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데아론은 에둘러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차도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우울한 얘기를 꺼내 첼루나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첼루나는 데아론의 최대한 무난한 답변을 듣고 진실을 짐작했다. 이런 점은 전생과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퍽 서글펐다.
“더 생각하지 않아도 돼.”
첼루나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녀가 데아론의 손을 지그시 감쌌다.
“우리 오늘 재밌게 놀고, 기쁜 일만 생각하자.”
“좋아요.”
데아론은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연인을 만난 순간부터 어차피 기쁨의 연속이었다.
사랑의 힘이란 대체 뭔지, 이렇게 눈빛을 섞고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데아론의 형 모리안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데아론은 자신을 향한 첼루나의 지고지순한 눈을 보고 매 순간 사랑을 신뢰했다.
“뭐부터 하실래요?”
“음, 일단 그냥 좀 걸어 다니자.”
날씨가 퍽 좋았다. 수도의 부유층을 위해 도시 한복판에 꾸며 놓은 싱그러운 녹지에는 세련된 산책로가 여기저기 많았다.
두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산책로에 진입했다. 길옆에 배치된 화단에서 청량한 향기가 풍겼다.
“네 형한테서는 연락 없어?”
“수도로 출발하면서 휴가를 받았다고 편지를 쓰긴 했어요. 아마 바로 답신을 쓰셨다면 곧 도착하겠죠. 지금까지는 소식이 없네요.”
“그렇구나.”
별일 없겠지. 첼루나는 모리안 텔로아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를 인간적으로 아껴서가 아니라, 그가 텔레스 황녀의 가장 충실한 조력자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첼루나는 모리안 텔로아를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 후작가 전체에서 그녀가 아끼는 사람은 데아론뿐이었다.
‘자기들이 한 게 물리적인 폭력만큼이나 나쁜 짓이라는 걸 알기나 할까.’
엄마를 잃은 어린 소년을 차디찬 고독에 몰아넣은 후작 내외와 그들의 장남.
남편의 외도에 정신이 나간 부인이야 백번 양보해서 이해한다 쳐도, 피 섞인 아비와 형의 외면은 첼루나가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때리거나 작정하고 굶기거나 대놓고 욕하지 않는다 해서 학대가 아닌 건 아니다.
참 다양한 종류의 폭력에 노출돼 본 첼루나는 새삼스레 가슴이 아팠다. 과거의 까칠했던 자신이, 쓸쓸했던 소년이 지독하게 가여워서.
“그럼 형이랑 꾸준히 편지는 주고받는 거지?”
“네. 자주는 아니지만 지속적으로는 해요.”
다행이다. 첼루나는 냉정하게 안도했다. 그녀는 다음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텔로아 형제의 서신 교환이 필요했다.
그런 전략적인 판단과 별개로, 그녀는 데아론의 마음을 생각했다.
“형이랑 사이는 좀 괜찮아?”
첼루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데아론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정말로 어려운 질문이었다.
“비교하자면 많이 나아졌어요. 이제 형제지간은 몰라도 사제지간은 되는 거니까.”
퍽 씁쓸한 분석이었다. 모리안을 피 섞인 형으로 대하기보단 검을 가르쳐 준 스승으로 여겨야 훨씬 편하다는 게.
“그래도 예전보다는 덜 원망스러워요.”
“예전에 네가 그 사람을 원망하긴 했니?”
첼루나는 허탈하게 되물었다.
데아론이 가족을 원망했다고? 제발 남 탓도 좀 하고 살라고 빌어도 꿈쩍하지 않던 이 착하디착한 아이가.
“왜 안 했겠어요.”
데아론의 미소는 못내 음침했다. 그런 미소조차 오래 버티지 못해 곧 안개처럼 사라졌다.
“이제는 그냥 무덤덤해요. 어차피 처음부터 이해 못 했던 것도 아니고. 하도 오랫동안 못 보고 살았더니 오히려 감정이 무뎌졌나 봐요.”
데아론은 우중충한 낯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다 또다시 슬쩍 웃었다.
“좀 씁쓸하네요. 거리를 둔 만큼 오히려 관계가 편해졌다는 게.”
서글픈 모순이었다. 첼루나는 한숨지었다. 그녀가 괴롭게 중얼댔다.
