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14)

말을 몰아 단숨에 황궁 앞에 도착한 텔레스는 감회가 새로웠다. 어둑한 새벽빛 너머로 익숙한 건물의 윤곽이 보였다. 가슴이 부풀었다.

아아, 이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하며 추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돌아왔다.

“누굽니까? 신원을 밝히시오!”

정체불명의 인마 서너 쌍이 접근하자 황궁 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황녀가 자신의 도착을 예고하지 않고 비밀스레 왔으므로, 당연히 궁의 경비병들도 아직 황녀의 귀국 사실을 몰랐다.

“나는 텔레스 포렌타인 황녀다.”

본인이 엄중하게 외쳤다. 익숙한 이름을 알아듣고 경비병들은 흠칫 놀랐다.

텔레스는 얼굴을 가리던 두건을 내렸다. 아비와 오라비를 똑 닮은 금발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황제 폐하를 뵈러 왔으니, 문을 열도록.”

황제가 쓰러진 시점보다 정확히 반나절 뒤였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블레논은 정정하던 황제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충격에 미처 적응하기도 전에 경악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황녀가, 제 짜증스럽고 무시무시한 이복동생이 돌아왔다.

“감히 말도 없이?”

블레논이 씹어 뱉었다. 황태자는 접견실에서 황녀를 마주했다.

황녀는 아직 여행복 차림이었고, 주변에는 약혼자 포함 호위가 세 명밖에 없었다.

그만큼 조촐하고 비공식적인 인원으로 몰래 국경을 넘어 밤낮없이 달려왔다.

“입국하려면 보고했어야지. 최소한의 절차도 모르냐?”

“어머, 황태자 전하. 벌써 황제라도 되신 것처럼 굴면 곤란해요. 입국 허가는 폐하께 받아 내는 거지, 당신한테 받아 내는 게 아니거든?”

황녀는 피로한 기색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느직하게 비꼬았고, 황태자는 끓는 화를 겨우 삭이며 이를 악물었다. 각각 주군을 둘러싼 호위들은 과묵하게 긴장했다.

“그래서, 폐하께 허가를 받아 내기는 했니?”

“그럴 틈이 없었다니까.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정석적인 절차를 밟지 않아서 죄송해요. 하지만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냉정하게 절차나 따지고 있었겠어요? 폐하께서 위독하시다고 전갈을 받았는데 곧장 움직이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불효지요.”

“폐하께서는 어제저녁에 쓰러지셨어. 그런데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왔다고?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블레논은 상식적으로 화내려다가 말을 뚝 그쳤다.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에 떠오른 탓이었다. 텔레스는 짐짓 엄숙하게 고했다.

“우리의 동생 첼루나 공주가 제게 미리 연락을 넣었어요. 예지몽을 꾸었대요. 폐하께서 와병하시면 나라가 혼란스러울 테니 제가 와서 황태자 전하를 잘 보필하면 좋겠다고.”

저토록 근엄한 태도로도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는 건 황녀의 대단한 재주가 분명했다. 블레논은 낮게 실소했다.

“첼루나가 예지몽을 꿨다고.”

4년 전 마탑 사건 이후로 워낙 눈에 띄는 행보가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걔가 성녀가 맞기는 맞는구나.

예지몽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었다.

물론 예지력이 아닌 회귀로 인한 결과였지만, 어느 쪽이든 결과적으로 블레논에겐 매우 부정적인 변수였다.

“그런데 너한테만 알렸다? 쥐새끼처럼 몰래. 나한테는 한마디 말도 없었는데.”

블레논의 말투가 위험해졌다. 그의 눈이 사납게 빛나는 걸 보고 텔레스는 앞으로 이복동생을 더 잘 보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전하께서는 이미 여기 계시잖아요. 굳이 전하께 알릴 필요가 뭐가 있나요? 저야 먼 외국 땅에 있었으니 아프신 아버지를 뵈려면 허겁지겁 달려왔어야 했는데, 당신은 아니잖아.”

“폐하께서 쓰러지실 거라는 걸 알고도 고하지 않은 건 불충이야. 반역죄라고. 미리 알았으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어.”

