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라운 빗소리는 속살대듯 이어졌다. 그게 영원인지 찰나인지, 대낮인지 밤중인지 더는 분간이 어려웠다.
입술이 닿았다. 말캉한 살이 저항 없이 열리자 틈새로 달금한 혀가 들어와 촉촉한 온기를 새겼다.
동작은 점차 농밀해졌다. 어느새, 온몸에 불꽃이 번졌다.
“흐으…….”
“첼루나.”
첼루나가 흐리게 신음했다. 데아론이 뜨겁게 속삭였다. 그들은 몇 년 전 어느 어둑한 테라스에서 그러했듯, 서로 잘근잘근 집어삼켰다.
비구름이 흩뿌린 어스름 속에서 두 연인은 서로 부둥켜안았다. 비단옷 너머로 들끓는 체열이 전해졌다. 상체가 서로 집요하게 비볐다.
“첼루나.”
“흐응.”
“사랑해요.”
헐떡임과 속닥임이 오갔다. 첼루나는 열기에 젖어 혼탁한 눈으로 연인을 바라보았다.
“나도 사랑해.”
전생에도, 지금도, 언제나. 시간이 뒤집히고 네 기억이 사라져도 나는 너를 사랑해.
“계속 키스하자.”
그리고 너 또한 내게 기어코 돌아왔어. 나와 달리 너는 우리의 오래된 6년을 잊었지만, 그럼에도 지금 너는 나를 보고 있어.
“데아론, 어서. 멈추지 마.”
우리가 두 번째로 처음 만났던 앳된 열일곱 살의 그날을 지나, 어느새 우리는 완연하게 여문 어른이 되었으니.
“하아, 첼루나, 잠시만.”
문자 그대로 잠시 산소가 부족했을 뿐이었다. 최대한 짧고 효율적으로 숨을 돌린 뒤, 데아론은 다시 입술을 포갰다.
혀와 혀가 겹치고 숨과 숨이 얽히며 가슴이 가슴을 눌렀다. 연정과 비례해 부푼 욕정이 그들을 하나로 묶었다.
“읏…….”
여인의 체온이 품으로 쏟아지자 사내는 탁하게 신음했다. 첼루나는 데아론의 입술을 핥았다.
데아론은 첼루나의 허리를 갈급하게 끌어당겼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칼에 얽혔다. 심장이 날뛰었다.
“비 내리니까 좋네.”
한참 뒤에야 데아론은 간신히 속삭였다. 흐트러진 옷차림과 헝클어진 숨소리는 서로 퍽 어울렸다. 첼루나는 푸스스 웃었다.
“그러게.”
첼루나는 데아론이 무심코 제게 말을 놓았다는 사실에 더더욱 마음이 벅찼다. 전생의 습관이 또 하나 돌아왔다.
“사랑해, 데아론.”
첼루나는 데아론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리 거듭해도 모자란 고백이었다.
“저도 사랑해요, 첼루나.”
데아론은 기꺼이 마주 안으며 연인의 머리에 뺨을 기댔다. 행복감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진짜 많이 사랑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받는 쪽도, 주는 쪽도.
소낙비가 허공을 적시는 동안, 두 연인은 잠자코 서로에게 기댔다.
* * *
데아론의 말이 맞았다. 기다리다 보니 비는 그쳤다.
아까 햇빛이 순식간에 밀려났듯, 먹구름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다른 찻집 찾아볼래? 앉고 싶어서.”
“다리 많이 아프세요?”
“못 견딜 정도로 아픈 건 아닌데, 너무 오래 서 있었잖아. 서거나, 걷거나.”
“바깥이라 아쉽네요. 아무도 안 보면 제가 업고 가는 건데.”
“나중에 우리 둘만 있을 때 실컷 업어 달라고 할게.”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비가 올 때나 해가 날 때나 두 사람의 대화는 달콤했다. 남은 데이트도 역시 그랬다.
나들이는 저녁쯤에 마무리되었다. 하늘이 비구름이 아닌 땅거미로 어둑해지자 더는 바깥에서 노닥거릴 핑계가 없어졌다. 각자 환궁 또는 귀가할 시간이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나도.”
