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14)

꽃은 추잡하게 그녀를 비웃지 않았고, 그녀를 어미 잡아먹은 계집이라며 욕하지도 않았다.

입도 손도 귀도 없는 식물이 그녀는 참 좋았다. 차라리 그런 것들이 훨씬 아름다웠다.

<제가 원래 살던 마을에 들판이 하나 있었어요. 엄마가 살아 계실 때 같이 자주 갔는데. 친구들이랑 가기도 했고요.>

꽃향기와 어스름이 버무려진 곳에서 어렵게 얻어 낸 밀회를 이어 가다 보면, 연인을 달게 어루만지는 사이사이로 데아론은 다정하게 읊조렸다.

<거기 들꽃이 참 많이 폈어요. 화관을 만들면서 놀던 게 기억나요. 풀을 엮어서 팔찌를 만들기도 하고. 가끔 꿀도 찾아서 먹고, 열매도 따고……. 지금 생각하니까 우리가 너무했네요. 식물한테 죄지은 느낌이에요.>

역시, 인간이 가장 잔인하다니까. 제멋대로 꽃도 꺾고 풀도 뽑고 꿀이랑 열매까지 훔쳐 가고.

데아론은 멋쩍게 반성하며 연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첼루나는 슬쩍 웃었다. 슬프게, 짧게.

<언젠가 당신이랑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당신한테도 보여 주고 싶어.>

전생의 데아론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전생의 첼루나는 한결 슬프게 미소했다.

함께 간다고? 여기를 벗어난다고? 너와 나, 둘이 함께?

불가능했다. 우리는 둘 다 묶인 몸이었으니까. 나는 공주궁에 묶였고 너는 가문에 묶였고, 우리는 달리 갈 곳이 없어.

다시 떠올려도 아릿한 나날이었다. 황량하고 서럽지만, 동시에 서로가 있어 아름답던.

“이거 봐, 데아론.”

첼루나는 화단을 가리키며 연인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지목한 건 개량된 제비꽃 품종이었다. 만개한 자색 꽃잎이 탐스러웠다.

“네 눈이랑 색이 같아.”

첼루나는 포근하게 웃었다. 전생을 잊은 채 두 번째 스무 살을 사는 사랑스러운 청년에게.

“색이 되게 예쁘잖아, 안 그래? 처음부터 예쁘다고 생각했어.”

과거에도, 현재에도, 내 크고도 작은 세상을 통틀어 네 눈처럼 어여쁜 빛을 본 적이 없어. 내 세계에서는 네가 가장 아름다워.

“큼, 감사합니다.”

데아론은 새빨개지며 예바르게 인사했다.

예쁘다는 칭찬을 듣고 새삼스레 쑥스러워하는 연인을 보고 첼루나는 넘치는 애정을 주체하지 못해 햇살처럼 방긋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뻐도 당신만 할까요.”

데아론이 곧이어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첼루나의 미소가 뚝 그쳤다.

이제는 첼루나가 달아오를 차례였다. 그녀는 거의 제 머리칼만큼이나 붉어졌다. 새삼스레 간지러웠다.

“어, 음, 고마워.”

첼루나는 바보처럼 신음했다. 이제는 데아론이 그녀를 놀릴 차례였다.

“지금도.”

그가 씩 웃었다. 마침 그때 봄바람이 불었고, 꽃잎 하나가 날아와 첼루나의 뺨에 붙었다.

“정말, 정말 예뻐요.”

매끈한 분홍빛 살에서 조심스레 꽃잎을 떼어 주며 데아론은 불어온 바람만큼이나 보드랍게 속삭였다.

분홍빛은 다홍빛으로 짙어졌다. 첼루나는 온몸이 뜨거웠다.

두 사람은 가까이 있었다. 간격이 생각보다 좁았다. 다른 무엇도 아닌 꽃향기에 취하는 느낌이었다. 들이켜는 공기도 달았다.

데아론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순간, 첼루나는 휙 뒤돌았다.

“우리 음료수라도 마시러 가자.”

자칫하면 정말 풍기 문란으로 잡혀갈까 봐 첼루나는 후다닥 위기를 모면했다. 데아론은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친절하게 끄덕였다.

“음료수 좋죠.”