“미안해. 내가 기쁜 생각만 하자고 해 놓고 계속 우울한 얘기 꺼냈네.”
“괜찮아요. 오히려 당신이 궁금해해 줘서 기뻐요. 다른 곳에서는 어차피 얘기 못 하잖아요.”
데아론의 미소가 한껏 밝아졌다. 그는 첼루나의 관심이 정말로 즐거웠다.
다른 사람이 하면 차가운 추궁처럼 느껴졌지만, 연인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질문은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제가 달리 어디서 가족 얘기를 하겠어요.”
그나마 상대가 첼루나라서 가족이라는 예민한 화제를 대화로 풀어낼 수 있었다. 응어리진 상처를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것보단 나았다.
“감사해요, 첼루나.”
이제 그는 슬픈 기색 없이 웃었다. 설령 비애가 남아 있더라도 연인의 온기에 힘입어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네 삶에 앞으로 감사할 일만 있었으면 좋겠어.”
첼루나는 진지하게 축복했다. 얼핏 들으면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데아론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당신도요.”
그러면서 그녀의 손을 조금 더 가깝게 당길 따름이었다.
산책과 대화는 사이좋게 이어졌다. 별다른 맥락이나 소재 없이도 이야기는 끊임없이 쏟아졌고, 분위기는 언제나처럼 평안했다.
연인들은 행복에 취해 공원을 맴돌았다. 산책로를 한 바퀴 끝까지 돌았을 때쯤 두 사람은 시간을 확인했다.
“배고프지 않아?”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슬슬 점심은 먹어야죠.”
첼루나는 어젯밤 미리 공주궁의 주방장을 구슬려 훌륭한 소풍 음식을 준비했다. 맨몸으로 후다닥 빠져나온 데아론은 머쓱해졌다.
“음식을 따로 챙겨 오신 건가요? 저는 사 먹으면 충분할 줄 알고 아무것도 안 가져왔는데…….”
“괜찮아, 이 정도로 충분해. 나중에 군것질하고 싶어지면 쓰면 되니까 돈은 아껴 둬.”
연인의 변명을 발랄하게 물리치며 첼루나는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았고, 데아론은 그 위에 얌전히 착석했다. 두 사람은 바구니에서 음식을 꺼냈다.
“주방장님은 여전히 솜씨가 좋으시군요.”
“그래, 심지어 나날이 느시는 것 같아.”
“잘 먹겠습니다, 첼루나.”
“뭐, 내가 만든 건 아니지만 맛있게 먹어. 나도 잘 먹을게.”
“주방장님께도 맛있게 먹었다고 전해 주세요.”
두 사람은 진수성찬에 담소를 곁들였다.
만족스러운 소풍을 실컷 즐기고 난 뒤, 첼루나는 자신이 준비한 또 다른 비장의 물건을 꺼냈다.
“데아론, 우리 연못에 갈까?”
빵 조각이 그득 담긴 종이봉투였다. 첼루나가 쾌활하게 제안했다.
공원에는 과장을 보태자면 작은 호수에 견줄 만한 큼직한 연못이 하나 있었다.
그 연못에 사는 물새들에게 음식을 던져 주는 건 공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흔한 유희였다.
“새들 먹이려고 내가 남는 빵도 챙겨 왔어.”
“오오.”
첼루나가 의기양양하게 선포하자 데아론은 눈을 빛냈다.
두 사람은 연못가로 다가갔다. 첼루나는 과거가 떠올라 금세 들떴다. 전생에도 식후에 꼭 물새에게 빵을 먹였던 게 기억이 났다.
“헉.”
연못가에 도착한 첼루나는 좌절했다. 데아론 역시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실망을 갈무리하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쩔 수 없죠.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해요.”
첼루나는 울상이었다. 연못가에 설치된 잔인한 팻말이 무뚝뚝한 글귀로 그녀를 후려쳤다.
[물새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네가 뭔데? 그녀는 저 팻말이 자신을 모독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네가 뭔데 우리 데이트를 방해하냐고?
‘생각해 보니, 여기 가끔 이랬지…….’
물새에게 먹이를 주는 건 방문객의 자유였지만, 때때로 공원 관리자는 물새들이 과도하게 살쪘다는 이유로 그 행위를 금지하곤 했다.
