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14)

전생에도 이 시점에 블레논은 아비의 총애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첼루나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원래도 동생을 학대하던 오라비와 딸을 냉대하던 아비가 정치적 상황이 저들에게 유리해졌다는 이유만으로 하루아침에 선해지지는 않는 법이다.

게다가 전생에 결국 승리한 쪽은 텔레스 황녀였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와병이 전세를 순식간에 바꾸었다.

애초에 지지 세력의 규모와 본인의 역량만으로 따지자면 황자와 황녀는 서로 비슷했다.

처음에 황자가 압도적 승기를 잡았던 건 황제가 그를 편애했기 때문이었다.

그 편애가 사라지는 순간, 다시 전쟁이었다. 그리고 최종 승자는 텔레스였다.

‘물론 변수가 아예 없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첼루나는 음침하게 숙고했다.

그녀는 이번 생이 전생과 완전히 달라져 끝내 블레논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지는 않았다.

끔찍한 생각이긴 했지만, 가능성 자체는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도 절망할 필요는 없어.’

오빠가 승리할 가능성과 달리, 언니가 승리하는 건 이미 한 번 현실이 되었으니까.

실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건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온몸으로 느꼈다.

첼루나는 훨씬 확률 높은 두 번째 가능성에 본인의 모든 패를 걸었다.

미래에 대한 그런 씩씩한 낙관과 별개로, 당장 눈앞에 놓인 현황은 실제로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블레논 황태자 전하를 위한 축하연이 열렸고, 첼루나는 그곳에 억지로 참석해야 했다.

첼루나 외에도 많은 황녀 쪽 사람이 순전히 조롱거리가 되기 위해 오늘 연회에 초대받았다.

황후와 크레온 공작 내외도 그곳에 있었다. 대사제와 텔로아 후작 내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그간 자기들이 그토록 열심히 공격했던 황자에게 이제 황태자가 된 것을 축하드리는 인사를 진심인 척 건네야 했다.

전부 사교계와 정계에서 닳고 닳은 베테랑들이니 표정 연기는 흠잡을 데 없었다. 다만 그 속까지 평온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첼루나도 혐오를 참으며 오라비 앞에 나아갔다. 첼루나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국혼을 축하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고마워, 내 동생.”

블레논은 짐짓 자상하게 답했다. 첼루나는 인형처럼 웃었다. 남편 옆에 선 새 황태자비는 온기 없는 눈으로 첼루나를 응시했다.

“춤이라도 한 곡 출까?”

블레논은 산뜻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첼루나는 표정 관리가 어려워졌다.

무도회에서 남매끼리 춤추는 건 흔한 관습이었으나 여태 황족들은 여러모로 논외였다.

“영광입니다, 전하.”

첼루나가 거절할 길은 없었다. 그녀는 오빠가 내민 손을 공손히 맞잡았다.

야회용 장갑이 여전히 유행이라 다행이었다. 블레논과 맨살이 닿는 건 상상만으로도 싫었다.

남매는 무대에 마주 섰다. 주변에서 이 낯선 조합을 신기해하며 흘긋대는 시선들이 느껴졌으나 두 사람은 능숙하게 무시했다. 각자 시선은 오직 상대방을 향했다.

“춤은 좀 좋아하니?”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구나. 동생인데 내가 너무 아는 게 없네. 아쉬운 일이야.”

“그러게요.”

오빠는 나긋했고 동생은 정중했으나 사실 둘 사이에는 냉기가 흘렀다.

감미로운 춤곡이 이어졌고,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 속에서 나풀댔다.

“네가 서부에서 데아론 텔로아와 아주 난리가 났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블레논이 문득 상냥하게 말했다. 첼루나는 긴장했다.

누가 그에게 소식을 전했을까? 누가 황태자의 끄나풀일까?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갔다.

“아주 서로 죽고 못 사는 사랑인가 봐? 감동적이어라. 그런데 네게 별로 도움이 되는 연애는 아닌 것 같아. 그 기사의 주군은 지금 여기 없잖니?”

