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14)

모든 논란은 종결되었다.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정말로 첼루나 공주님과 데아론 텔로아가 연인 사이인가? 정치적인 연극은 아닌가? 둘이 서로 진심으로 좋아하는가? 그런 의문들.

이번에 데아론 텔로아의 구사일생은 모든 걸 명확하게 했다.

공주는 그의 실종 소식을 듣자마자 산송장이 되었다가 그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생기를 되찾았다.

이후, 두 사람은 평소에 각자 책임을 다하다가도 조금이라도 쉴 틈이 나면 서로 찰흙처럼 붙어 다녔다.

늦은 시각에 단둘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건 일상이었다.

서로 스칠 때마다 눈빛에 그득 담긴 녹진한 애정을 정말 연기로만 꾸며 낸 거라면, 두 사람은 각자 배우를 하는 게 적성에 맞았을 것이다.

텔레스 황녀가 외국으로 쫓겨난 뒤로 혹 성녀가 블레논 쪽으로 돌아설까 봐 노심초사했던 황녀 측 사람들은 조용히 한시름 놓았다.

황녀 전하의 기사이자 예비 시동생인 데아론 텔로아를 저렇게 아끼시는데, 공주님이 이제 와서 황자에게 돌아갈 일은 없다.

펠르만 백작 혼자 약간 시무룩했다. 그가 최근에 데아론 텔로아를 사윗감으로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미 황족이 점찍은 사람을 탐내는 정신 나간 귀족은 없을 터. 펠르만 백작은 침울한 심정으로 희망을 묵묵히 접어야 했다.

그리고 백작의 딸 루이사는.

‘진짜였구나. 둘이 연인이라는 거.’

첼루나 공주와 데아론 텔로아가 각별한 사이라는 소문은 그녀도 익히 들어 봤으나, 열여덟 삶에 이미 사교계 베테랑인 그녀는 확신을 경계했었다.

‘……그렇구나.’

더는 그 경계심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근거가 부족한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경솔함이고, 근거가 뚜렷한 사실을 애써 부정하는 건 아둔함이다. 루이사는 경솔하지도 아둔하지도 않았다.

루이사는 숙소에 혼자 앉아 낮게 한숨지었다. 바깥에는 청아한 달빛만 무정하게 고왔다.

루이사는 마지못해 인정해야 했다. 제 안에 몽글몽글 차오른 아쉬움의 실체를 냉정하게 직시하고 차곡차곡 정리하여 접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쩌면…….

‘어쩔 수 없지, 뭐.’

더 좋은 사내가 있을 거야. 루이사는 스스로 다독였다.

얼핏 스쳤던 풋사랑의 태동은 전생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지워졌다.

그녀의 겨울도 그렇게 지나갔다.

국경 너머 어느 왕궁에도 겨울빛이 가득했다.

<너는 반드시 황제가 될 거다.>

꿈속에서 여인은 아직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여자애를 붙들고 거듭 뇌까렸다. 아이는 그 의미도 모르면서 열심히 끄덕였다.

<그건 원래부터 네 자리였어. 알겠니, 텔레스? 원래 마땅히 네 거야.>

네, 알겠어요, 어머니. 반드시 황제가 될게요. 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일이니 반드시.

<그 역겨운 핏줄만 아니었다면.>

그 역겨운 핏줄은 슬프게도 내 오라비랍니다. 나온 태는 다르나 시작된 씨는 같은.

“헉.”

텔레스는 눈을 떴다. 어머니와 아버지, 이복 오빠가 차례로 튀어나오는 징그러운 악몽은 그렇게 끝이 났다.

창밖은 새카만 어둠이었다. 어느덧 한겨울이라 아침은 늦게 시작되고 밤은 너무 일찍 왔다.

“……아, 진짜.”

텔레스는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누워 끔뻑끔뻑 천장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짜증 냈다.

“뭐 이딴 개꿈을…….”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기분을 잡쳤다.

황녀는 한동안 깨어 있었다. 그녀는 뚱하게 어둠을 쏘아보다가 다시 억지로 눈을 붙였다.

이번에는 부디 아무 꿈도 안 꾸거나, 꾸더라도 좋은 꿈이기를 바라며.