첼루나도 전생에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게 이제야 기억났다.
다만 자신이 데아론과 공원을 방문했던 딱 두 번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기에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왜 하필 오늘이야?!’
오늘은 이번 생에서 데아론과 황궁 밖에서 보내는 첫 데이트였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날이니 모든 게 완벽했으면 했거늘, 하필이면 이런 사소하지만 짜증스러운 변수라니.
“첼루나, 너무 마음 쓰지 마요, 네? 다음에 또 오면 되죠. 우리 다른 거 해요.”
“그래…….”
데아론이 상냥하게 달래자 첼루나는 시무룩하게 끄덕였다.
하긴, 고작 물새한테 밥 한 번 못 주게 됐다고 상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래도, 같이 물새 먹이는 거 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꼭 같이해요. 이번 한 번만 그런 거잖아요. 괜찮아요, 첼루나.”
첼루나는 유달리 의기소침했고, 데아론은 연인을 성심껏 위로했다. 그는 살짝 혼란을 느꼈다.
‘물새를 되게 좋아하는구나.’
데아론이 걱정스레 결론지었다. 첼루나가 속상해하는 걸 보자 본인도 가슴이 미어졌다. 그도 덩달아 시무룩해졌다.
데아론이 어느새 풀 죽은 표정을 짓자 첼루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데아론이 이렇게까지 물새를 좋아했나? 이게 이렇게 슬퍼할 일인가?
“미안해, 데아론.”
“어, 네?”
“다음에는 내가 미리 더 알아보고 올게. 준비가 부족해서 미안해.”
첼루나의 태도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데아론은 얼떨결에 열심히 끄덕였다. 그는 연인의 손을 맞잡고 온화하게 다독였다.
“저한테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당신 말대로 다음에 또 오면 되죠, 뭐.”
데아론은 부드럽게 웃었고, 첼루나는 여전히 우중충한 낯이었다. 데아론의 확신이 깊어졌다.
‘물새를 정말 많이 좋아하는구나.’
연인이 어떤 천진한 오해를 품었는지 꿈에도 모르는 첼루나는 연못을 뚱하게 흘겨보았다.
수면을 유유히 누비는 통통한 물새들이 괜히 얄미웠다. 쳇, 누구 맘대로 저렇게 살쪄서는.
“기껏 빵 조각도 챙겨 왔는데, 아쉽게 됐네요.”
“어쩔 수 없지, 뭐.”
첼루나는 종이봉투를 도로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본인 말마따나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첼루나는 애써 기분을 추스르며 남은 데이트를 최대한 즐기는 데 집중했다.
“우리 저쪽으로 갈까?”
공원에는 산책로와 연못 외에도 정성스레 가꿔진 넓은 화원이 있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꽃밭을 나란히 거닐다 보니 첼루나는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냄새가 좋네.”
“그러게요.”
“보기에도 예쁘고.”
첼루나는 화단 앞에서 몸을 숙이며 명랑하게 재잘댔다.
싱그러운 꽃향기는 그 어떤 인위적인 향수보다도 그녀의 마음에 그윽한 안정감을 불어넣었다.
과거에 꽃은 첼루나에게 소중한 위로였다.
어미를 잃고 아비에게 부정당한 채 공주궁에 갇혀 살던 시절, 그녀는 그나마 후원에 아름답게 흐드러진 화초를 위안 삼았다.
내 몸에는 만민의 조롱과 멸시가 덕지덕지 묻어 온통 악취만 풍기는 듯한데, 너희 무심한 꽃들은 내 고통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고고하게 향기를 풍겨서.
그게 참 밉고, 서러워서.
동시에, 어쩌면 고마웠다. 내 몸과 마음에서 이미 악취가 풍기는 와중에 너희마저 썩은 냄새가 났다면 참 우울했을 테니까.
이 세상에는 정녕 더럽고 어두운 것밖에 없구나, 그렇게 비관하며 살아갔겠지.
아니, 사는 게 아니라 죽어 갔겠지. 하루하루 시들어 가며.
그러나 추악한 인간과 달리 한결같이 반짝반짝한 꽃들이 있어서 첼루나는 하루를 버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