“어떡하죠?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어.”
“조금만 참아. 내일 바로 다시 볼 거잖아.”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도 오래 걸렸다. 이조차 끝나는 시간이 아쉬워 각각 한마디씩 더 덧붙이다 보니 작별의 때는 하염없이 늘어졌다.
“그리고 데아론, 나 너한테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말씀하세요.”
때마침 첼루나는 데아론에게 중대한 요청이 하나 있었다. 오늘의 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네 형이랑 꾸준히 편지한다고 했지?”
“네, 맞아요.”
“그러면 다음에 편지 부칠 때 한 가지 내용만 추가해 줘. 단, 다른 사람이 읽었을 때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을 만한 식으로.”
첼루나는 어느새 진지해진 낯으로 속닥속닥 당부했고, 데아론의 눈빛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무슨 내용인데요?”
다른 사람이 읽었을 때 무슨 뜻인지 드러나지 않도록, 이라. 비밀스러운 얘기라는 뜻이었다.
어떻게든 모리안 텔로아에게 전하긴 해야 하는데, 혹시 누군가 도중에 편지를 가로챈다면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할 얘기.
첼루나는 자신의 편지가 검열당하고 있다고 거의 확신했다.
하지만 저 멀리 서부에서 데아론이 외국에 있는 형과 주고받는 서신은 그럴 확률이 훨씬 낮을 것이다.
그렇다고 온전히 방심할 수는 없기에, 편지에 예민할 내용을 적을 때는 특히 신중해야 했다.
“네 형이랑 네 형 약혼녀가 특정 날짜까지 반드시 수도로 돌아와야 해. 아마 내 오빠는 이를 막으려고 하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와야 해, 알겠지?”
네 형 약혼녀, 텔레스 황녀. 내 오빠, 블레논 황태자.
주변에 엿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첼루나는 대명사를 쓰는 데 있어 조심스러웠다.
“그 날짜는…….”
그리고 첼루나는 연인에게 자세한 숫자를 알렸다.
첼루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아직 모르지만, 황제가 심장병이 도져 쓰러지는 날이었다.
데아론의 짧은 휴가는 평화롭게 흘러갔다. 그러나 평화로운 순간도 언젠가는 끝나야 했다.
첼루나는 매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쉬움을 삼키며 연인을 떠나보냈다.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는 작별할 필요가 없을 것임을 속으로 조용히 되뇌며.
연인이 다시 서부로 떠난 뒤 첼루나는 얌전해졌다.
사실 작년 봄 블레논이 황태자가 된 이후로 첼루나는 이미 패배를 받아들인 사람처럼 대체로 유순한 생활을 영위했다.
첼루나가 외출하는 유일한 순간은 성녀의 이름을 걸고 교회의 사제들을 방문할 때였다. 기실 블레논은 이조차 못마땅했지만, 동생을 막을 명분은 없었다.
‘굳이 막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리고 어쩌면, 블레논은 이미 방심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앞에 방해물은 없어 보였다.
그는 공식적인 차기 황제로 임명되었고, 그를 총애하다 못해 편애하는 아버지는 정정하시며, 가장 위험한 적이었던 이복동생은 먼 외국으로 쫓겨나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웬만한 사람은 모든 긴장이 풀리고도 남을 환경이었다.
인간은 정녕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기에, 이토록 인생이 탄탄대로를 달릴 때 아무 의심 없이 웃을 수 있었다.
‘앰벌리 말로는 연인이랑 편지 주고받는 것 빼고는 특이 사항도 없다고 하니까…….’
그가 호위로 가장한 감시 역할로 동생 옆에 붙여 둔 앰벌리 라크문은 그에게 공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꾸준히 보고했다.
교회에 방문하고 애인에게 편지를 쓰는 것 외에는 별다른 행동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편지마저 실은 블레논 측에게 몰래 검열당하고 있었다.
‘앰벌리 그 녀석은 좀 성과가 있으려나.’
