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14)

앰벌리는 겨우내 데아론 텔로아가 있는 서부로 내려가 감감무소식이었던 공주를 떠올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끔찍한 질투의 불꽃이 그의 내면을 새카맣게 집어삼켰다.

“더는 숨길 생각도 없나 보네.”

뒤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앰벌리는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의 주군을 발견하고 고개를 깍듯이 꾸벅였다.

블레논은 깊은 눈빛으로 기사를 관찰했다.

“저 애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블레논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앰벌리는 침묵했다.

눈치 빠른 황태자가 영영 알아채지 못하리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다. 다만, 기분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황족을 상대로.”

앰벌리는 나직하게 사죄했다. 블레논은 옅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사과하지 마. 그대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말한 게 아니야.”

그저 정말로 신기할 뿐이었다.

무릇 피 섞인 남매란 상대방이 다른 사람에게 이런 식의 호감을 받아 낼 수 있을 거라고 전혀 상상도 못 하는 관계니까.

게다가 블레논은 원체 동생들을 비하하는 게 익숙한 오라비였다.

누군가의 눈에는 제 모자란 핏줄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게 순수하게 놀라웠다.

‘뭐, 걔가 객관적으로 예쁘기는 하지만.’

블레논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그건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며 잘생겼네, 하고 건조하게 평가하는 것과 같았다.

애초에 외모는 황족 남매들에게 크게 감흥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대가 첼루나에게 마음이 있다면 나로서는 기쁘지. 그대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늘었으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라크문 경. 내 동생이랑 잘되고 싶어?”

블레논은 다정하게 물었다. 앰벌리는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뱀 같은 속삭임이었다.

* * *

남은 계절은 별다른 사건 없이 흘러갔다.

정식으로 차기 황제가 된 블레논은 전에 없던 여러 업무를 익히느라 바빴고, 첼루나는 교회의 구호 사업을 도우며 조용히 지냈다.

첼루나는 또한 데아론과 꼬박꼬박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매번 새로 확인할 때마다 안도로 가슴이 울렁였다.

그렇게 당분간 겉으로는 평화로웠다.

그러나 모든 거짓이 으레 그렇듯, 가짜 평화의 수명도 그리 길지 않은 법이다.

“황태자 전하, 첼루나 공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블레논의 시종 하나가 다소 난감한 안색으로 고한 건 초여름쯤이었다.

블레논은 자신이 보던 서류에서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들여보내.”

“……네, 전하.”

시종은 영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황태자에게 충성하는 그가 보기에 미리 알현을 청하지도 않고 황태자궁에 들이닥친 공주는 무례함의 극치를 달렸다.

그러나 주인이 입장을 허락했는데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종은 고분고분 뒤돌아 나갔다.

이후, 시종 대신 첼루나가 들어왔다.

“왔어?”

그제야 블레논은 서류에서 시선을 뗐다. 동생을 보며 느직하게 웃는 낯이 퍽 악의적이었다.

“알현을 미리 청하지 않고 급히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황당한 소식을 들어서요.”

첼루나는 인사치레를 생략하고 형식적인 사과만 던진 채 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오빠를 노려보는 시선이 사뭇 포악했다.

“앰벌리 라크문 경이 앞으로 제 호위를 맡는다는 게 사실입니까?”

아주 최근에 인사이동이 있었다. 첼루나 본인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첼루나가 이 사실을 알아낸 건 오늘이었고, 호위 교체가 실행되는 날도 바로 오늘이었다.

“응, 사실이야. 정확한 정보가 전달돼서 다행이네.”

짐짓 다정한 말투는 명백한 조롱이었다.

블레논은 첼루나가 이 갑작스러운 교체의 속뜻을 모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의 분석은 정확했다.

‘호위가 아니라 감시겠지!’

첼루나는 분노했다. 황태자의 수족 같은 기사를 제 호위로 붙이겠다니, 그 꿍꿍이가 너무 대놓고 음흉했다.

‘앰벌리가 이미 블레논을 배신했다는 확신이 있다면 모르겠는데, 아직 그것도 아니잖아……!’

앰벌리 라크문은 여전히 첼루나에게 너무나 크고 번거로운 수수께끼였다.

그의 행동은 전생과 같을까? 이번에도 황태자를 배신하고 황녀에게 붙을까? 설마 이미 황녀의 첩자로 활동 중인데 나만 모르는 거야?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지금, 앰벌리가 아직 황태자의 심복이라고 가정하고 그를 경계하는 게 가장 안전했다.

그런데 그 인간이 앞으로 저를 호위한다니. 보호를 핑계로 온종일 주변을 맴돌 거라니.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황태자에게 일러바칠 거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했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는구나.’

첼루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황녀는 쫓겨났고 황자는 황태자가 되었으니 이제 슬슬 방심하고 비교적 힘없는 막냇동생쯤이야 그냥 내버려 둘 줄 알았다.

황제가 병으로 쓰러지고 전세가 뒤집히기까지 앞으로 약 2년, 그동안 자기는 그저 온화한 성녀 역할 뒤에 숨어 조용히 때를 기다리려 했거늘.

“황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제가 받기엔 너무 과분한 인력입니다. 실력이 좋아 전하께서 아끼시는 기사잖아요. 저는 지금 있는 호위병들로 만족합니다.”

첼루나는 또박또박 씹어 뱉으면서도 아득한 절망을 느꼈다. 고작 자기가 찾아와 화 좀 낸다고 해서 황태자가 마음을 바꾸지는 않을 테니.

게다가 황족의 호위 임명은 황제가 인가해야만 이뤄질 수 있다. 이미 황제가 승낙한 인사 교체였고, 첼루나는 또다시 무력했다.

