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피곤해 보이십니다.”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모리안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가 워낙 부드러워 텔레스는 일순 헛된 희망을 품었다. 그녀는 곧 담백하게 둘러댔다.
“좀 피곤하긴 하네. 어젯밤에 잠을 설쳤더니.”
쓸데없이 꿈에 어머니가 나와 과거의 망령을 끄집어냈다. 블레논이 권좌에 앉아 자신을 비웃었고 아버지는 차가운 눈으로 돌아섰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모리안은 진심으로 걱정했다. 텔레스는 그의 근심을 알아채고 건조하게 궁금해했다.
너는 내가 네 주군이라 염려하는 걸까? 아니면 설마, 나를 정말 아껴서.
“아마.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별 시답잖은 꿈이었을 거야.”
텔레스는 거짓말했다. 데아론은 미간을 좁히며 더 물으려 했으나, 마침 안무에 따라 서로 거리를 벌리는 구간이 왔다. 텔레스는 그 틈을 잽싸게 활용했다.
“그나저나, 우리 둘 다 이제 한 살씩 더 먹었네. 완전히 늙은이가 다 됐어, 안 그래?”
손을 다시 맞잡으며 텔레스는 일부러 화제를 바꿨다. 목소리와 미소도 아까보다 훨씬 싹싹했다.
모리안은 미심쩍은 눈빛을 지었지만, 순순히 황녀와 장단을 맞췄다.
“보통 스물세 살과 스물네 살을 늙은이라 부르지는 않지요.”
“왜, 과거에 비하면 확실히 늙었는걸.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사람은 누구나 과거의 자신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대체 언제 적이랑 비교하시는 거예요?”
모리안은 나직하게 실소했다. 그러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과 황녀의 첫 만남. 반짝반짝한 금발 소녀가 떠올랐다.
“하긴, 되게 옛날이긴 하네. 우리가 그때 몇 살이었지? 내가 아홉 살이었나?”
“네, 제가 열 살이었습니다.”
둘 다 잠시 회상에 잠겼다. 무려 14년의 세월을 거슬러 소년과 소녀의 시작점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있잖아, 나를 맨 처음 봤을 때 뭐라고 생각했어?”
텔레스가 문득 물었다. 단지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별다른 뜻 없이 꺼낸 질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궁금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솔직한 답변이 튀어나왔다. 모리안은 말하면서도 아차 싶었고, 텔레스는 눈빛이 멍하니 풀렸다.
“아야!”
“윽……!”
잠시 소동이 일었다. 텔레스가 제때 움직이지 않고 모리안이 스텝을 잘못 밟으면서 둘 다 어깨를 부딪쳤다. 왼쪽과 오른쪽이 각자 얼얼했다.
“미, 미, 미안!”
“아니에요, 전하,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둘 다 횡설수설했다. 갈 곳 잃은 시선이 각자 방황했다.
그들은 잠시 허둥지둥하다가 또다시 안무를 놓칠 뻔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몸이 간신히 움직였고, 참사는 반복되지 않았다.
전혀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텔레스도, 모리안도.
이 쉬운 사교춤을 틀리다니, 황족과 귀족의 백옥같은 자존심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일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쳐다볼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눈치껏 입을 다묾으로써 사교계의 평화를 유지했다.
텔레스의 얼굴은 새빨갰다. 모리안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을 방황했다.
만약 가능하다면 시간을 딱 1분 전으로 되돌려 자신의 쓸데없이 정직했던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었다.
‘바보.’
모리안은 속으로 욕했다. 감정에 휘둘리거나 마음을 내세워 일을 그르치지 않기로 나 자신과 이미 약속했거늘.
텔레스 전하가 필요하신 건 낭만에 휩쓸린 멍청이가 아니다. 사랑에 빠진 백치가 아니야.
그러니까 나는 오직 이분을 위해 마음을 잠그고, 누르고, 또 꺾어야 한다.