차라리 네가 나오는 꿈이었으면 좋겠다. 현실의 네가 아닌 상상의 너, 부드럽고 다정하고 좀 더 잘 웃는 네가.

텔레스는 무심코 누군가를 그리다가, 스르르 잠들었다.

텔레스가 유학을 명목으로 이 나라에 도착한 지 반년이 넘었다. 그새 해가 바뀌어 그녀의 나이는 어느덧 스물셋이었다.

텔레스는 여기서도 인기가 좋았다. 제국 수도의 살벌한 사교계에서 거의 한평생 자신을 단련한 그녀였다.

텔레스는 때로는 쾌활하여 사랑스럽게, 때로는 우아하여 매혹적이게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강대국에서 온 황녀라는 사실도 그녀에게 유용한 후광을 더했다.

제국의 위세를 질투하여 숙덕대는 자들과 그녀가 황실 암투에 져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뒤에서 비웃는 자들도 그녀 앞에서만큼은 어떻게든 긍정적인 인상을 남기려 애썼다.

암투를 이겼든 졌든 어쨌든 황족이다. 나중에 제국의 내부 정세가 언제 또 뒤집혀 황녀가 본국으로 돌아갈지 아무도 몰랐다.

만약 황녀가 나중에 명예롭게 귀국하게 된다면 유학 시절 왕국에서 친하게 지낸 사람에게 뭐라도 콩고물 하나쯤은 떨어지지 않을까?

이 나라 귀족들과 왕족들은 그런 생각으로 하나둘씩 눈웃음을 치며 다가왔다.

오히려 여기서는 황자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 다들 접근 방식이 대범했다.

텔레스는 그들 모두를 살갑게 받아 주었다. 여기서 새 인맥을 쌓고 새 세력을 다지며, 조금씩 무뎌졌다.

아. 그냥 이대로 있으면 안 되나? 내가 꼭 돌아가야 하나? 내가 황제가 돼야 해?

만약 여기서 내가 영영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그저 적당히 안일하고 얌전하게 사교 활동이나 즐기며 산다면, 블레논도 나를 내버려 두겠지.

끝까지 싸운다면 둘 중 하나는 필시 죽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둘 중 한 명이 꼬리를 내리고 국외로 도피해 버린다면, 싸움의 끝은 훨씬 깔끔하리라.

‘편안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텔레스는 향유를 푼 목욕물에 몸을 담근 채 왕궁 객실의 호화로운 천장을 덤덤히 올려다보았다.

‘정말 편해. 그냥 이대로 있고 싶어…….’

돌아가기 싫어. 그리운 사람도 없어. 포렌타인이라는 나라 자체는 그립지만.

“가운을 가져와.”

텔레스가 손짓했다. 시녀들은 복종했다. 고국에서 데려온 사람들도 있었고, 왕국에서 새로 붙여 준 아이들도 있었다.

텔레스가 욕조에서 나왔다. 시녀들은 큼직한 수건으로 황녀의 몸을 닦고 보드라운 가운을 입혀 주었다.

텔레스는 머리칼이 젖은 채 욕실에서 침실로 이동했다.

모든 게 이토록 편안했다. 전과 달라진 생활도 별로 없었다.

영리하고 순종적인 시녀들과 목욕물, 옷시중, 값비싼 향유와 우아한 의복.

만약 자신이 막내로 태어났다면, 또는 후궁의 딸이었다면, 하다못해 오라비가 없었다면 평생 이런 삶을 살았을까 텔레스는 고민했다.

‘블레논이 없었어도 이러고 있지는 않았겠지. 내가 황후 소생에 첫째이기까지 했으면 당연히 차기 황제였을 테니까. 그러니까 차라리…….’

차라리 사랑받는 철부지 막내딸로 태어나 평생 머릿속이 꽃밭인 채로 살아갈 수 있었다면.

멍청할 정도로 순진해도 다들 오냐오냐해 주고 황권에 전혀 위협이 안 되며 무도회 드레스를 고르는 게 인생 최대 고민인 존재로.

