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14)

엘리나는 부르르 떨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대략 5년 전, 공주님이 갑자기 철들어 성품이 유순해지시기 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죽어도 자기 뜻을 굽힐 줄 모르던 성난 살쾡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 그럼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엘리나는 떠듬떠듬 고했다. 첼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공허함을 잊고 활활 불타느라 바빴다.

절망 대신 집념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서부로 가서 데아론을 찾아야 했다. 그가 정녕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만약 죽었다면, 시체라도 찾아야 했다.

전생보다 무려 5년을 더 일찍 죽은 연인의 시체를 마주한다면, 아, 나도 그냥 죽어 버려야지.

나도 너를 따라 그냥 죽을게. 신비한 힘으로 과분하게 얻은 두 번째 삶조차 이렇게 낭비해 버린 죗값으로.

이번 생에는 너를 지키겠노라 맹세했는데, 나는 그 약속을 어겼어.

첼루나는 자신이 서부에 도착할 날을 조급하게 기다렸다. 잠드는 시간도 먹고 마시는 시간도 전부 아까워서, 그냥 그런 것들을 아예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데아론을 따라 죽는다면 하등 쓸모없을 일들이었다.

그녀는 사형수나 다름없었다.

진영은 엉망진창이었다. 한쪽에는 부상자들의 신음이 가득했고 한쪽에는 죽음의 악취가 만연했다.

멀쩡히 살아남은 자들은 다친 이를 치료하고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제대로 장례를 치르려면 좀 더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산 사람끼리 챙기느라 바빴다.

토벌대의 지휘관은 실종자를 찾고자 수색대를 꾸리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별다른 희망은 없었다.

데아론 텔로아는 너무 높은 곳에서 너무 빠르게, 가파르게 떨어졌다.

만약 즉각 낙사하지 않았다면 중상을 입어 지금쯤 죽어 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만약 그 젊은 기사가 멀쩡히 숨이 붙어 복귀하려면 최소한 기적이 필요하다고 지휘관은 암울하게 생각했다.

“지휘관님, 데아론 텔로아 경을 찾았습니다!”

“뭐라고?”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다. 노장은 안도와 놀라움으로 탄식했다.

“발목을 다쳤으나 그 외에는 대체로 무사합니다. 떨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다쳤을지도 모르니 진료가 필요하다고 군의관이 말했습니다.”

“하, 세상에.”

지휘관은 즐거우면서도 떨떨하여 다시 헛숨을 뱉었다.

그 소년에겐 정말로 신의 가호라도 함께하는 걸까? 성녀를 연인으로 뒀더니 그 축복이 그에게도 옮겨붙었나 보다.

화제의 그 성녀는 지금 먹지도 마시지도 잠들지도 않고 여기로 오는 중이었다. 목적지까지는 딱 하루가 남았다.

데아론 텔로아가 만신창이 상태로 진영에 복귀한 바로 다음 날, 보급품이 도착했다.

데아론은 한동안 가만히 누워만 있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함부로 돌아다녔다간 영영 발목을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군의관은 근엄하게 훈계했다.

그러나 이 활동적인 소년이 정말로 종일 누워만 있는 걸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침상에 일어나 앉음으로써 군의관과 타협했다.

누워 있든 앉아 있든 병상에 거의 감금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데아론은 성마른 마음에 허공을 툭 차려다가 제 발목이 어떤 상태인지 상기하고 애써 참았다.

‘거의 다 왔으려나.’

데아론은 입술을 씹으며 시간을 가늠했다. 어제 겨우 살아서 진영에 복귀한 그는 비몽사몽간에 첼루나 공주님이 이곳에 오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오늘 도착이라고 했는데…….’

자신의 실종 소식이 이미 공주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듣고 그는 경악했다.

아니, 전령을 왜 그렇게 빨리 보낸 거야? 물론 전령은 원래 신속하게 보내는 게 맞지만.

그래도 며칠만 더 기다렸으면, 공주님이 그런 끔찍한 소식을 듣지 않아도 됐을 텐데.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야.’

데아론은 깊이 안도했다.

당연히 죽는 것보다 사는 게 좋다는 그런 본능적인 이유 외에도 그는 첼루나를 위해 매 순간 생존을 바랐다. 자신이 그녀의 고통이 되는 걸 견딜 수 없었다.

만약, 정말 만약에, 언젠가 공주의 마음이 식어 자신이 죽든 살든 그녀가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된다면. 그때는 죽음이 이렇게까지 두렵고 괴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순간,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데아론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는 공주의 일행이 도착했음을 직감했다.

그는 군의관의 엄중한 충고를 무시하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주님, 환자는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천막 문 너머 군의관이 애처롭게 절규했다. 데아론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는 조급한 걸음을 내디뎠다가 발목이 찌르르 울리자 미간을 확 찡그리며 주춤했다.

바로 그때, 천막 문이 열렸다.

“……데아론.”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보였다.

“공주님.”

그는 한숨짓듯 화답했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탁 트이는 것 같아서, 물리적인 안도감에 사르르 나오는 한숨이었다.

한편, 그의 발목은 한계에 다다랐다. 데아론의 몸이 뒤로 풀썩 꺾였다.

침대에 애처럼 주저앉은 그는 창피함에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첼루나는 그를 비웃지 않았다.

첼루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상대방을 와락 끌어안을 것처럼 팔이 떨렸다.

그녀는 데아론이 환자라는 사실을 가까스로 상기하고 그의 앞에 우뚝 멈췄다.

“데아론.”

