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14)

어차피 데아론은 옛날처럼 위축돼 있지 않았다.

열여덟 살에 서부로 처음 떠날 때만 해도 그는 사교계의 경멸이 익숙했고, 그에게 친절한 사람은 첼루나뿐이었다.

이제 그는 서부의 기사들 사이에서 이름이 드높았다.

여태 그가 처치한 마수의 숫자가 세 자릿수, 그가 구한 동료의 목숨 역시 세 자릿수였다.

본디 당당하고 쾌활했으나 어머니를 잃고 소심해졌던 소년은 어느덧 자존감을 회복해 활기를 되찾았다.

사실 이제 더는 소년도 아니었다. 청년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는 이전에 수도 땅을 밟았을 때보다 훨씬 늠름했다.

텔로아 후작은 약 2년 만에 둘째를 보고 내심 놀랐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앳된 느낌이 확 났는데, 이제 그는 완연한 성인 남자에 가까웠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데아론은 후작 저에 들르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곧장 공주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어차피 가족이라 부르기도 좀 민망한 관계 아닌가. 데아론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데아론은 엄마를 잃어 고아가 될 뻔한 자신을 거두어 먹여 주고 재워 준 후작에게 물질적인 감사를 느꼈다.

또한, 자기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면서도 결국 죽이지는 않은 후작 부인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했다.

남편의 외도로 태어난 아이가 미운 건 당연지사인데, 그래도 내쫓거나 때리거나 굶기지는 않았으니 그 정도면 감지덕지로 여겼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데아론은 그들에게 보은의 의무감을 느꼈을 뿐, 애정은 없었다.

“……그래, 오랜만이다.”

후작은 탁한 목소리를 쥐어짰다. 아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자그맣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까지 컸나. 게다가 데아론은 크면 클수록 제 모친을 더욱 닮았다.

후작의 시선이 데아론의 얼굴을 낱낱이 훑었다. 한때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어느 신비한 여인의 흔적을 찾아.

‘불편해.’

데아론은 이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2년 만에 수도에 돌아왔는데 집안 어른께 인사조차 드리지 않는 후레자식으로 소문나기 싫어서 일단 이곳에 오긴 왔다.

그러나 여전히 이 화려한 저택은 그에게 삭막한 곳이었다.

‘왜 저렇게 보시지?’

데아론은 후작의 투시하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 더욱 거북해졌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는 습관적으로 걱정했다.

지난 2년간 많이 당당해진 그지만, 어떤 상처는 생각보다 오래간다. 아버지를 마주하자 과거의 무력하고 소심한 소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많이 컸구나.”

후작이 말했다. 데아론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런데 좀 마른 것 같아.”

아, 뭐야. 여기에는 또 뭐라고 대답해? 시험이야, 뭐야? 데아론의 현기증이 짙어졌다. 후작은 아들의 속내를 전혀 모른 채 질문을 덧붙였다.

“서부에 먹을 건 충분했니?”

“네, 아버지.”

“다행이구나.”

침묵이 뒤따랐다. 데아론은 숨이 막혔다.

그는 이제 자신이 뭐라도 여쭈어야 할 듯한 압박감에 짓눌렸다. 그러나 긴장이 극에 달한 지금, 생각나는 것도 궁금한 것도 없었다.

“이제 방에 가서 쉬도록 하렴.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뜻밖의 구원은 후작에게서 왔다. 대화의 지속을 강요하지 않는 아버지께 데아론은 진정 감사했다. 그는 조심스레 아뢰었다.

“아버지, 실은 바로 황궁에 가야 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황궁에는 왜?”

“공주님께서 부르셔서요. 이미 서신으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내용은 사실상 일방적 통보였다. 그래도 전혀 문제 될 건 없었다.

애초에 황족이 오라고 명했는데 일개 후작이 이에 대한 허락을 내릴 것도 없었다.

“여전히 공주님과 교제 중이냐?”

