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령 그게 이기적인 결정일지라도? 나뿐만 아니라 너를,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어도?”
텔레스는 근본적인 회의감을 드러냈다.
나 하나 황제가 되자고 정녕 이 많은 충신을 함께 사지에 몰아넣어야 하는가? 특히 너를, 이토록 사랑스러운 너를.
“그 또한 저와 다른 사람들의 선택이죠. 당신과 함께 위험에 뛰어들기 싫으면 이제라도 당신을 버리면 그만입니다.”
모리안의 단언은 냉정하여 잔인했고, 그만큼 위로가 되었다. 모리안은 부드럽게 웃었다. 보기 드물게 따스한 미소였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당신은 가끔 자의식 과잉일 때가 있습니다. 정말 제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희생을 강요해서 당신을 따르기로 했겠어요?”
본인도 뼛속까지 귀족적인 오만으로 무장한 남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보다도 더 오만할 수밖에 없는 고귀하신 황족께 충분한 조언을 드렸다.
“당신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선택한 거지요. 당신이 엄청나게 잘났다는 건 인정합니다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니 마치 고작 당신의 선택 하나가 모두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고뇌하실 필요 없습니다.”
“……너, 좀 재수 없어.”
텔레스는 진지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 냉기는 없었다. 오히려 새파란 불꽃처럼 홧홧한 기색이었다.
“알면서도 저를 곁에 두지 않으셨습니까.”
모리안이 지적했다. 그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텔레스는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통치자의 결정이 다수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사실이니 신중할 필요야 있겠지요. 그런 면에서 당신은 이미 자격을 갖췄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 역시 기억해 주세요.”
모리안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텔레스는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화롯불에 손을 그렇게 많이 쐤던가. 심장 안쪽까지 더워지는 느낌이었다.
“당신도 그냥 다른 여느 인간처럼,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시면 됩니다.”
모리안은 진솔하게 간언했다. 텔레스는 잠잠했다. 그녀는 화로에서 손을 거두었다. 이미 열을 쬘 만큼 쬐었다.
“그래, 알겠어.”
텔레스는 담백하게 답했다. 이어, 화롯불의 모든 빛을 빨아먹은 것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고마워, 모리안. 역시 너는 참 재수 없지만 좋은 친구야.”
“……그렇게 욕인지 칭찬인지 모호한 말을 그런 얼굴로 하지 마십시오.”
모리안은 괜히 툴툴거렸다. 텔레스의 말에 속이 이상하게 울렁인 탓이었다. 친구, 친구라. 그 단어가 기쁘고도 슬펐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 이거지. 내가 원하는 대로, 라.”
텔레스는 이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골똘해진 그녀를 모리안은 말없이 관찰했다.
하얀 피부가 불빛을 머금어 연한 주홍빛이었다. 그 고운 색깔이 모리안의 마음에 더운 빛을 끼얹었다.
“……이제 알겠어.”
내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나 전적인 애정과 신뢰로 내게 충언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데, 그저 숨죽여 물러설 수는 없다는 것을.
언젠가는 순전히 내 의지와 힘으로 이 사람에게 최고의 영광을 안겨 주고 싶다는 것을, 이 사람 본인 덕분에 깨닫게 됐어.
사실 늘 알고 있었는데, 이제야 기억한 거야.
“고마워, 모리안.”
텔레스는 온화하게 말했다. 그녀는 다시 그를 보며 웃었다.
“별말씀을.”
모리안은 나직이 답했다. 황녀의 미소에 그의 심장은 아프게 울렸다.
쌀쌀한 겨울밤, 그들은 그렇게 나란히 서 있었다. 자그마한 화로에서 태양 같은 빛을 받으며.
* * *
해가 바뀌고 겨울이 갔다. 마수 토벌대의 월동을 돕기 위해 서부에 머물던 사람들은 이제 귀환할 때가 왔다.
첼루나는 출발 당일까지 아쉬움과 두려움에 시달렸다.
아쉬움은 한 계절을 통째로 함께하고도 충족하지 못한 연인 곁에 있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고, 두려움은 자기가 없는 사이 그가 또 전생에는 없던 사고를 겪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여기 남는다고 해서 일어날 사고가 안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첼루나는 애써 합리적으로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그녀는 이미 여러 차례 데아론과 함께 돌아가자고 빌었다. 핑계야 만들면 그만이었다.
“죄송해요, 공주님.”
거절한 쪽은 항상 데아론 본인이었다.
“도망쳤다는 비난을 듣기는 싫어요. 공주님과의 관계를 남용해 불공평한 특혜를 받았다는 조롱은 더더욱 싫고요.”
“남들이 뭐라고 떠들든 무슨 상관이야? 그런 가치 없는 인간들의 평가는 신경 쓰지 말고 너를 위한 최선을 선택하면 돼.”
“이게 제 선택이고 제가 생각한 최선이에요. 저는 당신 곁에서 떳떳해지고 싶어요, 공주님.”
데아론은 진지했다.
그는 평민 출신 사생아라고 뒤에서 비웃던 사람들이 자신의 기사로서 활약을 보고 태도를 싹 바꾸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이는 원래 욕심이라곤 없던 그에게 간절한 욕망을 가르쳤다.
“저 때문에 당신까지 덩달아 비난받고 조롱받는 건 싫어요. 당신께 걸맞은 연인이 되고 싶어요. 당신이 저 때문에 힘들어질 일 없게.”
“힘든 적 없어, 데아론. 너는 애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네 평판 같은 건 이미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잖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죄송해요, 공주님.”
데아론은 고집스레 사과만 반복했다. 첼루나는 패배를 자각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죄책감으로 당신 곁에 남고 싶지 않아요.”