블레논의 음성이 스산해졌다. 이건 텔레스도 충분히 생각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즉시 싸늘하게 받아칠 수 있었다.

“그럼 어디 한번 반역죄로 고발해 보든가. 이 시국에, 폐하께서 쓰러지시기까지 했는데.”

황제가 와병하여 안 그래도 혼란한데, 아버지를 대신해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어야 할 황태자가 자기 동복동생을 반역자로 몰아간다고? 심지어 그 유명하신 성녀님을?

황실이 콩가루 가족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고 황태자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며 어지러운 국정을 더욱 어지럽히는 일이었다.

블레논이 이를 모를 리 없었고, 텔레스는 그의 정곡을 찔렀다.

적어도 황제의 건강에 차도가 있을 때까지는 남매끼리 물어뜯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가서 쉬어. 먼 길 헐레벌떡 달려오느라 피곤할 텐데.”

블레논은 별안간 웃었다. 여우처럼 눈매를 길게 찢으며 뱀처럼 달콤하게 짓는 미소였다.

“돌아온 걸 환영한다, 내 동생.”

나긋한 목소리가 위험했다. 텔레스는 산뜻하게 대꾸했다.

“환영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둘 다 눈빛은 새파랗고 예리했다.

황궁은 다시 본무대가 되었다.

불과 몇 주 사이에 제국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황제께서 앓아누우시더니 황녀께서 귀환하셨고, 몇 가지 인사이동이 있었다.

“저, 앞으로 황녀 전하의 시녀가 되기로 했어요.”

스물한 살 아델라 프란체스는 어느 침울한 가족 만찬에서 느닷없이 폭탄 발언을 터트렸다.

“당장 내일부터 황녀궁에서 일 시작해요. 다들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뭐라고?!”

프란체스 백작이 경악한 건 당연지사였다. 백작 부인은 딸을 낯선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로날드 프란체스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아델라 혼자 차분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미 인가하신 일이에요. 아버지, 어머니,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전하한테서 전과 같은 호의를 바라기 어렵겠네요.”

“너, 이—”

“여보, 제발 침착하세요!”

다혈질인 프란체스 백작이 당장 딸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 벌떡 일어나자 옆에서 백작 부인이 뜯어말렸다. 로날드는 놀라서 움츠렸다. 아델라는 아빠를 꿋꿋이 쏘아보았다.

“아버지, 이건 기회예요. 제발 생각해 보세요. 다들 서로 눈치만 살피면서 언제쯤 황녀 전하께로 갈아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렇게 오래 고민해 봤자 해결책이 나오나요? 뭐든 행동으로 옮겨야지.”

“야, 이것아, 갈아타긴 뭘 갈아타? 차기 황제는 당연히 황태자 전하시다!”

“언제까지요?”

“뭐라고?”

“언제까지 그럴 것 같냐고요. 그건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기 전의 얘기였잖아요.”

“아델라, 말조심해라.”

이번에 차갑게 경고한 건 엄마 쪽이었다. 아델라는 백작 부인을 휙 째려보았다.

“황태자 전하나 황녀 전하나 승산은 비슷하지만 제 생각엔 이대로 가면 결국 유리한 쪽은 황녀 전하예요. 황태자 전하의 권력 대부분은 황제 폐하의 무한한 총애에서 나왔는데, 폐하께서 계속 편찮으시다면—”

“말조심하라고 했다!”

백작 부인의 얼음 같은 음성이 쨍하게 울렸다. 로날드는 이제 거의 석상이었다.

아델라도 속으로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처럼 쇠고집이었다.

“저도 제가 되게 예민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건 아는데, 예민하다고 언제까지 덮어 둘 작정이세요? 어차피 언젠가 한 번쯤은 시원하게 터놓고 얘기해야 할 문제였어요.”

“아델라, 설마 네가 백작이 되고 싶어서 이러는 거냐?”

