 지독하게 씁쓸했다.

“고마워, 데아론. 그렇게 일일이 신경 써 줘서. 버거우면 우리 다른 얘기 하자.”

아픈 황제와 뒤틀린 부녀 관계에 대해서는 더는 논하지 말자. 첼루나는 다시 데아론을 끌어안으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데아론은 그녀를 슬프게 마주 안았다.

“네, 공주님.”

사랑받지 못한 딸과 외면당한 사생아. 가족이 채워 주지 못한 결핍으로 너무 오랫동안 아팠던 그들은 서로의 품에서 온기를 찾았다.

첼루나는 전생을 생각했다. 전생에 황제 폐하가 쓰러지셨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는가. 그리고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어떤 마음이었는가.

기억이 영 흐릿했다. 전생에 그녀는 참 불행하고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

그녀는 끝까지 사랑받지 못한 천덕꾸러기 공주였고, 본인의 고통에 파묻혀 타인을 돌아보지 못했다.

유일한 예외는 데아론이었다. 첼루나의 우중충한 삶에 그가 유일한 빛이자 온기였다.

황제가 쓰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수 토벌대는 복귀했다. 데아론이 수도로 돌아오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 기억이 난다.

2년 뒤, 마침내 황제가 승하했을 때 첼루나는 슬픔이고 뭐고 느낄 틈이 없었다. 정치적 혼란은 극심했다.

황태자의 기사들과 황녀의 기사들은 급기야 수도에서 전투까지 벌였다.

황태자는 패배했고, 황태자의 동복동생인 첼루나도 체포당했다. 음습한 지하 감옥에 갇힌 그녀는 자신도 분명 죽을 거라 믿었다.

그 와중에 자기 아버지를 그리고 애도할 만큼 첼루나는 황제와 애틋하지 않았다.

애초에 황제가 와병한 이후 첼루나는 그를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황녀와 황태자는 그를 꼬박꼬박 문병했지만, 첼루나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고 그녀도 먼저 청하지 않았다.

‘딱 한 번 억지로 가기는 했지.’

과거를 곱씹던 첼루나는 새삼 떠오르는 끔찍한 기억에 조용히 진저리쳤다.

막내딸을 미워한 아버지는 병상에서도 어김없이 공주를 외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약 기운에 취한 황제가 중얼중얼 명했다.

<공주를……. 공주를 데려와. 막내를…….>

이름조차 불러 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가 누구를 칭하는지는 명백했다.

놀란 궁인들은 즉시 공주궁으로 달려가 첼루나를 데려왔고, 그녀는 겁먹은 채로 끌려왔다.

첼루나는 마지못해 병상까지 다가갔다. 아버지 앞에서는 학습된 분노와 공포가 몰려왔다. 황제에게선 폭언과 폭행만 기대하도록 길든 몸이었다.

그래도 첼루나는 예나 지금이나 겁먹었다는 티를 내기 싫어하는 자존심 강한 공주였다.

그녀는 짐짓 꼿꼿하게 서서 당돌하게도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그녀는 사뭇 불손한 어투로 물었다.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사나운 오기만 남아 태도가 삐딱해졌다.

주변 궁인들은 공주의 방자함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공주는 그들을 무시했다.

<물론이지. 그대가 보고 싶어 불렀다.>

황제가 문득 간드러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첼루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궁인들과 의사도 당황했다.

황제는 약 기운에 취해 탁한, 동시에 애틋함이 뚝뚝 떨어지는 파란 눈으로 공주를 사랑스럽게 응시했다.

<내 아름다운 제닌, 왜 이렇게 야위었어.>

아아. 첼루나는 얼어붙은 와중에도 억장이 무너졌다. 황제가 제게 손을 뻗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명도 신음도 불가능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니, 내 사랑, 왜…….>

자신이 죽은 황비를 보는 줄 알고 딸의 뺨을 쓰다듬던 황제는 문득 눈빛이 돌변했다. 첼루나의 심장이 뚝 떨어졌다.

<너, 제닌이 아니구나?>

짝! 쓰다듬던 손이 단숨에 후려치는 손으로 변했다.

뺨을 맞고 바닥으로 쓰러진 첼루나는 고통보다는 공포로 덜덜 떨었다. 궁인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와 공주를 부축했다.

