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녀로 들어오고 싶다고?>
황녀가 귀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델라는 첼루나를 찾아갔고, 첼루나는 친구를 데리고 언니에게 갔다.
거기서 아델라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네, 황녀 전하. 단순히 시녀로서뿐만 아니라 전하께서 원하시는 그 어떤 방법으로든 전하께 충성하고 싶습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그 대가로 그대가 원하는 건 뭐지?>
텔레스 역시 곧장 본론으로 건너뛰었다.
원래 주인인 황태자를 버리고 제게 충성하고 싶다는 아델라의 말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첼루나가 그녀의 신의를 보증했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동생이 아버지가 쓰러지는 날짜까지 예지하고 그 사실을 제게 은밀히 알린 순간부터, 텔레스의 첼루나를 향한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제 동생 대신 제가 프란체스 소백작이 되고 싶습니다.>
아델라는 단도직입으로 털어놓았다.
어차피 앞에 황녀와 공주 외에는 아무도 없겠다, 사교계 화법대로 빙빙 돌려 말할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제 동생은 백작위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부모님은 그 애가 아들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자리를 물려주고자 하십니다. 제가 끝까지 전하께 충성한다면,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시는 날에 부디 제게 소백작 자리를 허락해 주십시오.>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요청이었다.
텔레스는 아델라의 투명한 야심이 마음에 들었다. 원래 욕심이 뚜렷할수록 이용하기도 더 쉬운 법이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앞으로 그대가 먼저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또 다른 쓸모 있는 패를 얻었다는 생각에 텔레스는 즐거워졌다.
황녀가 너그럽고도 엄중하게 타이르자 아델라는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죽는 날까지 따르겠습니다.>
황녀는 바로 다음 날 황태자에게 아델라 프란체스를 황녀궁 소속으로 바꿔 달라고 청했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기에 황태자는 승낙했으며, 그때부터 프란체스 일가 전체를 향한 그의 의심이 시작됐다.
그 와중에도 황제는 계속해서 아팠다. 여러모로 불안정한 시국이었다.
전생에는 그 누구도 황제가 쓰러질 시기를 미리 알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정정하던 황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거라고 상상한 이도 없었다.
그래서 텔레스는 반격이 늦었다. 그녀가 부친의 와병 소식을 알아내고 허겁지겁 귀국했을 때쯤에는 블레논이 이미 섭정이 되어 멋대로 실권을 잡은 뒤였다.
텔레스가 결국 판을 뒤엎긴 했지만, 만약 그녀가 미리 알고 더 일찍 환궁했더라면 훨씬 덜 까다로운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회귀 이후 첼루나의 비밀스럽고 간접적인 전언은 텔레스에게 몹시 유리한 패를 제공했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투병에 블레논이 미처 적응하기도 전에 텔레스는 홀연히 나타나 당당하게 국정에 개입했다.
전생에는 황태자가 섭정을 핑계로 황제의 모든 권한 대행을 독점하는 게 가능했지만 이번에는 텔레스의 교묘한 훼방 때문에 독식이 어려워졌다.
블레논은 급격하게 초조해졌다. 너무 많은 불리한 변화가 빠르게, 한꺼번에 일어났다.
든든한 지지자인 아버지가 쓰러지셨고, 그의 아내는 여전히 아이가 없었으며, 꼴사나운 이복동생이 예고도 없이 다시 나타나 멋대로 황궁을 휘젓고 다니는 꼴이었다.
게다가 동복동생도 문제였다. 아버지가 쓰러질 것을 미리 알고도 제게는 철저히 함구한 음흉한 계집애.
첼루나를 향한 블레논의 증오가 불타올랐다. 원래도 워낙 하찮게 여기던 동생이라 분노는 더욱 심했다.
저보다 못난 존재에게 한 방 먹었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팍 상했다.
‘성녀라는 게 사제들 선동질이나 하는 줄 알았더니…….’
첼루나가 예지몽을 꿨다는 소문이 궁인들과 귀족들 사이에서 조금씩 퍼지면서 그녀를 경외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블레논이 그러했듯 황제가 쓰러질 걸 미리 알고도 예방책을 마련하지 않은 게 악랄한 불충이자 불효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첼루나가 이를 예지했다는 사실 자체에 초점을 맞추며 조금씩 첼루나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공주님은 정말로 신비한 힘을 가졌구나.
한때는 성질 나쁜 천덕꾸러기였지만, 이제는 경외와 경애를 받는 위대하신 성녀님.
그리고 그 위대하신 분께서는 언니인 텔레스를 지지한다.
여론이 술렁이기에 충분했다. 이제라도 다시 황녀에게 줄을 대야 하는 건 아니냐고 귀족들이 수군대는 걸 블레논이 모르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표면 바로 아래서 분노가 들끓고 있던 차에 첼루나를 향한 그의 화를 기어코 폭발하게 만드는 사건이 터졌다.
“황태자 전하?”
공주궁의 시종은 난감한 기색이 되었다. 미리 오겠다는 전갈도 없이 험상궂은 낯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황태자라니, 절대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충직한 시종은 황태자의 앞을 가로막기 위해 용감한 걸음을 디뎠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충성스러운 황태자의 호위가 시종을 옆으로 휙 떠밀었다.
황태자는 방해받지 않고 공주의 집무실 바로 앞까지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짜증스러운 방해꾼을 만났다.
“황태자 전하, 미리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이 빌어먹을—”
새파란 눈이 칼날처럼 빛났다. 블레논은 손을 들어 앰벌리의 뺨을 세게 쳤다. 앰벌리는 신음 한 번 없이 얻어맞았다.
