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합니다.>
꿈속에서, 누군가 헛소리를 했던 것 같다.
<사랑해요.>
그리고 그 헛소리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모리안은 꿈결에 텔레스를 봤다. 그녀는 그를 등지고 있었다. 제 진심을 말하자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 그를 마주했다.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모리안, 나는…….>
나는, 뭐?
모리안은 꿈에서 깼다. 이마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그는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새벽이 오는 때였다.
텔레스는 거의 항상 모리안과 함께 식사했다. 따로 식사하는 건 오직 한쪽이 개별 일정이 있을 때만이었다.
그러나 둘이 대부분 같은 모임에 초대받았기에, 개별 일정이라는 것도 사실 몹시 드물었다.
오늘도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황족의 끼니답게 진수성찬이 마련되었다.
아침 식사로는 꽤 부담스러운 양이었지만, 사치에 익숙한 황족과 귀족은 태연하게 빵을 썰고 커피를 마셨다.
“모리안, 우리 겨울 축제에 가 볼래?”
“겨울 축제요?”
“응. 요즘 시내에서 평민들이 하는 거 있잖아.”
먼저 제안을 꺼낸 쪽은 텔레스였다. 모리안은 그녀가 원하는 일에 별 불만 없이 동조하는 평소 역할에 충실했다.
“이 나라 전통이라니까 기회 있을 때 구경하고 싶어서.”
그 기회가 앞으로 너무 많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 유배 생활은 평생 이어질지도 몰라. 텔레스는 뒷말을 되삼켰다.
“언제 가시겠습니까?”
“응, 오늘 저녁?”
그 신속한 전개가 당황스러울 법도 했으나 모리안은 고분고분 끄덕였다.
어차피 텔레스도 다짜고짜 억지를 부린 것만은 아니었다. 둘 다 그날 저녁 아무 일정이 없음을 알았기에 제안한 날짜였다.
“그러면 채비하겠습니다.”
하여, 그날 외출이 결정되었다.
귀족들이 무도회와 연회로 긴긴 겨울밤을 보내듯 평민들도 저들만의 유희로 우중충한 어둠에 맞섰다.
길거리에 노점을 늘어놓고 간식과 기념품을 파는 어디서나 흔한 지역 축제는 현지 체험을 핑계로 돌아다니기에 딱 좋았다.
텔레스와 모리안은 각각 자신이 지닌 가장 수수한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황족과 귀족의 부담스러운 신분을 되도록 감추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별수 없는 귀티가 흐르긴 했지만, 원래 사람들은 남에게 별 관심이 없는 터라 그들을 힐끔대거나 쳐다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호위는 필요 없으시겠습니까?”
모리안이 초조하게 물었다. 그는 자기 혼자 데리고 외출하겠다는 텔레스의 결정이 썩 탐탁지 않았다. 황녀 본인은 태연했다.
“이 나라 치안이 그리 나쁘지도 않아. 그리고 네가 있잖아?”
실력으로 인정받은 기사가 자기 약혼자로 동행하는 데 무슨 걱정이람. 모리안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저를 너무 믿지 마십시오, 전하. 전하의 안전은 고작 그런 사적인 맹신에 맡길 수 없는—”
“알겠어, 알겠어. 잔소리는 그만.”
“잔소리라니.”
저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왔다. 모리안이 뚱하게 중얼대자 텔레스는 푸핫 웃었다. 모리안의 표정이 더욱 불퉁해졌다.
“왜 그리 웃으십니까?”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넌 그때도 잔소리가 참 심했어.”
“……잔소리 아닙니다.”
옛날 생각이라. 모리안은 잠시 어지러운 눈을 깜빡였다.
앙증맞은 금발 소녀와 그 옆에 쪼그려 앉은 흑발 소년. 모든 게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제 가자.”
텔레스가 모리안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모리안은 묵묵히 이끌렸다.
그녀는 얼마 못 가 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는 멀어진 체온이 못내 아쉬웠다.