사실, 그는 갈증을 느꼈다. 고작 음료수 따위로 해소할 수 없는 갈증이었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손가락 끝까지 뜨겁게 저릿했다. 꿈틀대는 뱀을 한 무리 삼킨 것처럼 아랫배가 후끈하게 요동쳤다.

열일곱 살 풋풋한 시절에도 넘치는 열기를 주체하지 못해 어둠 속에서 마구 삼키고 삼켜졌는데, 이제 한층 혈기 왕성한 스무 살이 되자 인내가 더 어려워졌다.

벌건 대낮에, 주변에 사람이 득시글한 공원에서, 방금 연인을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보다 더한 것도 하고 싶었다.

더 깊게 만지고, 더 짙게 맞물리고, 더 뜨겁게 맞닿고 싶었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그는 애써 본심을 억눌렀다. 서로 사랑하는 데 밤낮을 어찌 가리겠느냐만, 그래도 세상을 살아갈 때는 적정량의 상식이 필요하다.

지금은 욕정의 때가 아니었다. 데아론은 짐승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한편, 첼루나도 속으로 자기 자신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제발, 좀, 자제해, 첼루나, 여기 지금 야외야……!’

2년 동안 못 보고 지냈더니 그새 몸이 미쳐 버린 게 분명했다. 어제로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첼루나는 조용히 진저리쳤다.

아까 데아론이 제 뺨에서 꽃잎을 걷어 낼 때 꽃향기에 취해서, 간격이 생각보다 좁아서, 이성을 잃고 그에게 다가가 혀뿌리까지 빨아 먹을 뻔했다.

‘정신 차려, 바보. 침착해.’

그렇게 각자 음란한 열망과 이에 따른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두 사람은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저기 음료수 파는 곳 있대. 가서 목이라도 축이자.”

“좋아요. 이번에는 제가 사게 해 주세요.”

“네 피 같은 봉급인데 그래도 되겠어? 문자 그대로 목숨 걸고 얻어 낸 돈이잖아.”

첼루나는 데아론의 기사 봉급과 마수 토벌 수당을 떠올리며 안타깝게 말했다. 데아론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쓰라고 있는 게 돈인데요, 뭐.”

그러나 그는 결국 돈을 쓸 기회를 잃었다. 첼루나는 별안간 걸음을 멈추더니 절규했다.

“안 돼……!”

첼루나는 거의 절망에 빠졌다. 데아론이 탄식했다.

“아, 하필 오늘 휴업이네요.”

첼루나는 불이 꺼진 찻집 창문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연인들이 전생에 방문했던 공원의 인기 찻집은 오늘 무슨 이유인지 임시로 문을 닫았다.

“첼루나, 우리 저쪽으로 가 볼까요? 아까 보니까 다른 곳도 있는 것 같은데.”

데아론은 아연실색한 연인을 걱정스레 살피며 조심스레 권했다.

아까 연못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데아론은 다소 과하게 낙심한 첼루나를 보고 잠시 혼란을 느꼈다.

‘정말 목이 마르셨나 보다.’

혼란 끝에 내린 결론까지 아까와 비슷했다. 데아론은 좌절한 연인을 달래 주고 싶은 마음으로 첼루나의 팔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때, 설상가상의 최고조를 장식하듯 하늘에서 비가 떨어졌다.

첼루나는 이제 거의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순식간에 시작된 소나기가 온 공원을 덮쳤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우왕좌왕 지나쳤다.

“첼루나, 이쪽으로.”

데아론은 첼루나의 손을 다급히 잡고 찻집 뒤편으로 이끌었다. 첼루나는 인형처럼 멍하니 뒤따랐다.

두 사람은 넓은 처마 아래 숨었다. 바로 옆쪽에 숲이 펼쳐졌다.

“첼루나, 괜찮아요? 물기가…….”

“말도 안 돼…….”

“네?”

“먹이도 못 주고, 찻집도 문 닫고, 이제는 비까지…….”

첼루나가 음침하게 웅얼댔다. 데아론은 그녀의 옷과 머리에서 물기를 털어 주던 걸 멈추고 그녀를 걱정스레 살폈다.

“이게 뭐야. 오늘은 완벽해야 하는데. 완벽했으면 좋겠는데.”

