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제가 무사한 건 공주님 덕분일지도 몰라요.”
“뭐?”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 것치고는 정말 거의 하나도 안 다친 수준이거든요. 어쩌면 성녀님의 가호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데아론은 짐짓 농담처럼 밝게 말했지만 첼루나는 흠칫 굳었다. 데아론이 그 짧은 경직을 미처 잡아내기 전, 첼루나는 곧 싱긋 웃었다.
“그래, 그럼 내 존재가 그대에겐 축복이구나.”
아니야. 나는 네게 축복 같은 게 아닐 거야. 이번에 너를 지킨 기적의 힘은 아마도 오히려…….
‘네 어머니가.’
첼루나는 달빛을 받아 흐리게 반짝이는 금목걸이를 흘깃했다. 데아론은 전쟁터에서도 모친의 유품을 벗지 않았다.
“그렇다니까요.”
데아론은 기쁘게 수긍했다. 이어, 기쁨의 육체적 표현을 위해 첼루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맨살이 맞닿는 순간, 시공간이 흐릿해졌다. 선명한 건 오직 서로의 체온과 숨소리, 치아를 스치는 혀와 옅은 신음뿐이었다.
두 사람은 최소 몇 년을 헤어져 있던 사람들처럼 뜨겁게 키스했다. 실제로 무려 반년 만의 재회이긴 했다.
상봉의 애틋함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거치고 나자 더더욱 짙어졌다.
데아론은 본인이 죽을 뻔했고, 첼루나는 연인의 죽음을 겪을 뻔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죽음이라는 미지의 종착 또는 관문보다도 서로 영영 이별할 뻔했다는 사실이 가장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이제야 그들은 오롯이 함께했다. 달빛 아래 서로 끌어안는 동작이 절절했다.
그리고 두 쌍의 입술은 깊게, 더 깊게 상대방의 숨결을 당기고 삼켰다.
“하아.”
첼루나가 먼저 신음했다. 데아론이 목에 입을 맞추는 틈에 그녀는 간신히 숨 쉴 기회를 얻었다.
“저기, 음, 데아론. 잠깐만.”
그녀는 겨우 이성을 붙들고 헐떡였다. 상대방은 환자고 자기도 정신을 잃었었다는 사실을 억지로 상기해야 했다.
“그대 지금 발목도 다쳤잖아. 격한 움직임은 삼가야 한다며?”
“키스만 하는 건데 뭐 어때요. 아니면 뭐, 다른 거라도 하고 싶으신가요?”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데아론이 엉큼하게 되묻자 첼루나는 불퉁하게 경고했다. 데아론이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공주님. 저도 이 방음 안 되는 천막에서 뭘 더 해 보려는 생각은 없어요.”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첼루나는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데아론이 다시 입을 맞추자 더는 시무룩하게 있을 겨를도 없었다.
“공주님, 사랑해요.”
오랜 애무 끝에 데아론이 속삭였다. 첼루나는 숨을 삼켰다.
황금빛 눈과 제비꽃색 눈이 어둠을 가르고 만났다. 색깔이 한데 엉킬 때, 첼루나는 환희로운 전율에 잠겼다.
“겨우겨우 살아서 진영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생각만 했어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통해서만 삶을 더욱 아끼게 되는 우리 인간은 참으로 우습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유한한 삶을 받았는지도 모르지. 그만큼 더 치열하게, 더 솔직하게 살아가라고.
“살아서 다시 만나면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좋아한다고는 말해 봤다. 입을 맞추고 손을 포개고 달콤한 체온을 나눠 봤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고백은, 이번 생에 처음이었다.
첼루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데아론이 닦아 주지도 못할 만큼 흥건했다
“나도 사랑해, 데아론.”
이 고백을 네게 다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과거로 거슬러 무려 5년을 기다렸어.
“데아론, 부탁 하나만 들어줘.”
이번 생에는 네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평생 짝사랑으로 끝날까 봐 어찌나 두렵던지.
“날 이름으로 불러 봐.”
하지만 이번 생에도 어김없이, 너는 나의 빛이자 온기야.
“이름으로 불러 줘, 데아론.”
데아론은 어찌 감히 제가 황족의 본명을 입에 담겠냐며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저 짧고 굵게, 스스로 결심한 대로 솔직하게 그녀를 보며 불렀다.
“첼루나.”
다른 누구도 듣지 않을 때 혼자 속삭이던 이름이었다. 이렇게 허락을 받고 당당하게 부를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사랑해요, 첼루나.”
그리고 그 기쁨은 그의 연인까지 아울렀다.
“나도 사랑해, 데아론.”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입을 맞췄다.
몸과 마음, 웃음과 언어로 연인들은 재회를 완성했다.
데아론은 빠르게 회복했다. 그래도 첼루나가 데아론보다 빨랐다.
첼루나야 못 먹고 못 마시고 못 쉰 탓에 얻은 병이니, 며칠 식사와 수면을 제대로 챙기고 나자 무기력증과 두통은 금세 가셨다.
연인들은 서로 직접 간호하길 원했다. 군의관이 엄중한 태도로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들의 뜻대로 됐을 것이다.
각자 환자인 주제에 무슨 정신머리로 상대방을 간호하겠다는 거냐고, 제발 자기 몸 회복하는 데나 집중하시라고 군의관은 황족 모독을 불사하는 태도로 바락바락 간언했다.
만약 블레논이나 텔레스였다면 불쾌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첼루나는 제게 불손하기까지 한 군의관이 퍽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환자를 향한 책임감은 넘쳐 나는 이였다.