데아론은 부드럽게 설득했다. 그리고 첼루나는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도 과거에 같았기에.
전생에는 오히려 첼루나가 데아론보다 상황이 못했었다. 데아론은 마수 토벌로 공을 쌓은 영웅이었지만, 첼루나는 성녀라는 이름도 없이 그저 버림받은 공주였으니까.
그때 첼루나는 데아론을 사랑하면서도 늘 자신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 생각을 알아챈 데아론이 아무리 부정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그때 겪었던 고통을 이번 생의 연인에게 고스란히 떠넘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지금 여기서 떠나는 게, 오히려 이 애의 안전에 더 나을지도 몰라.’
첼루나는 혹시 자신이 떠난 사이 전생과 또 다른 사고가 데아론을 덮칠까 봐 두려웠지만, 이런 경우 변수는 자기 자신이 아닐까?
과거 마수 토벌 때 데아론은 중상을 입은 적 없었다.
전생보다 시기가 앞당겨진 것부터 변수이긴 했지만, 만약 이대로 첼루나가 조용히 떠난다면 더는 달라질 게 없을지도 몰랐다.
‘변수는 나니까. 처음부터 나였어.’
해묵은 죄책감이 그녀의 심장을 쿡 찔렀다. 그녀는 그 어두운 감정을 서둘러 떨쳐 냈다.
실종됐던 데아론과 재회한 뒤로 첼루나는 비관적인 생각에 휩쓸리지 않기로 했다.
항상 불안해하고 미안해하며 연약하게 무너져 봤자 연인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될 테니까.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드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할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혼자 돌아가세요, 공주님. 저는 괜찮아요.”
데아론은 용감하게 웃었다. 첼루나는 그를 착잡하게 바라보다 뚱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하나도 안 괜찮아.”
그녀는 연인의 손을 잡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입술을 열고 그녀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서로 혀를 섞는 동작이 이제는 완연한 어른처럼 농밀했다.
“매일매일 보고 싶을 거야. 다시 떨어져 지낼 생각에 벌써 미칠 것 같아.”
“저도요, 공주님. 하지만 우리 둘 다 정말 미치지는 않기로 해요.”
“노력할게.”
“하아, 공주님…….”
“왜?”
“사랑해요.”
맥락 없이 뚝 떨어진 고백은 사실 전혀 맥락이 없지 않았다. 서로 바라보고 만지고 대화하는 매 순간이 사랑이었다. 첼루나는 생긋 웃었다.
“나도 사랑해, 데아론.”
“그래서 너무 좋아요.”
“좋으면 이름으로 불러 봐.”
“사랑해요, 첼루나.”
다정한 작별은 이렇게 이뤄졌다.
공주와 공주의 시녀들, 아버지를 뵈러 온 루이사 펠르만과 보급품을 전달한 사제들, 귀족들은 다시 수도로 길을 떠났다.
두고 온 연인을 향한 아쉬움과 두려움을 갈무리하며 첼루나는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했다. 그녀는 전생을 기준으로 햇수를 헤아렸다.
‘폐하께서 앓아누울 때까지 앞으로 2년. 폐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앞으로 4년.’
첼루나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지병이 있던 황제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하는 건 그녀가 스물한 살 때. 황제의 숨이 기어코 멎는 건 그녀가 스물세 살 때.
이번만큼은 그 어떤 변수도 없을 것이다. 여태 전생과 달라진 모든 부분은 첼루나 개인의 달라진 행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행동을 조금 바꾼다 해서 황제의 수명이 갑자기 늘거나 주는 건 아니었다. 그것만큼은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이므로.
부친이 승하할 때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 첼루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나는 기쁜가, 슬픈가. 이번 생에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전생에 그녀는 일상이 너무 불행해서, 기쁨이든 슬픔이든 느낄 틈이 없었다.
‘오래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 폐하께서 돌아가시자마자 내전이 일어나고, 블레논이 패배하고, 나는 감옥에 갇히고…….’
그리고 데아론, 네가. 첼루나는 내적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생각하지 마.’
데아론의 죽음을 생각하지 마. 이번 생에는 절대 없을 일이야.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일행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움직였다. 봄을 앞둔 때였다.
후반전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봄에는 경사가 무려 둘이나 있었다. 물론, 경사의 기준은 오로지 한쪽을 위함이었다.
연달아 날짜가 잡힌 황태자 책봉식과 국혼에 대한 첼루나의 감상은 대체로 침착했다.
‘전생보다 반년쯤 이르네.’
전생에 황제는 황녀가 외국으로 떠난 지 약 반년 만에 아들을 황태자 삼고 그의 국혼을 진행했다.
만약 전생대로 갔다면 데아론과 텔레스는 지금쯤에야 수도를 막 떠났을 것이며, 황태자 책봉은 가을에나 이뤄졌을 것이다.
시기가 미묘하게 앞당겨졌다. 그러나 시기와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결과는 동일했다.
황자, 아니, 황태자의 완벽한 승리로 보였다. 황녀는 쫓겨나고 황후는 숨죽이며 황제는 아직 정정한 지금.
“또 공주님만 딱하게 됐죠.”
“하필이면 줄을 잘못 서서…….”
“그러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동복을 배신했대요?”
첼루나는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수군대는 음성과 비웃는 눈초리가 익숙했다.
남들이 보기에 싸움은 이미 황태자의 승리로 끝났으니, 나서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면 황태자의 동복 대접은 받았을 공주가 미련해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첼루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전생을 기억하는 그녀는 의연할 수 있었다.
‘동복 대접은,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