하지만 후작의 음성은 의외로 엄격했다. 그 싸늘함에 데아론은 본능적으로 반항심을 느꼈다.

“네.”

그는 뚝뚝한 단음절로 대답했다. 후작은 낮게 탄식했다.

“데아론, 이 시국에 우리 집안이 황족과 가까이 지내는 걸 뽐내 봤자 득 될 게 하나도 없다.”

“뽐내다뇨. 저는 과시욕 때문에 공주님과 만나는 게 아닙니다.”

이제는 데아론도 차가웠다. 후작은 놀라서 데아론을 바라보았다.

한창 사춘기가 왔을 10대에도 온순하고 얌전하던 아들이다. 그런 그가 스무 살이 된 지금 제법 반항적이었다.

“……그래, 그건 나도 알아. 그저 조심하라는 뜻이야.”

후작은 현명하게 후퇴했다. 데아론은 정중하지만 냉담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새겨듣겠습니다, 아버지.”

후작이, 소위 말하는 자신의 가족이 첼루나와의 관계를 걸고넘어지는 것을 데아론은 견딜 수 없었다. 감히?

‘아버지가 무슨 자격으로.’

당신이 내게 들이민 불행을 첼루나 공주님이 모조리 온정으로 상쇄해 주었다.

나뿐만 아니라 당신도 그분께 평생 빚졌다.

그분의 상냥함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있는 힘껏 삐뚤어져 당신께 원망과 악의를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니.

사실 데아론은 다른 누구의 상냥함 없이도 충분히 원망과 악의를 물리칠 수 있는 강인한 자였지만, 첼루나의 온기는 확실히 그에게 힘이 되었다.

그런 그분과의 관계에 대해 아버지가 훈수를 둔다고? 우습지도 않았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아버지와 아들의 재회는 그렇게 끝났다. 매우 짧고 위태롭게.

데아론은 곧장 옷을 갈아입고 마구간에 내려가 새 말에 올랐다.

후작의 말마따나 먼 길을 왔기에 피곤할 만도 했건만, 연인을 그리는 마음이 피로보다 훨씬 강했다.

“이랴!”

데아론은 말을 몰았다. 황궁에 가까워지는 순간마다 설렘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데아론은 서둘러 황궁에 도착했다. 그는 말에서 내려 문을 통과했다. 공주가 보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귀한 손님을 공주궁으로 안내했다.

첼루나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그녀는 발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데아론!”

“공주님!”

한걸음에 다가오는 애인을 첼루나는 문자 그대로 양팔 벌려 맞이했다.

첼루나는 함박웃음 짓는 모습 그대로 데아론의 넓은 품에 폭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첼루나.”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선연한 온기에 첼루나는 눈을 감았다.

“나도 보고 싶었어, 데아론.”

시종은 눈치껏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궁인들을 전부 물린 뒤였고,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들은 둘만 남았다.

첼루나는 데아론을 살짝 밀어내 그의 달라진 모습을 살폈다. 어깨는 더 넓어지고 목은 더 굵어졌으며 손은 더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첼루나는 슬슬 소년기에서 벗어나 전생에 자신이 이미 한 번 목격한 어엿한 청년으로 자라난 그를 감격스럽게 바라보았다.

‘닮았어.’

첼루나는 무심코 생각했다가 속으로 실소했다. 당연히 닮았겠지, 동일인인데.

다만 회귀 후에 확 어려진 데아론의 모습이 오랫동안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던 그녀는 이제 점점 전생의 가장 최신 기억과 닮아 가는 연인의 모습에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야 좀 실감이 나네. 그때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전생의 가장 최신 기억. 많은 것이 달라지고 뒤집혔던 스물세 살의 그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이 전생에 마지막으로 봤던 데아론의 모습이 떠오르자 첼루나는 다시 속이 차게 식었다. 그녀는 서둘러 악몽을 떨쳐 냈다.

