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14)

첼루나는 여전히 데아론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첼루나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전생을 통틀어 지금까지 데아론이 제게 화낸 적은 없으나, 어쩌면 이번이 첫 사례가 될 수도 있겠다고 첼루나는 두렵게 생각했다.

데아론이 낮게 한숨짓자 첼루나는 움찔 떨었다. 데아론은 부드럽게 첼루나의 손을 감쌌다. 첼루나는 빠끔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아까 그렇게 기분이 싸했구나.”

데아론이 음울하게 말했다. 그는 심란한 낯이었으나, 절대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기분이 싸하다니?”

“사실 아까 복도에서 라크문 경과 눈이 마주쳤거든요. 그런데 좀, 저를 싫어하는 눈치였어요.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랐는데 이제 이해가 좀 되네요.”

“그 사람이 너 노려봤어……?”

첼루나는 경악했다. 아니, 그놈이 감히?

첼루나는 앰벌리에게 화르륵 분노했다가 저도 별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닫고 다시 가라앉았다. 그녀는 울상이 되었다.

“미안해, 데아론. 다 내가 그자한테 여지를 줘서 그래.”

“이거 하나만 대답해 줘요. 그 사람한테 흔들린 적 있어요?”

“아니! 아니, 절대. 이 상황에 이런 말이 좀 뻔뻔하게 들리겠지만, 나한테는 너뿐이야.”

“그 사람 마음을 이용하려고 연기했을 뿐이지, 실제로 그 사람을 좋아한 적은 없다는 뜻이네요.”

“응…….”

“그럼 됐어요. 다행이에요, 정말로.”

데아론은 진심으로 안도하며 첼루나를 꽉 껴안았다. 첼루나는 당황했다.

데아론을 밀어내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감사해요. 당신이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요. 적어도 저를 향한 죄책감 때문에 그러지는 마세요.”

“하지만…….”

“이해해요, 공주님. 이 상황에 당신이 가진 모든 패를 다 쓸 수밖에 없다는 걸.”

데아론이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첼루나의 머리에 얼굴을 묻은 채 자신의 시무룩한 눈빛을 숨겼다.

사실 꽤 상처받았지만 연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음 이용한 것에 대해 그 사람한테 미안해하는 건 몰라도, 저한테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이런 폭로를 듣고 어찌 심경이 편안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진정으로 연인을 탓하는 마음은 없었다.

데아론이 보기에도 현재 정세는 황녀 측에게 끔찍하게 불리했다.

바로 이듬해 황제가 쓰러질 거라는 사실을 알 길이 없는 그가 보기에, 사실상 황태자가 승리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황태자가 감시 목적으로 보낸 기사의 마음을 역이용해 황태자 곁에 첩자를 심어 놓다니, 데아론은 첼루나의 대범함에 객관적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저지르고도 죄책감 때문에 힘들어했을 게 뻔히 보이는 연인을 굳이 단죄하고 싶지 않았다.

데아론은 자신의 상처를 한없는 아량으로 덮었다.

“너는 너무 착해.”

첼루나는 탄식했다. 그 다정함 때문에 그를 사랑하긴 했지만.

“칭찬으로 들을게요.”

데아론의 눈가에 다시 웃음이 깃들었다. 그는 드디어 고개를 들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보랏빛 눈은 아직 살짝 우울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자상했다.

“듣기 나름이지.”

첼루나가 중얼댔다. 그녀는 여전히 연인을 보는 게 괴로워 금세 시선을 슬쩍 내렸다.

“솔직하게 바로 말해 줘서 감사해요. 나중에 다른 사람 통해 와전된 형태로 들었으면 그땐 정말 안 괜찮았을지도 몰라요.”

만약 앰벌리의 구애와 첼루나의 유도가 은근히 왜곡되어 두 사람이 정인 사이라는 소문이 돌았다면, 그 소문이 뒤늦게 데아론의 귀에 들어갔다면, 그는 무너졌으리라.