<이 불길한 계집, 어디서 감히 네 어미인 척을 해!>

<폐하, 고정하십시오!>

궁인들과 의사들이 달려들어 날뛰는 황제를 막았다. 그사이 누군가 공주를 방 밖으로 이끌었다.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어서 처소로 돌아가십시오.>

직후 문이 쾅, 닫혔다.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진 공주는 황제의 경비병들이 자신을 흘긋대는 걸 느꼈다.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시녀도 호위도 없이 혼자 도망치듯 처소로 돌아갔다. 한쪽 뺨은 시퍼렇게 멍든 채.

‘……이번에도 부르려나.’

회상에 잠긴 첼루나의 눈빛은 공허했다. 그날 침실에서 숨죽여 울던 전생의 자신을 떠올리자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가여운 아이.’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꼭 안아 주고 싶다. 마음껏 울 수 있도록 품에 두고 울음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겠지.

‘나는 널 위해서도 싸우는 거야.’

회귀한 첼루나의 최우선순위는 데아론의 안전과 영예였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목표가 있었으니, 바로 자기 자신의 행복.

이번 생에 나는 반드시 행복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아니, 사람들 곁에서 평생.

전생에는 소중한 사람이 데아론뿐이었는데, 이번 생에는 아끼는 사람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엘리나와 친해졌고, 아델라가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언니에게 옛날보다는 많이 마음을 열었고, 시종들과 사제들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제야 사람답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게 무슨 느낌인지 그녀는 조금씩 배워 가고 있었다.

눈앞에서 연인을 잃고 회귀까지 해서야 어렵게 얻어 낸 소중한 행복이다.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이번 생에는 내가 네 몫까지 행복해질게.’

그러니까, 전생에 혼자 아파하며 울던 가여운 첼루나 포렌타인. 이제 너무 슬퍼하지 마. 내가 네 몫까지 곱절로 갚을 테니.

첼루나는 그렇게 조금씩 과거를 극복했다.

데아론 텔로아는 공주와 온종일 있다가 귀가했다.

사실 연인들이야 밤새도록 함께 있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그들은 저녁에 작별해야 했다.

앰벌리는 데아론 텔로아가 떠나는 걸 지켜보았다. 또한 그를 배웅하는 첼루나 공주를 지켜보았다.

그때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눈빛을 보고, 앰벌리는 가망이 없다는 걸 알았다.

“부르셨습니까, 공주님.”

앰벌리는 공손히 인사했다. 첼루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앰벌리를 바라보았다.

“라크문 경, 난 그대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있어.”

그녀가 나직하게 운을 뗐다. 앰벌리는 침묵했다. 공주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미 알 것 같았다.

첼루나 역시 자신의 의도가 이미 간파당했음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하지만 이미 간파당했어도, 어쨌든 말해야 했다.

“그대에게 기회를 주는 대가로 그대가 목숨 걸고 가져온 정보를 받았지. 그런데 그 대가, 더는 지급 못 할 것 같아.”

애초에 처음부터 낼 수 없는 값이었다. 제 마음을 얻을 기회라니, 데아론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있을 수 없는 기회였다.

처음부터 마음을 줄 생각조차 없었으면서 그의 연정을 이용해 그를 첩자로 써먹었다.

정쟁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그녀가 앰벌리에게 준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제는 황태자 전하가 알아내서 그대가 더는 배신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야 털어놓고 사과해서 미안해.”

첼루나는 끝까지 교묘했다. 황녀가 돌아와서 전세가 확실히 뒤집힐 때까지 계속 앰벌리를 애태웠다. 그가 나중에라도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막기 위함이었다.

첼루나의 술수는 성공적이었다. 황태자가 앰벌리의 배신을 알아내고 그에게 머리끝까지 분노했으니, 앰벌리는 이제 생존을 위해서라도 계속 황녀와 공주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미안해, 라크문 경.”

이제야 사과하는 것도 위선이라면 위선이었다. 그러나 다 들킨 마당에 뻔뻔하게 뻗대는 것도 우스웠다.

이기적인 첼루나는 그렇게 죄를 고백했다. 스스로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데아론이 귀환했으니, 공주궁에는 매일 연인이 들락거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앰벌리에게 더는 기회 운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만은 이제 끝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