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14)

다른 남자의 마음을 이용하면서까지 싸움에 임하고 싶지 않았는데. 데아론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는 먼지만큼의 여지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첼루나는 앞으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황태자의 기사를 아군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러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그의 연정을 이용하는 거였다.

‘……저게 정말 연정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게 연정인지 집착인지 호기심인지 뭔지, 애초에 그것들을 어떻게 세세하게 구분할 수 있는지, 첼루나는 사실 몰랐다.

“어서 대답해 봐, 라크문 경.”

첼루나는 부드럽게 다그쳤다. 그러면서 일부러 상체를 앞으로 숙여 거리를 좁혔다.

앰벌리는 순간 움찔 떨었다. 공주의 살에서 옅은 향기가 훅 끼친 탓이었다.

“아니면 생각이 필요한 문제인가?”

첼루나는 짐짓 새침하게 덧붙였다. 그러면서 앰벌리의 수중에서 은근슬쩍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자 앰벌리는 오히려 더 세게 붙들었다.

“그럴 리가요. 제 마음은 이미 확실합니다.”

그가 나지막이 고백했다.

여자를 위해 주군을 팔아먹는 놈이라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충정도 연정도 결국 다 본인의 선택 아닌가. 앰벌리는 당당했다.

“하지만 제가 대체 뭘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공주님의 마음에는 어쩔 수 없는 의심이 남을 테고, 황태자 전하까지도 저를 의심하기 시작하겠죠. 그러면 공주님도 덩달아 위험해지십니다.”

“잘 아네. 그러니까 그대가 더욱 힘써 줘야지. 이중 첩자라고 들어는 봤어?”

첼루나가 나긋하게 말했다. 앰벌리에게 잡힌 손이 얼얼했지만, 그녀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내 오빠가 시키는 대로 해, 라크문 경. 그분께 변함없는 충정을 보여 줘. 그리고 나한테는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을 말해. 정말로 그대가 내 마음에 들 기회를 바란다면 말이야.”

“저를 시험하시는군요.”

“맞아. 그대 말대로 나는 아직 그대를 완전히 믿지 않아. 내가 시작부터 아무나 믿는 멍청이였다면 그대의 여자 보는 눈이 형편없이 낮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그대에게 아직 마음을 연 게 아니야. 그대가 나를 설득해야 해.”

사실 앰벌리에겐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첼루나는 그가 뭘 해도 그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오직 데아론뿐이었다.

‘미안해, 데안. 미안해, 앰벌리 라크문 너도.’

첼루나는 자신이 쓰레기가 된 느낌이었다. 연인을 상대로는 바람피우고, 다른 남자의 마음을 이용하고.

하지만 원래 사람들은 싸움터에서 이보다 훨씬 비도덕적인 일도 일상적으로 벌이지 않나.

블레논과 텔레스만 봐도 전생에 황제가 되기 위해 각자 너무 많은 사람을 제거하고 배신하고 이용했다.

이제는 자신도 똑같이 더럽혀졌다. 첼루나는 속으로 자조했다.

전생에 그녀의 죄라곤 성격이 좀 더러운 것밖에 없었지만, 이번 생에 그녀의 죄목은 훨씬 다채로웠다.

“최선을 다해 설득하겠습니다. 설령 공주님은 설득당하지 않더라도요.”

앰벌리는 약속했다. 첼루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거짓되었지만 그럼에도 아름답게 웃었다.

“그래, 라크문 경. 기대할게.”

정말 네가 나를 진심으로 연모한다면, 어디 한번 증명해 봐. 네가 내 오빠가 아닌 나의 충견이 되고자 한다는 걸.

“기대를 충족해 드리겠습니다.”

앰벌리가 속삭였다. 그는 첼루나의 손등에 다시금 입을 맞췄다. 이번에도 첼루나는 뿌리치고 싶다고 생각했으며, 이번에도 그 충동을 꾹 참았다.