길거리는 축제답게 북적였다. 텔레스는 노점 구경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여러 먹음직한 군것질거리가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텔레스는 흥미롭게 바라볼 뿐 막상 사서 먹자는 말은 없었다.
“드시고 싶습니까?”
텔레스의 시선을 눈치챈 모리안이 속닥속닥 물었다. 텔레스는 놀라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 먹을 생각은 없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포렌타인 제국의 블레논과 텔레스 남매는 절대 검증되지 않은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독이 들었을지도 몰라서.
적어도 첼루나는 그런 면에서 자유로웠다. 사실 그녀는 회귀 전 공주궁에 감금되다시피 살았기에 애초에 길거리 음식을 맛볼 기회조차 없었다.
“제가 먼저 한 입씩 먹어 보면…….”
모리안이 제안했다. 평소답지 않은 언행이었다. 이 고지식한 충신은 원래 제 주군께 불량 식품을 먹이느니 절벽에서 몸을 던질 사내였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텔레스의 놀라움이 깊어졌다. 얘 오늘 왜 이래? 사실 그건 모리안 본인이 묻고 싶은 질문이기도 했다. 나 오늘 진짜 왜 이래?
“우리 저쪽에도 가 보자.”
텔레스는 약혼자의 기행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다시 그의 손목을 가볍게 잡고 방향을 조종했다. 모리안은 힘없이 끌려갔다.
‘젠장.’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오늘따라 이상 행동을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 하필 어젯밤 꾼 그 개꿈 때문이다.
과거의 소녀와 소년이 나왔던 꿈. 그리고 자신이 황녀에게 사랑을 고백한 꿈이었다.
‘……미쳤어, 진짜.’
꿈속에서 다시 마주한 과거처럼 텔레스가 조금은 천진난만한 때로 돌아가 원대로 군것질하고 살짝 제멋대로 구는 그런 기회를 선물하고 싶었다.
자신이 그녀의 신하보다는 친구에 가까웠던 그때가 문득 그리워졌다.
그래서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거듭하나 보다. 감정을 드러내고, 한없이 약해지고.
그들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활쏘기 시합장이었다. 화살로 과녁을 맞히면 점수에 따라 경품을 주는 곳이었다. 텔레스는 까치발을 들고 기웃거렸다.
“한번 해 보실래요?”
이번에도 모리안이 먼저 물었다. 텔레스는 떨떨하게 눈썹을 치켰다.
“너나 나나 저 활을 잡는 것만으로도 반칙일 것 같은데.”
기사인 모리안은 말할 것도 없었고, 텔레스 역시 황족의 교양을 위해 궁술을 전문적으로 익힌 사람이었다.
길거리 축제에서 쓰는 싸구려 활쯤이야 그들에겐 장난감에 가까웠다. 너무 세게 당겨 부러트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보는 족족 구경만 하시고 직접 손도 대지 않으실 거면 왜 나오셨습니까?”
모리안은 다시 뚱해졌다. 텔레스는 약혼자의 그런 반응이 참신하고 귀여워서 떨떠름한 표정을 잊고 씩 웃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불만이 많아, 모리안?”
“글쎄요. 사람이 항상 평온하고 모든 게 만족스러울 수는 없죠.”
“그건 맞는 말인데, 나 때문에 그렇게 툴툴거릴 필요는 없어. 네가 개인적으로 맘에 안 드는 거면 모르겠는데, 나는 지금도 충분히 즐거워.”
텔레스는 진심으로 타일렀다. 그녀가 쾌활하게 덧붙였다.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기분 전환이야.”
모리안은 말을 잃었다. 그 틈에 텔레스는 가볍게 키득대며 다시 그의 손목을 감쌌다.
“우리 저것도 구경하자.”
그런 식으로 순식간에 몇 시간이 흘렀다. 모든 게 정신없고 시끄러웠지만, 그렇다고 불쾌하지는 않았다.
텔레스의 말마따나 낯선 곳에서 낯선 무리 틈의 익명성은 묘하게 편안한 구석이 있었다.