첼루나 같은 막내는 비참하니까 사양이고, 블레논이 없었으면 지금쯤 머리 터지는 군주 수업을 받고 있었을 테니 그것도 사실 별로다.

황제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요즘은 그냥 그것도 지겨웠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권태기였다. 목숨 걸고 혈육과 싸운 끝에 찾아온 숨 막히는 권태기.

‘돌아가지 말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 생각을 했다.

“황녀 전하, 모두 끝났습니다.”

그 와중에도 시녀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화장품을 바르자 무도회에 어울리는 아리따운 숙녀가 거울 속에 나타났다.

텔레스는 무심히 자기 모습을 비춰 보았다. 인형처럼 예쁘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인형에게도 자아가 있었지만, 때로 텔레스는 그게 정말 자기 것인지 아니면 그것마저 주입된 건지 헷갈렸다.

“수고했다. 이제 가자.”

치장을 마친 인형이 돌아섰다. 불빛 속으로 나아갈 시간이었다.

예전에 자신이 고향에서 하던 일과 지겹도록 닮아 있었다.

해가 짧은 겨울에는 역시 각종 연회와 무도회가 주로 사교계의 유희를 이루었다.

늦은 시간까지 햇빛이 가득한 계절이라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밖으로 나가 다양한 놀이를 즐겼을 텐데, 어둠과 추위가 그들의 무대를 실내로 제한했다.

아직 겨울이 한창인 연초, 왕실은 어김없이 또 무도회를 열었다.

왕궁에 장기 손님으로 묵고 있는 텔레스 황녀와 그 약혼자도 언제나처럼 초대받았다.

모리안은 무도회장 입구에서 텔레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듯한 연미복 차림의 약혼자를 발견하자 텔레스는 새삼스레 속이 울렁거렸다.

“전하, 오늘도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모리안은 모범적인 인사와 함께 텔레스의 손을 잡고 정중히 입을 맞췄다.

여느 때와 같은 깍듯한 동작이 텔레스는 오늘따라 유독 버거웠다.

“그래.”

답변이 너무 짧게 나왔다. 모리안은 의아하여 황녀의 안색을 살폈다.

텔레스는 뒤늦게 제 부주의를 탓하며 그에게 아무렇지 않게 빙긋 웃어 주었다.

“이제 들어갈까?”

두 사람은 팔짱을 꼈고, 화려한 문을 통과해 마찬가지로 화려한 장소에 들어섰다.

이미 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공중에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귀족들이 다가와 두 남녀에게 인사했다. 그들의 감미로운 언어에 텔레스와 모리안은 각자 적절한 사교계 화법으로 대답했다.

몇몇 왕국 숙녀들은 아련한 기색을 겨우 감추며 모리안 주변을 맴돌았다.

준수하고 훤칠하며 과묵한 매력을 자랑하는 그가 하필이면 이미 임자가 있다는 게 썩 아쉬운 모양새였다.

‘하지 마, 너희가 아까워.’

텔레스는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과묵한 매력은 무슨. 그건 매력 빼고 그냥 과묵한 거다.

얼굴이 받쳐 주니 멀리서 보면 멋있지만 막상 매일 곁에서 겪으면 그만큼 지치는 일이 또 없었다.

그나마 모리안이 이런 사교 모임에서조차 침묵을 고수하지 않는 건 그의 뚜렷한 장점이었다.

사실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유려한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작자였다.

왜냐하면, 사교계에서는 대화조차 정치니까. 공과 사를 무섭도록 철저하게 구분하는 그였다.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얼마든지 매력적인 모습을 꾸밀 수 있지만, 정작 소중한 사람과 단둘이 남았을 때 제 속마음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 사람.

아니, 어쩌면 그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내가 그의 소중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지. 텔레스는 쓴웃음을 삼켰다.

“전하, 춤추시겠습니까?”

웬만한 사람과 다 돌아가며 인사하고 나자 모리안이 나지막이 여쭈었다. 텔레스는 여상히 끄덕였다.

“좋아.”

남녀는 손을 잡고 무대로 나아갔다. 은은한 조명이 머리 위로 쏟아져 각자 얼굴을 빛으로 덧칠했다.

텔레스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눈이 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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