전생에는 황태자의 기사와 황녀가 공주의 안전을 두고 뒷거래했듯, 이번에는 공주 본인과 직접 거래가 이루어졌다.

* * *

그러고도 또 시간이 흘렀다.

인간의 역사는 참 이상했다. 때로는 무척 거대하고 중요한 일들이 고작 며칠 사이에 휘몰아치고, 또 때로는 몇 년간 죽은 듯이 잠잠하다.

굳이 세세하게 기록되지 않은 단조로운 세월에도 사람들의 일상은 이어졌다. 자고 먹고 일하고 친구를 만나고, 연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악몽을 꾼다.

첼루나의 1년도 그렇게 지나갔다. 봄에서 여름으로, 다시 겨울로, 그러다 가을을 거쳐 봄으로 돌아오기까지 여러 시시콜콜한 일화가 나날을 이루었다.

그리고 스무 살의 어느 봄날, 데아론이 수도로 돌아왔다.

영구적인 복귀는 아니었다. 그간 그의 출중한 공로를 인정하여 황제가 마지못해 승인한 짧은 휴가였다.

끈질긴 꽃샘추위에도 불구하고 첼루나는 며칠 전부터 난로를 삼킨 듯 훈훈했다.

작년 겨울에 헤어진 뒤로 보지 못했던 연인과의 만남이 그녀를 작은 태양처럼 지켜 주었다.

공주궁 사람들은 첼루나의 기분을 눈치챘다. 애초에 그 정도 열렬한 기쁨과 기대감은 주변에도 쉽게 전염되는 법이다.

공주님과 데아론 텔로아 경의 연애를 예쁘게 보는 대부분 공주궁 사람들은 그 전염성을 쉽게 받아들였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데아론 경이 돌아오시는 게 많이 기쁘신가 봅니다.”

거의 매일 첼루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앰벌리였다.

인간의 적응력이 아무리 뛰어나다지만, 첼루나는 벌써 약 1년째인 지금도 앰벌리가 자신을 호위하는 게 어색했다.

“그럼 당연히 기쁘지. 마지막으로 만난 지 무려 1년이 넘었는데.”

첼루나는 최대한 담백하게 대답했다. 앰벌리 앞에서 너무 대놓고 즐거워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러나 언젠가 그녀가 제 오라비에게 말했듯 사람 마음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앰벌리가 불쑥 물었다. 이따금 그가 던지는 기습 질문이었다.

앰벌리가 공주의 시험에 응한 지 약 1년째, 그는 황태자 앞에서는 원래 주인을 따르는 척하면서 기실 황태자의 크고 작은 비밀을 공주에게 속닥였다.

그때마다 첼루나는 정말로 말 잘 듣는 개를 다루듯 앰벌리를 따스하게 칭찬했으나 절대 그에게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다.

또한, 서부에 있는 데아론 텔로아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앰벌리는 그 모든 굴욕을 잠잠히 견뎠다. 애정의 경중에 따라 현저히 불평등한 이 관계가 전혀 경악스럽지 않았다.

원래 황족들의 세계는 잔인하고 귀족들의 세계는 더럽다. 평민 고아로 시작해 여기까지 실력 하나로 꾸역꾸역 올라온 그가 오래전 내린 결론이었다.

황제가 되기 위해 피 섞인 이복 남매를 해치는 데 주저하지 않는 황태자와 황녀, 그리고 그 개싸움에 참여한 막내 공주.

그중 하나에게 마음을 줘 버린 순간 이런 종류의 수치심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앰벌리는 불평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다만, 갈증은 여전했다. 그리고 때로는 유독 지독했다.

데아론 텔로아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부드럽게 녹는 공주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을 떠올리며 달콤하게 웃을 때, 공주의 얼굴은 전혀 잔인한 황족이나 더러운 귀족을 닮지 않았다.

그때만큼은 그녀는 그저 한 사람, 한 여자, 한 연인이었다.