“그럴까 봐 바로 말한 거야. 그런 식으로 오해 키우기는 싫었어.”

첼루나는 슬프게 말했다.

전생에 그들은 참 불행하게 연애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서로 완벽하게 떳떳했다. 둘 다 서로에게 처절할 만큼 솔직했다.

방해물이 이미 너무 많은 위태로운 사랑이라 조금의 오해, 약간의 비밀, 단 하나의 거짓말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었다.

이번 생은 전생보다 조금 수월했지만, 여전히 첼루나는 조심스러웠다. 어떤 이유로도 데아론과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첼루나는 이실직고를 택했다.

“네가 싫으면 이제라도 그칠게. 거래는 언제든 깰 수 있어.”

“안 돼요, 공주님.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당신이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데아론은 씁쓸하게 정곡을 찔렀다. 첼루나는 반박할 길이 없어 머뭇거렸다. 데아론은 설득을 이어 갔다.

“이미 그 사람이 당신께 황태자에 대한 정보를 넘겼다면서요. 그래 놓고 이제 와서 그 사람을 내친다? 너무 위험해요.”

데아론의 지적은 타당했다. 첼루나도 이미 예측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녀에겐 데아론이 가장 중요했기에, 만약 그가 죽어도 싫다고 하면 당장 다른 남자와 거래고 뭐고 전부 끊어 낼 예정이었다.

앰벌리는 이미 공주를 위해 첩자 노릇을 하며 위험을 감수했다. 그 대가로 공주는 그에게 조금 더 상냥하게 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공주가 그에게 다시 선을 긋는다? 자기는 이미 정보란 정보는 전부 받아먹었으면서, 단물은 다 빨아먹었으면서?

혹 앰벌리가 원한을 품더라도 첼루나가 할 말은 없으리라.

앰벌리는 언제든지 황태자에게 달려가 첼루나가 그에게 첩자 일을 시켰다고 고발할 수 있었다.

만약 그런다면 첩자였던 앰벌리도 위험에 처하겠지만, 그는 빠져나올 여지가 있었다. 어쨌든 그는 원래 황태자의 사람이었으니까.

“아예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젠 너무 늦었어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끝까지 밀고 나가세요.”

“아예 시작하지 말 걸 그랬나.”

“후회도 너무 늦었죠, 뭐.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데아론의 짐짓 가벼운 대답에 첼루나는 무심코 흠칫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라. 이미 한 번 회귀한 그녀로서는 듣기 꽤 묘한 말이었다.

“그리고 설령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당신은 똑같이 행동할 것 같은데, 아닌가요?”

데아론은 부드럽게 되물었다. 첼루나가 그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듯 그도 이제 웬만큼 그녀를 파악했다.

그가 사랑하는 공주님은 마냥 순하고 선하기만 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눈앞에 진흙탕이 있다면 진흙이 묻지 않고 지나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대신 주저 없이 오물에 발을 담글 사람이었다. 진흙탕 너머에 있는 목표물에 닿기 위해.

데아론은 첼루나의 그 어두운 면까지 전부 사랑했다.

제 연인이 상처받을 걸 알고도 다른 남자의 마음을 이용해 정보를 빼내는 독한 모습마저 사랑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 때문에 가슴이 아픈 건 별개의 문제였다. 슬픔은 사랑의 일부일 뿐, 마음 자체를 식게 하지는 않았다.

“……그건 아무도 모르지. 그런 건 막상 가 봐야 아는 거야.”

첼루나는 나직하게 대꾸했다.

시간을 되돌려도 똑같이 행동할 거라고? 그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는 있지만, 막상 판이 깔릴 때까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당장 첼루나만 해도 전생과 많은 것이 달라진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었다. 어디 말할 데는 없었지만.

“어쨌든 고마워. 정말 고마워. 받아 주고 이해해 줘서.”

첼루나는 애타게 속삭였다. 데아론은 빙긋 웃었다. 그의 미소에는 아직 슬픔이 묻어 있었다.