이분께 필요한 건 권력과 충성과 냉정이니, 연심 같은 게 아니다.
“한 곡 더 출래?”
그런데 가끔, 당신이 그런 눈으로 나를 보시며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원하시는 대로.”
때때로 내 약속조차 잊게 만들어.
한때 소년과 소녀였던 두 남녀는, 오늘도 조명 아래 춤을 추었다.
소년과 소녀가 있었다. 소년은 열 살, 소녀는 아홉 살. 한쪽은 후작의 아들이었고 한쪽은 황제의 딸이었다.
당시 황후는 이미 미래의 싸움에 대비해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마탑에 대한 후원을 대폭 늘려 마법사들의 지지를 공고히 하고 친정인 크레온 공작가를 앞세워 다른 귀족들을 포섭했다.
황비의 아들, 당시 열 살이던 블레논은 무럭무럭 크고 있었다.
황자는 총명하고 민첩하여 주위 사람들의 기대가 컸다. 가끔 아랫사람에게 난폭하게 굴어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지만.
황후는 반드시 자기 딸을 제위에 앉힐 예정이었다. 그 자리를 고작 첩의 자식에게 빼앗길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아들만 싸고도는 황제가 끔찍하게 싫어서 남편에게 이런 식으로 복수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황후는 황제를 사랑한 적 없었다. 연정 없는 정략혼이었다.
나중에 황비가 아들을 낳고 나서는 자식도 원한 적 없었다. 이제 와서 제게 아이가 생겼다가는 후계 구도가 꼬일 게 뻔하므로.
그런데 황비를 향해 그토록 사랑 타령을 입에 달고 살던 황제는 어느 밤 술김에 황후를 찾아오더니, 기어코 그녀를 임신시키고야 말았다.
“너는 반드시 황제가 될 거다.”
그 불쾌한 밤의 결과로 태어난 딸을 붙들고 황후는 집요하게 속삭였다. 그건 마치 주문과 같았다.
기왕 태어난 딸자식, 분명 의미가 있을 터. 황후는 이 나라의 권좌에 그 의미를 두었다.
“그건 원래부터 네 자리였어. 알겠니, 텔레스? 원래 마땅히 네 거야.”
“네, 알겠어요, 어머니.”
아직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어린아이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황후는 흡족하게 웃었다. 영민하고 용감하고 어여쁜 내 아이. 분명 훌륭한 군주가 될 것이다.
“그래, 너를 믿어.”
황후는 딸을 꼭 안아 주었다. 너를 믿어, 텔레스.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해 준 적은 없었다.
딸을 위해 미리 세력을 모으며 황후는 텔로아 후작과도 친분을 쌓았다. 후작은 영리하면서도 야망이 있었고, 마침 크레온 공작 부인과는 먼 친척이었다.
황후는 후작에게 황녀 또래의 아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황후는 소년을 소녀의 놀이 친구 삼아 종종 황궁을 들락거리도록 했다.
사실 그때부터 황후와 후작은 이미 두 아이가 나중에 부부가 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러면 황후는 든든한 아군을 얻고, 후작은 황족과 인척이 되는 거니까.
어른들의 그런 시커먼 속내와 상관없이 꼬마들은 서로 곧잘 어울렸다.
그때는 텔레스도 모리안도 각자 훨씬 순수하던 때였다. 정말, 정말 옛날이었다.
“훌쩍! 흑!”
“황녀 전하,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에요?”
어느 날, 소년은 소녀가 우는 모습을 발견했다. 항상 명랑하고 씩씩하던 소녀라 소년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소년은 가슴에 칼이 꽂힌 느낌이었다. 소녀가 슬퍼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 세상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폐하께서, 흑, 폐하께서 블레논 오빠랑만 놀아 줘. 나랑은 하나도 안 놀아 주면서.”
소녀는 훌쩍훌쩍 털어놓았다. 의외로 단순한 이유였다.