첼루나는 아득하게 속삭였다.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고 묻고 싶은 것도 산더미인데, 지금은 일단 그의 이름을 되뇌며 이 기적을 멍하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었어요.”

데아론은 단숨에 말했다. 그는 공주의 손을 감싸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비록 전투로 거칠어진 손이지만, 공주가 진저리치며 뿌리치지 않을 것임을 그는 알았다.

첼루나는 데아론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눈앞이 문득 샛노래졌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첼루나의 몸도 풀썩 꺾였다. 며칠 내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강행군을 감행한 결과였다.

“공주님?!”

데아론은 경악했다. 그는 너덜너덜하게 무너진 연인의 몸이 땅과 부딪치기 전에 양팔로 덥석 받았다.

첼루나는 연인의 품에서 까무러쳤다. 여러모로 극적인 재회였다.

긴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꿈.

<사랑해.>

죽어 가는 연인의 가장 중요한 고백, 약속, 유언.

첼루나는 식은땀에 젖어 눈을 번쩍 떴다. 아직도 숲속의 피비린내와 식어 가는 체온이 생생한 악몽으로 그녀를 짓눌렀다. 영원히 깨지 않을 것처럼.

“깼어요?”

하지만 사실, 그녀는 이미 깬 뒤였다.

첼루나는 다정한 저음을 듣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어, 자신이 누구와 어떤 자세로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지 깨닫고 얼굴이 빨개졌다.

“뭐, 뭐, 뭐야?”

별로 감동적인 첫인사는 아니었다. 데아론은 실망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연한 달빛이 천장 너머로 하늘을 물들였다.

“뭘 그렇게 쑥스러워해요, 우리 사이에.”

“아니, 뭐, 그……. 여기 어디야. 우리 왜 여기 있어?”

“공주님께서 쓰러지신 뒤 군의관이 공주님을 침대로 옮겼어요. 저는 계속 간호 중이었고요.”

“간호를 환자 옆에 누워서 했나?”

“그럼 안 되나요?”

냉큼 되묻는 연인의 태도가 퍽 능글맞아서 첼루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얘는 뭐야? 언제부터 이렇게 됐어?

“못 본 사이 꽤 뻔뻔해진 것 같은데.”

“그래서 싫으신가요?”

“전혀.”

“그럼 됐어요.”

“내 수줍고 귀여운 데아론 어디 갔어. 내 연인 돌려줘.”

“죄송합니다, 공주님. 하지만 당분간 저로 만족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데아론은 끝까지 능청스러웠다. 그의 눈매가 어둠 속에서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토록 매혹적으로 웃는 와중에도 그의 얼굴에는 앳된 티가 남아 있었다.

첼루나는 어른스럽고도 소년 같은 그를 갈급한 마음으로 낱낱이 뜯어보았다.

“그대가 죽은 줄 알았어.”

그녀가 속삭였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죄송합니다. 걱정시키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가 우울하게 사죄했다. 첼루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대가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는 건 알아. 세상에 누가 일부러 스스로를 그런 위험에 빠트렸겠어.”

실제로 데아론 때문에 내내 피가 마르는 줄 알았지만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첼루나는 오히려 자신을 탓했다.

“오히려 내가 미안해.”

그녀가 중얼댔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왜 공주님이 사과하세요.”

데아론은 의아하고 못마땅하여 눈살을 찌푸렸다.

첼루나는 입술을 씹었다. 회귀에 대한 진실을 털어놓을 길이 없는 그녀는 어설프게 둘러댔다.

“그냥, 그대에게 더 잘해 주지 못했던 것 같아서.”

임시방편으로 지어낸 변명이었지만 동시에 사실이기도 했다.

데아론에게는 주고 또 줘도 모자랐다. 매번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그대에게 주지 못한 게 이렇게나 많이 남았는데 만약 그대가 잘못됐다면, 그러면…….”

첼루나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눈가에 물기가 맺혀 쏟아질 위기에 처했다.

데아론은 그 물기를 손으로 닦고 젖은 부위에 입을 맞췄다. 첼루나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뭐가 그리 많이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기대할게요.”

데아론은 빙긋 웃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고 따스했다. 첼루나는 저 맑은 보랏빛 열기에 풍덩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미 당신께 받은 게 너무 많아서 더는 못 받게 됐더라도 후회는 없었을 거예요. 아쉬움은 남았겠지만.”

“나한테 뭘 그리 많이 받았다고 그래.”

첼루나는 힘없이 푸념했다. 데아론은 웃는 모습 그대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심장이 파르르 전율했다.

“웃어 주고. 같이 있어 주고. 외롭지 않게 해 주셨잖아요.”

데아론은 조곤조곤 나열했다. 그는 습관처럼 첼루나의 붉은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한 가닥 잔머리를 손끝으로 만지작댔다.

“그건 내가 그대한테 할 말이야.”

첼루나가 속삭였다. 그녀는 조심히 손을 뻗어 데아론의 뺨을 어루만졌다. 까슬까슬한 붕대의 감촉이 서럽게 다가왔다.

“많이 다쳤어?”

“그냥 여기저기 긁히고 부딪쳤어요. 발목은 삐었는데, 당분간 돌아다니지 않으면 곧 아물 거래요.”

“다행이야. 내 말은, 그대가 다친 게 다행이라는 게 아니라, 더 심하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정말, 그대가 어떻게 된 줄 알고…….”

“제 잘못이 아니라고 이미 말씀해 주셨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사과해요.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공주님. 당신의 아픔을 바란 적 없어요.”

“괜찮아, 정말로. 그대가 무사하니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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