“딱 하나만 약속해 줘요, 공주님.”

“뭐든지.”

“이용이든 연기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셔도 돼요. 그런데 마음까지 주는 건 절대 안 돼요.”

이것만큼은 데아론도 양보할 수 없었다. 첼루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줄 마음도 없어. 이미 다 너한테 줬거든.”

첼루나는 단숨에 답했다. 데아론의 미소가 훨씬 덜 슬퍼졌다.

“앞으로도 잘 간직할게요.”

이후, 그들은 입맞춤으로 서약에 도장을 찍었다. 커피 향이 나는 키스였다.

데이트는 이틀 연속 잡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데아론이 집에 돌아간 다음 날, 연인들은 황궁 밖에서 만났다.

“정말 그냥 공원 산책 같은 걸로 되겠어요?”

“왜, 나는 너랑 같이 있기만 해도 좋은데.”

첼루나가 처음 시내 공원에서 나들이를 제안했을 때 데아론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공주궁의 아름다운 후원을 매일 거닐 수 있는 그녀가 황궁 바깥에서까지 고작 산책으로 만족하는 건 조금 아쉽지 않나 싶었다.

“매일 똑같은 곳에서만 만나니까 답답해서 그래. 기분 전환도 하고 좋잖아.”

첼루나는 싱긋 웃었다.

자신이 전생에 똑같은 이유로 데아론과 함께 외출한 적 있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자신만 기억하는 과거는 비밀로 묻어 두었다.

전생에 첼루나는 공주궁에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했다.

그녀가 성녀라는 이름도 없고 성질만 더럽기로 소문난 천덕꾸러기라서 참 외롭고 무력하던 때였다.

그런 그녀를 가엽게 여겨 데아론이 먼저 외출을 제안했고, 첼루나는 어렵게 허락을 얻어 냈다.

그렇게 해서 시내 공원에서 데이트한 게 딱 두 번이었다.

이번 생에는 지난 생과 달리 황궁에서도 편안하고 호화롭게 연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첼루나는 추억을 좇았다.

이번 생에는 그녀가 먼저 공원 나들이를 제안했다.

첼루나는 이미 정해 둔 코스가 있었다. 전생을 기반으로 구성한 경로였다.

데아론에게는 시녀를 통해 사전 조사를 했다고 둘러댔다.

우리가 전생에 이미 함께 가 본 곳이라 이렇게 세세하게 공원 지리를 꿰뚫고 있다고 고백할 수는 없으니.

두 사람은 공원 입구에서 만났다. 데아론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고, 첼루나는 황궁 마차에서 내렸다.

첼루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데아론을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띠며 빠르게 다가갔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뛰고 싶었는데, 제국의 치렁치렁한 여성복은 그녀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데아론!”

“보고 싶었어요.”

“어제도 봤잖아?”

“그래도.”

눈빛이 닿자마자 다짜고짜 그리움부터 고백하는 연인이 마음에 겨워 첼루나는 씩 웃었다. 그녀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나도 그래.”

아직 벌건 대낮이고 야외 공간이라 진하게 키스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들은 가까스로 품위를 지켰다.

“어제는 잘 쉬었어?”

“네, 공주님.”

“……후작 부인도 만났겠네? 네 아버지는 어제 도착하자마자 인사드렸다고 했고.”

“네, 셋이 같이 식사했습니다.”

데아론은 씁쓸하게 말했다.

후작과 후작 부인, 후작의 아들 데아론. 장남 모리안은 아직 외국에 나가 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셋만 저녁을 먹었다. 숨 막히는 순간이었다.

“어때. 좀 나아진 것 같아?”

첼루나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녀는 데아론을 향한 후작 부인의 혐오를 익히 알았다.

그리고 전생에, 데아론이 마수 토벌을 위해 2년간 집을 비운 사이에 그 혐오가 전혀 식지 않았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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