“더러운 배신자 새끼, 염치가 있다면 알아서 자결해라.”
앰벌리 라크문이 내내 이중 첩자로 있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아냈다. 블레논의 분노는 무시무시했으나 앰벌리는 서늘하게 침착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저는 그냥 염치가 없는 걸로 하겠습니다.”
“감히—”
한때 충신이었던 자의 나직한 반항에 블레논은 으르렁대며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때 집무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황태자 전하, 부디 복도에서 소란 피우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새 한층 오만해진 첼루나 공주였다. 블레논은 여전히 앰벌리를 움켜쥔 채 동생을 노려보았다. 공주의 금빛 눈이 고압적으로 빛났다.
“그리고 제 호위 기사는 부디 놓아주시고요. 아랫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황태자라니, 별로 모범이 되는 장면은 아니네요.”
“황태자에게 모범을 가르치다니, 너도 참 많이 컸구나.”
블레논은 짓씹듯 비꼬았다. 첼루나는 냉담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눈길이 앰벌리의 붉게 부은 뺨에 닿았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황태자 전하.”
앰벌리가 뺨을 맞는 소리는 방 안에서도 들렸다. 원래도 뛰쳐나오려고 하긴 했지만, 그 소리를 듣자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앰벌리를 딱히 아끼는 건 아니었다. 다만 첼루나는 약자에게 자행되는 폭력이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오랫동안 피해자였던 그녀는 뻔뻔한 가해자를 혐오했다.
“초대를 받아들이지.”
블레논은 거듭 빈정댔다. 그는 앰벌리를 툭 내려놓고 첼루나를 지나쳐 먼저 집무실로 들어갔다.
앰벌리는 따라 들어갈 것처럼 움찔했다. 그러나 첼루나가 그녀를 막았다.
“들어오지 마.”
“하지만, 공주님.”
“괜찮아, 들어오지 마. 가서 치료나 받아.”
첼루나는 앰벌리를 등지며 문을 닫았다. 그녀는 작게 심호흡한 뒤 블레논을 마주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황태자 전하?”
창피하게도,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첼루나는 여전히 블레논이 무서웠다. 그가 처음으로 제게 살해 위협을 속삭였을 때의 공포가 잊히지 않았다.
“알면서 묻지 마, 이 건방진 것아.”
“정말 모르겠는데요.”
“정말 몰라?”
“네. 전하께서 화낼 만한 이유가 워낙 많아서 그중 뭐가 정확히 문제인지 가늠이 안 돼요.”
“너, 진짜……!”
블레논이 동생에게 성큼 다가갔다. 첼루나는 흠칫 떨었다. 블레논은 동시에 우뚝 멈췄다.
“……왜, 못 때리겠어?”
첼루나는 상대방이 같잖고도 증오스러워 날카로운 반말로 씹어 뱉었다. 그녀가 오빠를 노려보았다.
“이제는 못 때리겠어? 얼굴에 상처 나면 안 되니까? 내가 그 유명한 성녀라서? 이렇게 되기 전에 잘해 줬어야지!”
“어디서 뻔뻔하게 신경질이야? 네가 먼저 배신했잖아!”
블레논이 고함쳤다. 첼루나는 진심으로 기가 막혔다. 그녀는 허탈하게 되물었다.
“배신? 배신이라고? 우리 사이에 애초에 신뢰 같은 게 있었어?”
“우리는 동복이잖아! 대체 왜 황녀한테 붙은 거야?”
진심으로 기막힌 건 블레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째서 첼루나가 이런 길을 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상처 준 건 모두 잊은 뻔뻔한 가해자의 태도였다.
“정말로 몰라서 물어요?”
첼루나는 이제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더는 그럴 힘도 없었거니와, 갑자기 그럴 가치조차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 내가 이놈한테 소리를 질러 봤자.
“나한테 잘해 줬어야지.”
“뭐?”
“때리고, 무시하고, 어머니 죽이고 태어난 년이라고 욕하고. 그런데도 내가 당신 편이 되기를 바랐어?”
지금 당장은 싸우고 싶지 않았다. 첼루나는 오히려 진지한 태도로 해답을 구했다.
정말로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당신은, 내 오빠인 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그토록 나락에 빠트렸는지.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었잖아. 당신 말대로 동복이었는데.
“지금 유치하게 이러기야?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그리고 뉘우침 없는 가해자는 기본적으로 피해자와 말이 통하지 않는 법이다. 견고한 몰이해의 벽이 남매 사이를 가로막았다.
“고작 어릴 때 서운했던 걸로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폐하께서 쓰러지실 거라는 사실까지 숨기고 내 곁에 첩자를 심어 가면서까지 이렇게……!”
그는 동생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려고 노력해 볼 의지조차 없었다.
첼루나는 자신의 오빠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이미 실망하고 실망해서 더 실망할 부분도 없을 텐데, 새삼스레 가슴 한쪽이 너무 아팠다.
“사과하진 않을게.”
첼루나는 냉정하게 내뱉었다. 빈말로라도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제발 가 주세요, 황태자 전하. 품위 없이 동생 방에서 계속 난동 부리지 마시고요. 저도 요즘은 꽤 바쁘답니다.”
역할도 의무도 권리도 없던 천덕꾸러기 공주 첼루나는 요즘 성녀로서 교회의 일을 조금 나눠 갖게 되면서 집무실을 쓸 구실이 생겼다.
이는 블레논이 첼루나에게 분노하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교회는 원래 블레논을 지지했는데, 대사제가 성녀와 손잡으면서 일반 사제들과 평신도들의 마음도 점점 방향이 기울고 있었다.
블레논이야 참 답답하고 안타깝겠지만, 첼루나는 연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