훗날 살벌한 사교계와 교활한 정계에서 찌들 만큼 찌들 황녀지만, 아홉 살 그때는 그녀도 아직 어린애였다.
“너무 속상해……. 나도 폐하랑 놀고 싶은데……. 흐앙.”
블레논 오빠 미워, 나쁜 놈, 나중에 돌에 걸려 넘어져라, 그런 유치한 욕설이 이어졌다. 그때만 해도 소녀는 황자를 오빠라고 불렀다.
“전하, 울지 마세요. 제가 전하랑 같이 놀아 드릴게요, 네? 우리 어제 하던 거 마저 끝내요.”
소년은 소녀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그는 퍽 다정했다. 옛날, 옛날이라서. 이제는 아득한 과거였다.
“흑, 훌쩍! 그래, 그러자.”
소녀는 애써 눈물을 그치며 손등으로 눈가를 쓱쓱 문질렀다. 소년도 손으로 소녀의 뺨을 닦았다. 말랑말랑한 감촉이 참 좋다고 그는 무심코 생각했다.
“있잖아, 사랑이란 감정은 참 나쁜 것 같아.”
“나빠요?”
“응. 폐하께선 맨날 오빠한테 사랑한다고 하시거든. 그런데 나랑 첼루나한테는 안 그러셔. 그건 불공평하잖아. 편애라고. 군주의 미덕이 아니야.”
소녀는 그 어린 나이부터 황후의 엄격한 감독 아래 정치를 비롯한 군주학을 꾸역꾸역 익혀야 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이해도 없이 여러 핵심 개념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
예컨대, 군주는 필시 공정해야 하며, 사사로운 정에 휘둘려 대의를 저버려선 안 된다는 개념.
소녀의 어린 머리에 선명히 각인된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중에 절대 한 사람만 사랑하지 않을 거야.”
소녀는 앳된 얼굴로 심각하게 다짐했고, 소년은 얼핏 심란한 눈빛을 지었다.
그는 잠시 손끝을 문질렀다. 거기 닿았던 말랑말랑한 감촉이 아직도 선했다.
“한 사람만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응! 나는 편애 같은 거 하지 않아. 온 백성을 다 공평하게 사랑할 거야. 그래야 훌륭한 황제가 된대.”
소녀는 병아리처럼 재잘댔고, 소년은 묵묵히 경청했다. 그러더니 어른스럽게 싱긋 웃으며 소녀의 손을 꼭 잡았다.
“제가 도울게요, 황녀 전하.”
손에 남은 뜨뜻하고 보드라운 감촉 따위, 그냥 지워 버렸다.
그건 그저 어릴 적의 일차원적 대화였다. 어린애들의 귀여운 약속일 뿐이니 그냥 잊어도 되지 않겠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지금, 모리안은 그때 소녀와 소년의 다짐에 엄청난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 그딴 건 그저 신체의 농간이고 감정의 혼란이다. 차라리 욕정이라고 둘러대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만약 정말 이 세상에 지고지순한 사랑이 있더라도, 그조차 영원할 수는 없다. 막상 인간이라는 존재가 영원할 수 없으므로.
황비를 사랑한다면서 황후와 동침해 딸을 낳은 황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륜을 저지른 후작.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라는데, 딸을 학대하고 냉대하는 아비까지.
전부 부질없었다. 고결한 사랑 같은 건 없었다.
아들에게만 쏠린 황제의 뒤틀린 부성애는 잔인했고, 텔로아 후작의 과거 연인을 향한 ‘사랑’은 법적 부인을 지옥에 몰아넣었다.
그 모든 걸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본 모리안은 스스로 맹세했다. 반드시 그 진창 같은 마음으로부터 황녀를 지키겠다고.
나는 그분께 오직 충신이 되리라. 내 마음을 무기 삼아 그분을 강압하지 않을 거야. 그게 그분을 진정 위하는 길일지니.
이따금 불쑥불쑥 치솟는 이기적인 충동은 황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감내하리라.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