발목을 삔 연인을 돌보는 것 외에도 어차피 할 일은 많았다. 첼루나는 자신이 애초에 이곳에 온 명분을 망각하지 않았다.
연인에게 정신이 팔려 공주이자 성녀로서 책무를 다하지 않는 불성실한 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평판은 곧 황녀와 데아론의 평판과도 직결되므로 첼루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사제들을 도와 보급품 분배에 힘썼고 토벌대 사람들을 격려하는 역할을 했다.
토벌대에는 귀족 기사들 외에도 이번 일을 위해 징집되거나 자원한 평민 병사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성녀님 및 공주님은 까마득히 높은 분이셨으며, 그런 분이 직접 찾아오셨다는 건 황실이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첼루나의 사랑스러운 외모와 감탄스러운 연기력은 금상첨화였다.
천사처럼 생긴 공주님이 제게 상냥하게 웃으며 격려의 말을 건네면 웬만한 병사는 완벽하게 정복당했다.
“맘에 안 듭니다.”
“뭐가?”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웃어 주지 마십시오. 그, 뭐랄까, 좀 덜 반짝반짝하게 웃으세요.”
“푸핫! 반짝반짝하게 웃는 게 어떤 건데?”
“그건 공주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걱정하지 마, 데아론. 내가 어떻게 웃든 다 네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거야. 네 눈엔 콩깍지가 단단히 쓰였잖니.”
“콩깍지 아닙니다만? 그런 거 없이도 당신은 충분히…….”
“충분히, 뭐?”
“……충분히, 크흠! 아름답다고요.”
질투로 투덜대던 연인이 새삼스레 쑥스러워하자 첼루나는 샘물처럼 맑게 웃으며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그녀가 데아론의 코앞에 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는 얼굴을 딸기색으로 붉혔다.
“그 아름다운 얼굴 실컷 봐. 너한테만 특별히 허락할게.”
“그럼요, 저한테만 허락하셔야죠. 다른 사람한테는 안 됩니다.”
“평소에 얼굴에 가면이라도 쓰고 다닐까?”
“제가 하라고 하면 정말 하실 거예요?”
“만약에 너도 똑같이 하겠다고 하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경쟁자가 없는걸요.”
“글쎄, 그건 네 생각이고.”
첼루나의 음성이 문득 스산해졌다. 데아론은 무의식중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골똘하던 첼루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글방글 웃으며 연인에게 한결 가까이 다가왔다.
“경쟁자가 있든 없든 너는 내 거야, 그렇지?”
그녀가 속닥였다. 입술이 맞닿았다. 데아론은 맞는 말이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눈을 감고 입술을 열어 그녀를 받아들였다.
“나도 네 거고. 오직 너만이 나를 가졌어.”
고백이 이어졌다. 데아론은 키스만으로 갈증을 충족하지 못해 첼루나의 허리를 와락 안고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옷 너머로 뜨거운 육체가 느껴졌다.
“평생의 영광입니다.”
데아론이 헐떡였다. 첼루나는 옅게 웃었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느 쪽이 더 큰 영광을 누리는 건지는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첼루나는 굳이 부연하지 않으며 연인의 숨결을 한층 덥게 삼켰다.
서부에서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두 사람의 관계는 서서히 변화했다.
이제 첼루나는 데아론을 ‘그대’가 아닌 ‘너’로 불렀고, 단둘이 있을 때 데아론이 첼루나의 이름을 부르는 때가 잦아졌다.
서로 만지는 수위도 점점 대범해졌다. 사랑하는 마음도 매일 최고치를 찍었다.
이보다 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질 정도로 애틋하게 사랑하다가, 다음 날이 되면 또다시 기록을 경신하는 그런 삶을 그들은 살았다.
이제 데아론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 마음을 고작 한때의 풋사랑쯤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고.
이전까지 데아론은 때때로 의심과 불안에 흔들릴 때가 있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향한 불안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의심했었다.
이런 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고작 열일곱 살, 열여덟 살 어린애들의 관계를 두고 거창한 미래를 꿈꿀 수 있나?
앞으로 평생 공주님이 자기 곁에 있을 것 같다가도, 자신이 그분과 연애를 시작한 지 기껏해야 1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불확실성에 숨이 막혔다.
이제 그는 모든 불안을 극복했다. 어리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자신의 진심을 의심하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삶이다. 이번에 마력 폭주 때문에 문자 그대로 죽을 뻔하면서 그는 그 진리를 뼈저리게 깨우쳤다.
철없는 어린애들의 불장난이라고 비웃어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공주님을 알아 온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도 더는 무의미했다.
데아론은 그저 제게 주어진 바로 이 순간 첼루나를 사랑하길 원했다. 그는 스스로 제 소원에 충실했다.
“데아론.”
“네?”
첼루나 또한 이번에 데아론을 두 번째로 잃을 뻔하면서 느낀 바가 컸다.
한 번의 죽음으로도 끔찍했는데, 또다시 이별을 강요받는다면 그녀는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사랑해.”
그러니까 그녀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데아론을 지킬 예정이었다.
“사랑해, 데아론.”
“저도요, 첼루나.”
다시는 전생의 그날처럼, 그리고 몇 주 전 그때처럼 심장이 산 채로 뜯겨 나가는 듯한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
잠깐의 시간을 훔쳐 낸 그들은 어둠 속에서 키스했다. 이번에도 그들을 훔쳐보는 이는 밤하늘의 달빛뿐이었다.
그들의 겨울은 그렇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