“그만큼 귀한 인력이니 네게 양보하는 거야. 내 소중한 동생 곁에 호위랍시고 아무나 붙여 둘 수는 없지. 네 말대로 라크문 경은 유능한 기사니까, 기쁜 마음으로 감사히 받으렴.”

바란 적도 없는 ‘선물’을 강요하며 감사를 종용하다니, 정말이지 질 나쁜 폭군이었다.

첼루나는 오빠를 차갑게 쏘아보다가 몸짓만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정녕 감사히 받겠습니다.”

첼루나는 현실적인 패배를 인정했다. 일단 여기서는 꼬리를 내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역이용할지 고민해야 했다.

내 곁에 앰벌리 라크문을 보낸 걸 후회하게 해 주리라. 첼루나는 속으로 스산하게 다짐했다.

그건 오전의 일이었고, 이제는 오후였다. 공주궁의 새 호위 앰벌리는 새 주인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공주의 집무실을 찾았다.

“앞으로 공주님을 모실 앰벌리 라크문입니다. 성심껏 임하겠습니다.”

어차피 서로 이름도 직책도 다 아는 사이였지만, 정해진 형식을 지키기 위해 앰벌리는 장황한 인사를 늘어놓았다.

“그래, 라크문 경. 앞으로 잘 부탁해.”

첼루나도 순순히 대답했다. 까칠하지도 쌀쌀하지도 않고 그저 정중한, 그리고 묘하게 골똘한 음성이었다.

앰벌리는 첼루나의 의외로 온순한 태도를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처음에 황태자가 자신을 공주에게 보내겠다고 했을 때, 앰벌리는 그게 과연 자신이 공주님과 잘되도록 돕는 게 맞는지 심각한 회의를 품었다.

호위라 쓰고 감시라 읽는 이 뻔한 수를 영리하신 공주님이 파악하지 못하실 리 없다. 당연히 황태자의 끄나풀로 온 나를 적대하실 터.

그런데 현재 공주는 뾰족뾰족한 모습이 전혀 없었다. 저 모습은 진심일까, 아니면 고도의 전략일까. 앰벌리는 긴장하며 탐색했다.

“그나저나, 라크문 경. 그대가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묻고 싶은 말이 있어.”

“하문하십시오.”

“작년 여름에 우리가 시내에서 만났던 거 기억해?”

첼루나의 직설적인 질문에 앰벌리는 얼핏 굳었다.

자신이 늘 그때를 곱씹으며 회상한다는 사실을 들킨 것 같아 괜히 정곡이 찔린 느낌이었다.

“……기억합니다.”

잊었을 리가. 나는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을 소중히 간직한다.

“그때 그대가 내게 물었지. 그대에게도 기회를 줄 수 없겠느냐고. 만약 그대가 나와 훨씬 편한 사이가 되면 데아론 텔로아 경과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겠냐고. 기억해?”

<만약에 제가 지금보다 훨씬 편해지신다면.>

<그렇다면 제게도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황녀 전하의 기사인 데아론 텔로아 경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기회요.>

“기억합니다.”

앰벌리는 나직이 대답했다. 이 또한 잊은 적 없었다.

“그때 그 마음이 아직 유효한지 궁금해.”

첼루나는 앰벌리를 똑바로 응시하며 진지하게 속삭였다.

말을 입에 담는 순간 첼루나는 이미 답을 알았다. 열망으로 불타는 저 연청색 눈은 자못 노골적이었다.

“제가 감히 공주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릴 처지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눈빛으로는 이미 정답을 말했으면서, 앰벌리는 입을 열어 우회적인 언어를 자아냈다. 첼루나는 집중해서 들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황태자 전하의 명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공주님께서는 당연히 제가 달갑지 않으시겠죠. 그런 상황에서 솔직하게 고해 봤자 공주님의 의심만 늘어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의심하지 말지는 내가 듣고 결정해. 그대는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해 주면 돼. 말해 봐. 그때 그 마음, 아직도 유효해?”

첼루나는 단호하게 질문했다. 앰벌리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문득 손을 뻗어 첼루나의 손끝을 감쌌다.

“유효합니다.”

설탕처럼 달콤한 저음이었다. 이어, 앰벌리는 첼루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맨살에 닿는 감촉이 버거워 첼루나는 반사적으로 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있는 힘껏 참았다. 아직은 상대방에게 진심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퍽 괴롭겠군. 내 마음에는 들고 싶은데 그대가 모시는 주군은 따로 있으니 말이야. 안 그래?”

첼루나는 나직이 반문했다. 앰벌리는 고요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춘 채 공주를 올려다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청색으로 불타던 눈에 이제는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대가 생각한 해결책은 뭐지? 날 향한 마음과 주군을 향한 충성이 양립할 수는 없을 텐데.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겠지. 안 그래?”

이건 도박이었다. 첼루나는 자신을 향한 앰벌리의 마음이 정확히 얼마나 깊은지 모르는 상태에서 도박을 감행하고 있었다.

데아론을 생각하면 죽도록 죄스러웠으나,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뭐라도 해야 했다.

첼루나는 지금 최선을 다해 앰벌리에게 여지를 주고 있었다. 그를 유혹해서라도 황태자를 향한 그의 충정이 흔들리게 해야 했다.

앰벌리가 공주궁에 온 건 황태자의 명에 따라서였지만, 막상 공주궁 안에서 그는 자신의 노예가 되리라.

황태자의 명으로 자신을 감시하는 첩자보다는 자신의 호감을 사려고 안달하는 사내를 다루는 게 첼루나에겐 훨씬 쉬웠다.

‘미안해, 데안. 정말, 정말 미안해.’

첼루나는 속으로 거듭 사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