프란체스 백작은 문득 정곡을 찔렀다. 이번만큼은 아델라도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아버지를 말없이 쏘아보기만 하자 백작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변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이 자리는 네 자리가 아니다! 황녀께서 황제가 되면 너도 백작이 될 확률이 높아질 거로 생각하나 본데—”

“내가 대체 얘보다 못한 게 뭐야!”

이제는 아델라도 폭발했다. 하여튼, 그녀는 아빠를 참 많이 닮았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씩씩대며 로날드를 포악하게 가리켰다.

“내가 얘보다 잘할 수 있어! 이 악물고 하겠다고! 그런데 왜 맨날 저한테는 혼처나 얻어 주려고 해요? 내가 여자애라서?!”

“이게 지금 어디서 감히 소리쳐? 지금 네 부모한테 대드는 거냐?!”

“아버지가 먼저 저한테 소리쳤잖아요!”

“둘 다 그만!”

이번에도 부녀의 폭풍 같은 싸움을 중재하는 건 서릿발 같은 백작 부인의 몫이었다.

서로 똑 닮은 얼굴로 흉포하게 노려보던 부녀는 씨근덕대며 반걸음씩 물러났다.

“아델라, 방으로 가.”

백작 부인이 딸에게 명령했다.

아델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으로 엄마를 노려보다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돌아섰다. 음식은 절반 이상 남긴 채였다.

“제정신이 아니야. 황녀 전하의 시녀가 되기로 했다니, 그럼 우리는……!”

백작은 울상이었다. 백작 부인도 단순히 난감함을 넘어 딸에게 차가운 분노를 느꼈다.

가족 전체가 황태자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아델라 혼자 황녀궁으로 소속을 옮기다니, 그건 귀족 사회에서 절연으로 받아들여져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이제 프란체스 백작가를 향한 황태자의 시선은 절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딸을 쫓아 백작 내외가 언제 자신을 배신할지 몰라 늘 의심하고 냉대하겠지.

어쩌면 황태자가 먼저 백작가를 쳐 낼지도 모른다. 황족들이 으레 그러듯, 냉혹하고 철저하게.

“저기, 아버지, 어머니.”

한편, 황족들의 정치보다는 조금 더 개인적인 일에 정신이 팔린 열아홉 살 로날드가 작게 웅얼댔다.

백작 내외는 동시에 아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백작위는 그냥 누나한테 물려주시면 안 돼요?”

“뭐?”

백작의 낯빛이 아득해졌다. 백작 부인은 일단 자기 청각부터 의심했다.

로날드는 언제나처럼 소심하게, 동시에 간절하고 진지하게 덧붙였다.

“저보다는 누나가 훨씬 잘할 것 같은데.”

이건 진심이었다. 하지만 핵심은 아니었다. 로날드는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었다.

“저는 가주가 되고 싶지 않아요.”

로날드는 누나의 열정과 야망이 두렵고도 부러웠다. 자신은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딱히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았다.

느긋하고 온순한 성격의 그는 백작가의 가주라는 부담스러운 직책을 한 번도 스스로 원한 적 없었다.

그러나 백작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난 그에게는 강요되고 기대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거꾸로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을 금지당한 아델라에게, 남동생의 그런 고충은 어쩌면 배부른 소리로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 말을 왜 이제야…….”

“한 번도 물어보신 적 없잖아요.”

백작이 탄식하자 로날드는 뾰족하게 받아쳤다. 백작 부인의 표정은 다시 냉담해졌다.

“그건 네가 뭘 원하는지와 상관없는 문제야, 로날드. 프란체스의 이름을 받은 자로서 마땅한 의무라고.”

“누나는 프란체스가 아닌가요?”

로날드는 답답해서 반문했다. 백작 부인이 대꾸를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이번에는 백작이 손을 들어 싸움을 막았다.

“이 얘기는 여기서 멈추자. 일단 식사부터 마저 하고.”

백작은 한껏 지친 안색이었다. 백작 부인과 로날드는 바로 조용해졌다.

이 모든 소란을 옆에서 지켜본 시종들과 시녀들은 각자 귀먹은 척하느라 바빴다.

이 모든 건 아델라가 황녀와 일종의 밀약을 마친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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