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네가 내게 품위를 가르치는 날이 다 오네.”
블레논이 비꼬았다. 첼루나는 침묵했다.
블레논은 인사말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첼루나는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라크문 경, 내가 가서 치료나 받으라고 했을 텐데.”
첼루나는 한숨짓듯 나무랐다. 앰벌리는 여전히 한쪽 뺨이 발갛게 부은 채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무례라는 걸 알면 하지 마. 내 명에 복종하지 않는 걸 보니 네 충정은 거짓인가 보지?”
첼루나는 괜히 뾰족하게 말했다.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게 진정한 호위의 미덕임을 그가 모르지도 않을 텐데.
앰벌리가 자신이 걱정돼서 여기 남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방금 오빠와 대면한 탓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일까. 감동보다는 짜증이 앞섰다.
“충정이 거짓이라뇨. 오해이십니다.”
앰벌리가 나직하게 반박했다. 진심으로 상처받은 표정이라 첼루나는 되레 미안해졌다.
“그럼 앞으로 내가 더 오해하지 않도록 해.”
미안하고 머쓱한 마음에 괜스레 까칠함만 늘어났다.
첼루나는 문을 닫고 다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순간, 세상이 왈칵 기울었다.
“공주님!”
여러 명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첼루나는 멍하게 생각했다. 왜 다들 이렇게 놀라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녀가 일순 넘어질 뻔하긴 했지만, 결국 땅에 부딪히지는 않았는데.
그녀는 곧 자신이 땅바닥에 쏟아지지 않은 이유가 앰벌리가 곧바로 팔을 뻗어 그녀를 감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사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받쳤다. 남자의 다급한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공주님, 부디 제가 공주님을 안아 드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전혀 내키지 않은 일이었지만, 첼루나는 고집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혼자 걷기 힘든 상태라는 걸 현명하게 인정하고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래, 좀 도와줘.”
앰벌리는 첼루나의 어깨와 다리를 안고 그녀를 품에 받쳤다.
응급 처치에 불과한 일이긴 했지만, 첼루나는 데아론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꼈다.
“침실 바로 앞까지만 옮겨 놔.”
“네, 공주님.”
앰벌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신속하고도 안정적인 걸음으로 이동했다.
첼루나는 그에게 필요 이상으로 닿고 싶지 않아서 고집스레 팔짱을 낀 자세였다. 곧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제 목에 팔을 두르셔야 떨어지지 않습니다.”
상체가 한쪽으로 위태롭게 기우는 게 느껴지기는 했다. 첼루나는 굳은 낯으로 엉거주춤 앰벌리의 목을 안았다.
“감사합니다.”
앰벌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첼루나는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빠르게 쿵쿵 울리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게 앰벌리의 의복 너머로 전해지는 진동이라는 걸 깨닫고 첼루나는 더욱 불편해졌다.
다행히도 집무실에서 침실까지는 거리가 별로 멀지 않았다. 앰벌리는 문 바로 앞에서 첼루나를 내려놓았다. 시녀 엘리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요즘에 그냥 좀 피곤했나 봐.”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한 시국이었다. 요새 황궁의 분위기는 어수선함 그 자체였다.
겨우 의식은 회복했으나 여전히 몸 상태가 아슬아슬한 황제, 격하게 재개된 황태자와 황녀의 살벌한 암투, 덩달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궁인들까지.
전생과 달리 소용돌이 한복판에 자리한 첼루나는 그 예민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매일 멀쩡한 척하는 게 벅찼다.
그 와중에 못돼 먹은 오라비와 한바탕 싸움까지 벌이고 나자 말 그대로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그저 당장 쉬고 싶었다.
“잠깐 누워 있으면 괜찮아질 것 같아. 세숫물을 좀 준비해 줄래?”
“네, 공주님.”
손발과 얼굴을 온수로 씻은 뒤 첼루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실에 얌전히 누웠다.
어둑한 고요에 자신을 맡기자 그나마 마음이 평안해졌다.
첼루나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데아론.’
제게 온전한 위로가 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이름을 그리다가, 그녀는 어느새 잠들었다.
황녀의 귀환과 함께 마수 토벌대에게 복귀 명령이 내려졌다. 그들은 기쁘게 복종했다.
황제 폐하께서 앓아누우셨다는 소식에 제국의 신하로서 슬퍼해야 마땅하겠지만, 그중 대부분이 황제에 의해 내쫓긴 몸이라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별로 현실성은 없는 얘기였다.
기사들은 무사히 귀향했다. 성대한 환영회는 없었다. 황제가 와병한 지금 황족들과 귀족들은 각자 사치를 삼가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며 그의 쾌유를 빌어야 했다.
새로운 서부의 영웅, 마수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텔로아 후작의 둘째 아들은 그토록 단출한 치하에 만족해야 했다.
섭섭한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남들 앞에서 축하받고 칭찬받는 데 별 욕심이 없는 그였다.
그는 오직 단 한 사람의 인정을 갈구했고, 그 사람은 데아론을 열렬히 맞이했다.
수도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데아론은 공주궁에 초대받았다. 데아론은 조용히 입궁했다.
“데아론!”
“공주님.”
“돌아온 걸 환영해.”
여름날이 화창하여 후원에서 함께 다과라도 즐기면 좋겠지만, 보는 눈이 많았기에 두 사람은 소박하게 응접실에서 만났다.