블레논은 히죽 웃었다. 앰벌리가 자신의 동생을 원한다는 걸 알고 동생을 감시도 할 겸 앰벌리를 공주궁에 보냈다.
가까이 있다 보면 기회가 생기겠지. 판은 자기가 깔아 줬으니, 공주를 얼마나 잘 꾀어낼지는 앞으로 앰벌리 본인이 해내야 할 몫이었다.
지금 앰벌리와 첼루나 사이에서 어느 쪽이 꾀는 역할인지 전혀 몰랐기에 할 수 있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다만 걱정인 건 그와 황태자비에게 아직 아이가 없다는 사실이었는데, 둘 다 아직 젊으니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스물여섯, 그의 막냇동생 첼루나가 스물한 살이 되는 해 여름.
맏아들을 아껴 마지않던 황제가 돌연 쓰러졌다.
텔레스와 그녀의 약혼자가 국경을 이미 넘은 뒤였다.
원래 황족이 거처를 옮기려면 황제에게 인가를 받아야 한다. 황족이 외국에 나갈 때도 마찬가지며, 역으로 다시 입국할 때도 그랬다.
굳이 그런 절차가 아니더라도 황녀 일행은 이미 황제와 황태자의 끄나풀에게 감시당하고 있으니, 황녀가 외국의 왕궁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녀의 적에겐 보고가 들어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적이 영리하고 집요한 만큼 황녀 본인도 그러했다.
모리안이 동생에게, 그의 동생은 성녀에게 직접 들은 귀한 정보였다.
그 날짜에 맞춰 반드시 귀국해야 한다고 했으니 황녀는 막내를 향한 제 믿음을 실천하기로 했다.
[최근에 아버지께서 쓰러지는 꿈을 꿨습니다. 공주님도 이에 대해 걱정이 많으세요. 그분께도 각별한 분이니까요.]
데아론이 쓴 편지의 내용이었다.
얼핏 보면 데아론의 아버지, 즉 텔로아 후작의 건강을 예지하는 걸로 들렸다. 하지만 곧장 뒤따른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텔로아 후작이 쓰러지는데 왜 첼루나가 걱정한단 말인가.
물론 애인의 아버지가 쓰러지는 게 충분히 걱정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뒤의 내용과 이어 붙이면 찜찜함이 늘어났다.
아버지가 쓰러지는 꿈. 공주는 이에 대해 걱정하고, 쓰러진 쪽은 공주에게도 각별하다.
아버지. 공주의 아버지. 즉, 황제.
데아론 텔로아는 성녀가 꾼 예지몽을 자기가 꾼 것처럼 바꿔 써서 황제의 건강이 나빠지리라는 걸 우리에게 우회적으로 예고 중이다. 텔레스는 그렇게 해석했다.
[참, 저는 내년에 다시 휴가를 내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장기 휴가로요. 날짜는…….]
그러다 데아론은 화제를 바꾸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자신의 휴가 계획을 알렸다. 그 구체적인 날짜를 보고 황녀는 직감했다.
이날에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시는구나.
부친이 지병이 있다는 건 황족 남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황제가 아직 노년보다 중년에 가깝고 평소에 건강한 모습만 보여 종종 잊고 지냈다.
세상에 어떤 병은 그렇다. 소리소문없이 순식간에 찾아와 급성으로 사람을 쳐 쓰러트리는 지독하고 교활한 것들.
일단은 질병의 무서움과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고찰할 때가 아니었다. 텔레스는 모리안이 편지를 받은 직후부터 계획을 짰다.
동생의 전언이 맞는다는 전제 아래, 블레논의 눈을 피해 정해진 날짜에 맞춰 제국 수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성력 중에는 예지력도 있다고 하지.’
회귀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는 텔레스는 진지하게 숙고했다.
회귀나 예지력이나 사실 믿기 힘든 얘기였지만, 이미 4년 전 첼루나가 성력으로 마수들을 물리치는 장면을 목격한 텔레스는 이번에도 이복동생의 신비한 힘을 믿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