평민들의 구어가 잔뜩 섞여 알아듣기 힘든 외국어와 각종 간식거리의 자극적인 냄새, 거리에 악기를 펼쳐 놓고 연주하는 이들의 노랫소리가 한데 어울려 무질서 같은 질서를 만들었다.
여기저기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텔레스와 바삐 보폭을 맞추고 그녀의 재잘거림에 담담히 맞장구치며 모리안은 문득 생각했다.
이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대로 스르르 녹아 사라진다면. 그저 황녀 전하와 나 단둘이,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아찔한 유혹이 모리안을 뒤덮었다. 상상만으로도 밀려드는 해방감에 숨이 벅찼다.
그러다 그는 곧, 가족을 떠올렸다.
“이제 좀 조용한 곳으로 갈까?”
소음 너머 텔레스가 외쳤다. 쉬지 않고 돌아다닌 지 벌써 몇 시간째였다. 모리안이 끄덕였다.
“저쪽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모리안이 가리킨 곳은 축제의 장에서 조금 떨어진 어둑한 공원이었다.
그곳에도 축제용 불빛이 반짝였지만, 대낮처럼 밝은 큰길보다는 확실히 덜 화려했다.
“그래, 어서 가자.”
두 사람은 이동했다. 서늘한 어둠을 맞이한 그들은 각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이곳의 암묵적 용도를 깨달았고, 즉각 어색해졌다.
“……조용한 이유가 있었네.”
“……그러게요.”
이곳은 딱 봐도 연인들의 장소였다.
원래 연인이던 자들이 찾은 곳인지, 아니면 축제에서 새롭게 눈이 맞은 자들의 보금자리인지는 구분이 어려웠다.
한겨울이라 쌀쌀한 이 밤에도 몇몇 용감한 청춘들은 야외 수풀에 숨어 열렬한 애무를 이어 가고 있었다.
민망함에 모리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텔레스는 애써 침착했다.
“적어도 누군가 우리 얘길 엿들을 염려는 없겠어.”
“네…….”
주변의 모두가 이미 너무 그들만의 세상에 빠진 터라 남의 상황을 돌아볼 여유 따위 없어 보이긴 했다.
“저기 잠깐 서 있을까? 그나마 가장 따뜻할 것 같은데.”
텔레스가 가리켰다. 추운 겨울밤에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원 곳곳에 뜨끈한 화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텔레스와 모리안은 아직 주변에 아무도 없는 화로를 찾아 그 옆에서 손에 불을 쬐었다. 훈훈한 공기가 기분 좋았다.
“모리안. 너는 고향이 그리워?”
텔레스가 문득 물었다. 모리안이 그녀를 흘깃했다. 그녀는 불꽃을 보고 있었다.
“어떨 때는 그립습니다. 그러다 어떨 때는 잊고 삽니다.”
모리안은 최대한 솔직하게 대답했다.
한평생 나고 자란 도시가 그립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돌아가면 또 어떤 싸움이 펼쳐질지 상상했을 때, 그리움은 불안감에 밀려났다.
“그렇구나. 그럼 네 가족은? 가족은 그리워?”
텔레스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녀는 여전히 화롯불만 꿋꿋이 바라봤기에, 모리안은 그녀를 재차 곁눈질했음에도 그녀와 눈이 마주칠 수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립습니다. 잘 지내고 계신다고 꾸준히 편지를 받으니 걱정되지는 않지만요. 그리고 동생은……, 어차피 수도에 돌아가 봤자 만날 수 없으니까요.”
마력 폭주로 데아론이 죽을 뻔했다는 소식은 뒤늦게 모리안에게도 전해졌었다. 그 소식을 듣고 모리안은 가슴이 철렁했었다. 누가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야겠지? 너를 위해서라도.”
텔레스가 중얼거렸다. 모리안은 이제 그녀를 완전히 돌아보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저를 위해 그 무엇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누구를 위해서도요. 당신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결정을 내리십시오.”
이제는 텔레스도 그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파란 눈이 녹색 눈을 만났다. 각자 호수와 숲을 닮은 색이었으나, 지금만큼은 오히려 불꽃을 닮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