첼루나는 기어코 눈물마저 글썽였다.

과거에 나름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녀는 고작 비 좀 맞았다고 훌쩍대는 여린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연인이, 그 연인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그녀를 연약하게 만들었다.

사소한 거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고, 별거 아닌 일에 의미가 더해졌다.

사이좋게 물새에게 먹이를 주고 찻집에서 여유롭게 음료를 마시며 담소하다가 화기애애한 산책으로 마무리하는, 그런 동화 같은 데이트를 계획했거늘.

그런데 하필 물새들은 최근에 과식이 잦았고, 찻집은 딱 오늘 휴업했으며, 방금까지 분명 쾌청했던 하늘은 어느새 심술궂은 먹구름에 뒤덮여 우울한 기색만 뿜었다.

“2년 만에 만났는데, 휴가도 별로 길지 않은데, 이게 뭐야. 정말 미안해.”

폐하께서 쪼잔하게 휴가도 쥐꼬리만큼 주셨는데. 그중 귀한 하루의 몇 시간을 이렇게 날려 버렸다는 게 억울했다.

“첼루나, 괜찮아요.”

데아론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손을 뻗어 연인의 뺨을 스쳤다.

따스하고 단단한 손끝이 귓불을 지나 이마로 올라가 머리칼에서 빗방울을 닦아 냈다.

“뭘 이런 일로 그렇게 격하게 사과해요. 당신이 비를 예측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제발 침착하세요.”

“그러게. 왜 이런 걸 예측 못 할까.”

첼루나는 뚱하게 중얼댔다.

마수들이 마탑을 습격할 것도 예측하고 제 아버지가 돌아가실 날짜마저 알고 있는데.

전생에 비가 언제 내렸는지까지 다 기억하고 있으면 얼마나 좋아.

“성력으로 그런 건 안 돼요?”

“응, 안 되더라.”

“어쩔 수 없죠. 마수들 물리친 걸로 충분하잖아요.”

“하긴, 그 정도면 충분하긴 하지.”

가벼운 농담이 오갔다. 그제야 첼루나도 슬슬 웃음을 되찾았다.

역시, 데아론 덕분이었다. 그는 이런 우중충한 날조차 햇빛으로 가득 채웠다.

“이제 좀 침착해졌어요?”

“응. 아까 흥분해서 미안. 그런데 진짜 속상해……. 바깥에서 하는 첫 데이트잖아.”

“다음이 또 있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첼루나.”

오늘 비가 내리면 내일은 해가 날 거야. 오늘 울면 내일 웃으면 되겠지.

오늘의 어둠은 내일의 빛으로 덮고,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회복을 기다리면 돼.

“있다 보면 비는 또 그칠 테니까.”

햇빛을 밀어내고 소나기가 왔듯 그 소나기도 언젠가는 끝날 터였다.

데아론은 먹구름 같던 제 삶에 3년 전 해처럼 찾아왔던 첼루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사실 물새도 없고 찻집도 문을 닫고 하늘은 어두컴컴한 지금도, 그녀와 함께 있어서 마냥 좋았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좋아요.”

데아론은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의 제비꽃색 눈은 열을 머금고 빛났다. 첼루나는 그 열에, 그 빛에 사로잡혔다.

이제는 그의 숨이 그녀의 살에 닿았다. 아찔했다.

우리는 이미 꽃밭을 벗어났는데, 어째서 네게서는 여전히 향기가 풍길까.

아까처럼 취할 것 같았다. 이미 취한 듯했다.

“지금도 이미 완벽하거든.”

“……사실 나도 동의해.”

그가 나지막이 선포하자 그녀는 자그맣게 동의했다. 이후, 시간이 멈췄다.

연인들은 입을 맞췄다. 비는 좋은 핑계였다. 하늘이 잿빛으로 변하는 바람에 더는 밖에 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난데없이 쏟아진 빗물이 야속해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는데, 어느덧 마음이 이토록 훈훈하니, 사람은 참 간사한 존재라고 첼루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하아.”

더는 그 어렴풋한 생각조차 이어 나가기 힘들어졌다. 원래 이런 일에 집중할수록 논리적인 사고 같은 건 전부 멈춰야 하는 법이다. 첼루나는 오감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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