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14)

보급품을 전달하는 인원이 확정되었다. 전생에서와 마찬가지로, 루이사 펠르만도 포함이었다. 첼루나가 동행을 원했던 또 다른 주된 이유였다.

전생에도 루이사 펠르만은 이번과 마찬가지로 마수 토벌을 떠난 자기 부친을 직접 뵙고자 서부로 떠났다.

거기서 루이사는 데아론을 만났다.

그전까지는 후작가의 천덕꾸러기 사생아와 제대로 대화할 기회도 없던 그녀는 그와 본격적으로 접점이 생겼다.

그때쯤 데아론은 이미 기사로서 두각을 드러내 전에 없던 호의적인 관심의 대상이었고, 루이사 역시 그에게 흥미를 느꼈다.

데아론이 여러 차례 자기 부친을 구했다는 사실을 듣자 루이사의 흥미에는 호감이 더해졌다. 호감은 종국에 더욱 깊은 마음이 되었다.

잘생기고 다정한 데아론. 마수 토벌을 통해 영웅이 된 데아론. 그런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건 당연하다고 첼루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물론, 전생에 데아론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루이사는 짝사랑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으레 그렇듯, 첼루나는 불안을 느꼈다.

‘데아론을 믿어. 그 애는 믿는데, 그래도…….’

기실 부족한 건 연인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였다.

첼루나는 여전히 데아론이 제게 과분하다고 믿었다. 고작 자기 같은 게 그의 마음을 영영 붙들어 둘 수는 없다고 여겼다.

전생에 무려 6년을 서로 사랑했지만, 그게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데아론이 죽지 않고 계속 살았더라면 그가 먼저 질렸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식어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살면서 이별쯤이야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이번 생에 데아론이 천수를 누린다면, 언젠가 그의 곁에 서는 사람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그건 싫어.’

끔찍하게 싫었다. 그러나 스물세 살 이후의 미래를 전혀 장담할 수 없는 첼루나는 단지 싫다는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실 스물세 살 이전의 미래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전생의 기억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게 달라졌으니까.

“잠깐 멈추십시오! 서부, 서부에서 전언이 왔습니다.”

예컨대, 지금 서쪽에서 허겁지겁 말을 몰고 나타나 공주의 일행 앞을 가로막은 전령은.

“그게, 그것이, 토벌 중에 마력 폭주가 터졌습니다.”

숨이 차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믿기지 않는 말을 하고 있었다.

“대형 마수가 여럿 날뛰는 바람에 사상자 수가 폭등한 상태입니다. 그중 텔로아 후작님의 아드님께서…….”

이건 분명 전생과 다른 점이었다.

“데아론 경이?”

첼루나는 비명처럼 되물었다. 그녀는 거칠게 고삐를 당겨 나머지 일행을 앞질렀다.

순식간에 가장 선두에 선 그녀는 전령을 절박하게 직시했다. 희게 질린 손등이 파들파들 떨렸다.

“계속 말해. 그자가 뭐?”

그녀는 사납게 다그쳤다. 속은 자꾸만 수천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졌다. 데아론, 안 돼, 데아론, 제발, 데아론, 아.

“데아론 경이, 실종되셨는데.”

전령이 떠듬떠듬 아뢰었다. 그는 공주의 시선 앞에서 저도 모르게 움츠렸다. 그때는 마치 활짝 열린 지옥문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폭주 당시 무너진 벼랑 아래로 떨어지셔서,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사실상 죽었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지옥문이 열렸고, 첼루나는 삼켜졌다.

첼루나는 전생의 마력 폭주를 기억했다. 이따금 체내에 마력이 과다한 마수들은 그렇게 위험한 상태로 진입하곤 한다.

하지만 전생에 서부에서 마수들이 폭주했을 때, 데아론은 그곳에 없었다. 이번 생에 그는 과거보다 약 1년 일찍 서부로 떠났으니까. 사건의 흐름은 이미 달라졌다.

그리고 애초에 변수는 누구였더라.

‘내 탓이야.’