앰벌리 앞에서 첼루나는 그저 저를 좋아하는 남자의 마음마저 서슴없이 이용할 수 있는 오만하고 잔혹한 황족이거늘.

앰벌리는 공주의 그런 모습을 사랑했지만, 그녀가 데아론 텔로아에게만 보이는 그 다른 모습도 갈망했다.

“그 질문에 답하는 건 그대에게 별로 친절하지 않겠지?”

첼루나는 산뜻하게 말을 돌렸다. 여태 늘 그랬던 대로.

앰벌리는 질투와 절망에 너무 깊게 꿰뚫리지 않으려 애쓰며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첼루나가 그의 턱을 부드럽게 당기자 곧 다시 시선을 올려야 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 라크문 경. 나는 그저 그대를 공평하게 대하려고 하는 거니까. 그대도 나한테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잖아. 그러니 나도 몇 가지 비밀은 가지려고 해.”

앰벌리는 뜨끔했으나 내색하지 않았고, 첼루나도 딱히 추궁하려던 건 아니었기에 더는 캐묻지 않았다.

공주의 충견이 된 앰벌리는 황태자의 크고 작은 비밀을 그녀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전부 알리는 건 아니었다.

앰벌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순정남이 아니었다.

전생에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버렸지만, 앰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산하는 자였다.

그는 공주를 따라 황태자를 배신했으나 언제든지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하고자 했다.

하여 몇 가지 정말로 치명적인 정보는 여전히 첼루나에겐 비밀이었다.

첼루나는 그 사실을 짐작했고, 원망하지 않았다. 믿었던 적 없으니 배신감도 없었으며, 좋아한 적 없기에 섭섭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도 그를 이용하는 처지였다. 내 주제에 어찌 감히 그를 원망하랴.

원래 정쟁의 세계란 이토록 추악하니, 첼루나는 감히 슬퍼하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지긋지긋해.’

그래도 지치는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데아론이 필요했다.

이 세상에서 그녀가 한 톨의 정치적 계산도 없이 솔직하게 대하는 사람은 데아론 하나뿐이었고, 그 역시 그녀를 정략적으로 대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애랑 이런 사람이랑 비교될 리가 없잖아.’

첼루나는 앰벌리를 보며 착잡하게 생각했다.

영리하고 계산적인 능구렁이 같은 남자.

너 또한 생존을 위해 영악해졌을 뿐이니 절대 탓할 마음은 없다만, 그렇다고 너를 좋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내일은 호위할 필요 없어, 라크문 경.”

첼루나는 천사처럼 웃으며 잔인하게 말했다. 내일은 데아론이 수도에 도착하는 날이었고, 즉 연인들의 데이트 날짜였다.

“내일모레도 마찬가지야. 당분간 호위는 필요 없을 것 같아.”

데아론의 휴가 내내 붙어 다닐 예정이니까. 실력 좋은 기사가 자신의 연인이니,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호위는 필요 없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앰벌리에게 달리 선택지는 없었다. 그저 고개 숙여 복종을 약속할 뿐.

공식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새 주인을 섬기게 된 그는 윗사람에게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첼루나는 찜찜한 마음을 뒤로하고 앰벌리를 등졌다. 지금은 오직 연인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기다림으로 가득한 하루는 너무 길었다. 동시에, 그 기다림조차 달았다.

* * *

서부에서 숱한 마수를 토벌하고 수도로 귀환한 후작의 둘째 아들을 위해 화려한 환영회는 없었다.

그건 데아론이 더는 사생아라는 이유로 무시당해서가 아니라, 황태자 책봉 이후 텔로아 후작가 전체가 숨죽여 지내 왔기 때문이었다.

황녀를 지지하는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황녀의 패배가 확정된 듯한 시국에 황녀의 예비 시동생이 수도에 돌아왔다고 해서 화려한 축하연을 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수도에 입성한 데아론을 맞이하는 시끌벅적한 인파는 없었다. 그러나 데아론은 상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번거로운 일이 생기지 않아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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