“저는 그 아이의 주군을 보고 교제하는 게 아닙니다. 그 아이 본인이 좋아서 하는 거지요.”

블레논의 노골적인 지적에 첼루나도 정직하게 받아쳤다. 블레논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렇게 멍청하게 살면 제명에 못 죽어, 첼루나.”

진심으로 아끼는 동생을 타이르듯 온화하게 건넨 충고였다. 첼루나는 침묵했다.

‘전생에 제명에 못 죽은 건 너거든.’

그렇게 대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차피 어린애들 불장난이잖니.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같잖은 사랑 놀이는 집어치우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천수를 누릴 수 있을지나 고민해. 뭐, 답은 이미 알겠지만.”

직설적인 경고였다. 내 신하가 되렴, 안 그러면 죽일 거야.

비록 그녀가 택한 미래의 황제가 싸움에 패배한 것처럼 보이면서 첼루나 공주의 위신도 한풀 꺾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성녀였다. 교회가 그녀를 편들고 민중이 그녀를 따랐다.

블레논은 여전히 첼루나를 자기편으로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다. 황제의 인정을 받고 성녀의 선택을 받은 영예로운 황태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 정치적인 계산 외에도 그의 내면에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감정이 남아 있었다.

웬만하면 동복동생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 그녀를 살리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만약 불가능하다면, 뭐. 어쩔 수 없겠지만.

“……죄송합니다, 전하.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또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전하는 아실지 모르겠지만.”

첼루나는 부러 싱긋 웃었다. 홧김에 나온 도발이었다.

감히 블레논 따위가 데아론을 두고 불장난이니 사랑 놀이니, 그런 비하적인 단어를 쓰는 게 불쾌했다.

“글쎄.”

블레논은 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눈매를 위험하게 좁혔다.

“그러니까 방금 네 말뜻은, 머리로는 내 충고를 따르고 싶은데 마음은 어쩌지를 못하겠다? 텔레스가 문제가 아니라 그 애의 기사가 문제란 거냐?”

“전하께서 그렇게 이해하셨다면 그런 거겠죠. 제가 아니라고 해명해 봤자 편하신 대로 해석할 거잖아요.”

“네가 틀렸다고는 주장 못 하겠네. 좋아, 그럼 내 해석이 맞았다고 치자. 그럼 문제는 정말로 데아론 텔로아 그자뿐이고, 그자만 없어지면 너는 제정신을 차릴 거다, 이건가?”

처음으로 첼루나의 시선에 공포가 번졌다. 블레논은 흙빛으로 질린 동생의 얼굴을 잔인한 눈으로 감상했다.

“내 심기를 거스른 주제에 약점을 동네방네 보여 주고 다니면 안 되지.”

블레논의 교활한 저음이 첼루나를 올가미처럼 죄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발목이 휘청 꺾였다. 블레논은 동생이 넘어지지 않도록 그녀를 꽉 붙들었다.

부드럽게 부축하듯 받쳐 주는 게 아니라, 뼈를 부러트리고 싶은 것처럼 그녀를 무참하게 움켜잡았다.

“후작의 아들입니다. 아무리 전하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요.”

첼루나는 나직하게 씹어 뱉었다. 이 와중에도 습관적으로 존댓말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응, 나도 알아. 그냥 던져 본 말이야.”

블레논은 차갑게 웃었다.

아무리 황태자라도 고위 귀족의 아들을, 그것도 황녀의 예비 시동생을 해칠 수는 없었다.

사람 죽이는 게 그렇게 쉬웠다면 여태 나라가 이토록 멀쩡하게 유지되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안 그래? 꼭 내가 아닐 수도 있잖아. 사람은 원래 생각지도 못한 때에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갑자기 죽거나 다치거든.”

동시에, 원래 한 치 앞도 예측하지 못해 허무하게 끝을 맞이하는 게 인간이었다.