“진부한 말로 들리시겠지만, 못 본 사이에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데아론은 눈매를 곱게 휘며 다정하게 말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진부하다 못해 지겨운 빈말로 치부했겠으나, 지금 첼루나는 그저 웃었다.

“아니야, 하나도 안 진부해. 오히려 기분 좋아.”

설령 자신이 오늘 누더기를 걸치고 왔더라도 저를 아름답다고 칭했을 연인의 진심을 알기에, 그녀의 웃음에는 거짓 한 톨 없었다.

데아론은 첼루나의 뺨을 싸쥐고 입을 맞췄다. 첼루나는 약속한 것처럼 입술을 벌렸고, 곧 몸이 맞닿았다.

둘은 오랫동안 키스했다. 마침내 각자 숨이 가빠졌을 때쯤, 두 사람은 응접실 소파에 무너지듯 앉아 서로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돌아온 걸 환영해, 데아론.”

첼루나가 속삭였다. 데아론은 생긋 웃었다.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님.”

이후, 숨결이 다시 섞였다. 서로 호흡만으로도 취하게 할 만큼 달고 향긋한 순간이었다. 허리를 끌어안는 동작이 애틋했다.

암투와 비밀, 마수 토벌 같은 건 조금도 상관없이 각자 평온하게 휴식하는 순간이었다.

재회의 모든 순간이 육체적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첼루나와 데아론은 궁인들이 가져온 다과를 즐기며 그간 편지로는 나누지 못했던 여러 근황을 공유했다.

“복도 끝에서 경비를 서는 금발 기사가 앰벌리 라크문 경이죠? 원래 황태자 전하 기사였던.”

“응, 맞아. 왜?”

“아니, 그냥…….”

데아론은 주춤했다.

아까 복도를 지나며 데아론은 우연히 앰벌리와 눈이 마주쳤고, 습관적으로 고개를 꾸벅여 인사했다. 앰벌리도 마주 묵례했다.

그런데 그때 느낌이, 영…….

“……그냥, 궁금해서요.”

어쩐지 데아론은 그 앰벌리라는 기사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훨씬 개인적인 모종의 이유로.

‘그런데 대체 왜?’

당장 떠오르는 답변이 없었다. 그는 일단 얼버무리기를 택했다. 충분한 근거 없이 남의 감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싶지 않았다.

“그, 저기, 데아론. 나 그 사람에 대해 고백할 게 있어. 앰벌리 라크문 경에 대해서.”

첼루나는 잽싸게 실토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괴로워 벌써 속이 화끈거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미루는 것보다는 나았다.

“뭔데요?”

“그게, 음, 원래 그 사람이 황태자 부하잖아.”

“그렇죠. 그래서 사실 처음에 듣고 걱정했어요. 말이 호위지 사실상…….”

데아론은 괜히 조심스러워 말꼬리를 흐렸다.

편지는 누가 언제 어디서 가로챌지 모르기에 표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작년에 공주의 호위 교체 소식을 듣고 경악했지만, 솔직한 마음을 드러낼 수 없어 내내 염려를 혼자 삭여야 했다.

“사실상 감시지.”

첼루나는 저음으로 상대방의 말을 대신 끝맺었다. 데아론은 심각한 낯으로 짧게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역이용하고 있으니까.”

“그게 무슨……?”

“앰벌리 라크문 그 사람, 날 좋아해. 날 좋아한다고 사실상 자기 입으로 말했어. 그래서 내가 그 사람한테 제안했어. 황태자의 명을 듣는 척하면서 정보를 내게 전해 주면 나는 그 사람한테 기회를 주겠다고. 내 마음에 들 기회.”

첼루나는 빠르게 고해했다. 도저히 데아론의 눈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데아론은 얼어붙어 침묵했다.

“정말 미안해, 데아론. 널 생각하면 절대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알아. 그런데 그때는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이제라도 네가 싫다고 하면 그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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