황제가 아픈 때였다. 이럴 때 애인이나 불러 시시덕거리는 철딱서니 없는 모습으로 황태자가 자신과 데아론을 비난할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둘이 사귄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더는 조심스러울 이유가 없었다.
황녀가 쫓겨나고 황자가 황태자가 된 이후, 다들 블레논의 승리를 확신하는 상황에서 텔레스 쪽 사람과 친분을 과시하는 건 위험하고 아둔한 일로 여겨졌다.
첼루나가 서부에 있는 애인에게 편지 한 통 쓸 때마다 검열의 위기를 무릅써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황녀가 궁으로 복귀한 지금, 적어도 그런 면에서는 거리낄 게 없어졌다.
첼루나는 이제 다시 당당히 언니 편을 들었고, 언니의 기사와 사이좋게 만나는 모습은 그녀의 정치적 선택에 힘을 실어 주었다.
물론, 고작 그런 전략적인 이유로 데아론을 만나는 건 아니었다. 어찌 그깟 정치가 전부일까.
데아론을 사랑하는 건 이제 그녀에게 목숨과도 같았다. 이것저것 계산해서 재단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입 맞춰도 되겠습니까?”
“기꺼이.”
연인이 달게 속삭인 말에 첼루나는 벌써 들떠서 눈을 감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워서 데아론은 픽 웃었다.
“입술에 말고, 손등에요.”
“아.”
데아론이 생글생글 부연하자 첼루나는 머쓱해졌다. 데아론은 꿀 같은 시선으로 덧붙였다.
“나름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기사잖아요? 사모하는 숙녀에게 경애의 키스를 바치는 기사, 뭐 그런 분위기 좀 내 보려고요.”
“아하, 상황극이야?”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데아론의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정말로 무사 귀환의 영광을 공주님께 경건히 바치고 싶었다. 한 남자로서뿐만 아니라, 한 기사로서도.
“허락해 주시겠어요?”
데아론이 거듭 물었다. 첼루나는 맑게 웃었다.
“데아론, 너는 내게 따로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어.”
상대방이 진지했듯 그녀도 그러했다. 첼루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데아론을 엄숙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활활 타는 금빛 눈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어서 키스해.”
데아론은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낮췄다. 그는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첼루나의 손을 감쌌다. 살갗이 스치자 첼루나는 전율했다. 데아론이 속삭였다.
“모든 기다림의 순간을 당신께 바칩니다.”
입술이 손등을 지그시 눌렀다. 첼루나는 간지러운 느낌에 꼼지락댔다. 데아론은 고백을 이어 갔다.
“매일 당신을 그리며 그 삭막한 곳에서 버텼어요.”
매일같이 괴물을 사냥하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던 곳.
그 황량한 서부에서 데아론은 첼루나와 주고받은 편지의 한 문장, 한 단어, 한 글자까지 버팀목 삼아 긴 시간을 견뎠다.
“밤마다 꿈속에서 당신을 봤습니다. 당신이 저를 지켜 주셨기에 제가 산 거예요.”
기사가 주군에게 바치는 언어라기엔 과하게 절절하고 뜨거웠다. 첼루나는 쌩긋 웃었다.
“그래? 밤마다 꿈속에서 나랑 뭘 했는데?”
다시 보니, 제법 엉큼한 미소였다. 그래서 데아론도 농밀하게 마주 웃었다.
“글쎄요.”
그는 기사의 모습에서 남자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스물한 살인 그는 이번 삶의 그 어느 때보다도 키가 컸다. 손도, 목도, 어깨도, 전부 바위처럼 굵고 단단했다.
“워낙 다양하고 광범위한 일을 해서 일일이 다 말씀드리긴 힘들어요.”
남자가 속닥였다. 그가 여자의 뺨을 감쌌다. 입술이 겹쳤다. 첼루나는 자동으로 눈을 감고 신음했다.
“그런데 하다 보면 재현은 가능할 것 같긴 해요.”
그 요염한 남자, 아니, 수컷이 선포했다. 첼루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헐떡이는 숨소리에 벌써 말이 뚝뚝 끊겼다.
“그럼 어서 재현해 봐.”
그녀가 명령했다. 그의 노력을 돕기 위해 그녀는 먼저 입을 맞췄다. 달차근한 숨결이 섞였다. 녹진한 향이 열기를 부추겼다.
연인들은 다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 싸움터에서도 그들은 서로 사랑해야 했다.
둘 다 여태 사랑을 위해 살았으며, 그중 한 명은 한때 사랑을 위해 죽기까지 했으므로.
그들 주변에는 사랑을 믿지 않는 냉소적이고 상처받은 인물들이 가득했지만, 그들은 그 사랑 덕분에 지금껏 고독에 짓눌려 질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런즉 그들은 기어이 서로 사랑해야 했다. 그것만이 외로움에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방법이었으므로.
“하아……!”
“첼루나, 사랑해요.”
애틋한 자극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달아오른 살갗을 어루만지며 데아론은 쉴 새 없이 고백했다.
“사랑해요, 첼루나.”
“흐응, 나도…….”
아예 사랑으로 시작한 두 번째 삶이었다. 회귀 후 첼루나의 첫 번째 목표는 데아론을 살리는 거였다. 그만큼 사랑은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
“사랑해, 데아론. 사랑해.”
이번 생에는 부디 그들의 사랑이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함께 늙어 갈 수 있기를, 스물세 살에 비참하게 끝나지 않기를 첼루나는 간절히 빌었다.
사랑하고 사랑해서 다만 그렇게 소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