“사고는 얼마든지 일어나.”

저 징글징글한 미소는 그대로였다.

첼루나는 손을 뻗어 저 징그러운 웃음을 오빠의 얼굴에서 물리적으로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를 차고 때리고 찌르고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싶었다.

전생을 통틀어 지금까지 그가 제게 한 것만큼만, 딱 그만큼만 그에게 갚아 주고 싶었다.

만약 이놈의 죄를 전부 합쳐 쌓는다면 태산 하나를 이뤘을 것이다.

“사고는 대부분 예방이 가능해요. 사람들이 제대로 대비만 한다면.”

첼루나는 싸늘하게 받아쳤다. 블레논은 그저 웃었다. 여전히 불쾌하기만 한 미소였다.

“대비도 사람 나름이지.”

그는 끝까지 음험했다. 첼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춤곡은 거의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첼루나는 어서 오라비의 시야에서 벗어날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블레논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아직도 아델라 프란체스랑 친하게 지낸다며. 전에 황태자비가 주최한 다과회에도 왔었고.”

전하는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첼루나는 힘껏 비꼬고 싶었지만, 그와 더는 말을 섞기도 싫어서 차갑게 듣기만 했다. 블레논은 마저 소곤댔다.

“이미 대안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지? 네 첫 번째 선택이 망했을 때를 대비해서 언제든지 내 편으로 넘어올 수 있도록.”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리라고 첼루나는 이미 예측했었다. 그러나 구태여 입을 열어 대놓고 시인하지는 않았다.

“그 대안을 써먹을 기회를 줄게. 이제라도 숨죽이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럼 네가 남자를 백 명씩 돌려 만나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알겠어?”

텔레스를 버리고 내게로 와. 내 편이 돼. 블레논은 한결같이 오만하게 요구했다.

첼루나는 끝까지 확답을 주지 않았고, 곧 춤곡은 끝났다.

남매는 서로 단정히 인사한 뒤 각자 반대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자만 없어지면 너는 제정신을 차릴 거다, 이건가?>

‘정신을 차릴 거라고?’

첼루나는 속으로 격렬하게 비웃었다. 블레논의 협박을 떠올리자 참을 수 없이 우스워 비명을 닮은 폭소가 터질 듯했다.

‘정신을 차리긴 무슨 정신을 차려. 무슨 협박이 그따위야.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잖아.’

그딴 게 협박이 되리라고 생각하다니.

무릇 협박이란 어디까지나 협박하는 주체에게 득이 돼야 할진대, 그건 오히려 득이 아니라 독이었다.

‘만약, 만약에, 너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정말 데안을 건드리면…….’

나는 정말, 미쳐 버릴 거야.

정신을 놓고 모든 걸 부숴 버릴 거야. 그 무엇도 살려 두지 않을 거야.

그 끝에 나 또한 파멸할지라도 끝까지 복수할 거야. 정말 그럴 거야. 정말로.

그러니 아까 블레논의 협박은 상대에게 적당량의 공포를 심어 제 말을 따르도록 유도한 게 아니라, 그저 더한 분노만 불러일으켰다.

‘감히, 그 애를.’

나를 위해 이미 한 번 목숨까지 버린 그 애를.

첼루나는 억지 심호흡으로 활활 타는 감정을 다스렸다.

무도회장 한복판에서 이성의 끈을 놓쳐 봤자 도움 될 건 하나도 없었다. 아직은 표정 관리에 힘써야 했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는 인형처럼 잔잔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아직 싸움터였다.

앰벌리는 계속해서 공주를 보고 있었다. 축하연이 시작되고 공주가 입장한 순간부터, 계속.

지난여름 우연히 시내에서 마주친 뒤로 서로 한마디 대화도 오가지 않은 상태였다.

앰벌리는 공주가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그날 이후 늘 그래 왔듯, 단어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곱씹으며 꿈속에서조차 되풀이하고 있을지.

아마 그럴 확률은 몹시 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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