머릿속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마음속에 핏물이 고였다가 눈물처럼 쏟아졌다. 숨이 막혀 눈앞이 새하얬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나 때문에.’

이렇게 괴로울 거면 차라리 자신이 죽고 데아론이 대신 살았으면 했다.

‘또, 나 때문에…….’

전생에도 이번에도, 전부 나 때문에.

첼루나는 연인의 식어 가던 몸을 떠올렸다.

누군가 그녀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남자 잡아먹는 년, 불길한 계집. 기억 안 나?

전생에 너랑 결혼할 뻔했던 그 늙은 귀족도 죽었잖아.

그리고 네 연인도 죽었어. 너를 대신해, 네 품에서.

네 어미도 너를 낳다 죽었지.

이번에도 네 탓이야.

첼루나 역시 벼랑에서 굴렀다. 아래로, 더 아래로.

그 밑은 계속해서 암흑이었다.

긴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꿈.

<네 운명에는 사랑이 있단다, 데아론. 내 소중한 아들.>

그리운 이가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너는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죽을 거야.>

누군가 그의 귓가에 속닥이는 듯도 했다.

데아론은 눈을 떴다. 온몸이 욱신욱신 아팠다. 데아론은 추위와 근육통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조심히 일어나 앉았다.

‘여기는…….’

데아론은 주위를 둘러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자기가 어쩌다 이 어둡고 축축한 숲길에 버려지게 됐더라.

날뛰던 마수들과 지면의 붕괴, 그리고 한없이 아래로 꺼지던 느낌이 떠올랐다.

‘돌아가야 해.’

당연하고 신속한 결론이었다. 데아론은 또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 앉는 것만으로도 통증이었는데, 아예 걸으려 하자 뼈마디가 항의하듯 지끈댔다.

“윽.”

데아론은 움찔했다. 발목을 삐었나? 그는 몸을 숙여 발목을 조심히 더듬었다. 살갗만 스쳐도 불에 덴 듯 아픈 느낌이 범상치 않았다.

기사 훈련의 기본이 체력 단련뿐만 아니라 응급 처치 숙달이라는 점에서 데아론은 오늘 운이 좋았다.

그는 옷을 찢어 붕대를 만들고 나뭇가지를 주워 그럴싸한 부목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제 검을 지팡이 삼아 어색한 걸음을 옮겼다.

절뚝절뚝 걷는 모양이 별로 멋있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품위를 따지기엔 그가 너무 현실적인 성격이었다.

데아론은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갔다. 오직 한 사람의 얼굴을 머릿속에 지표 삼아.

‘걱정하실 텐데.’

첼루나 공주님. 데아론은 그녀가 직접 서부에 오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러나 자신이 실종 처리된다면 그 소식이 반드시 수도에 닿을 거라고는 예측했다.

얼마나 놀라실까. 시체가 발견되지는 않았으니 사망이 아닌 실종으로 알려지겠지만, 사실 그것도 듣는 쪽의 피를 말리기는 매한가진데.

한시바삐 동료들을 찾아 자신의 생존 사실을 격렬하게 입증하고 싶었다.

하필 발목을 다쳤다는 사실이 한스러웠다. 만약 팔목이 대신 다쳤다면, 통증을 감내하며 뛰어갔을 텐데.

‘……그분들은 걱정하시려나?’

문득, 실없는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내 아버지와 형은 걱정하실까? 그리고 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이 뒤늦게 덧붙여질 때, 기뻐하실까?

후작 부인의 반응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데아론은 자신의 일시적 실종이 사망이 아닌 생존으로 끝난 것에 대해 부인이 꽤 실망할 거라고 건조하게 생각했다.

‘걱정하시긴 하겠지.’

데아론은 심드렁하게 판단했다. 후작 부인과 달리 그들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을 것쯤은 알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감동이 샘솟는 일은 없었다.

그분들을 아버지 취급하고 형 취급하는 것만으로도 데아론은 자신이 마땅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마음 상태까지 일일이 살피기에는 여태 받은 상처가 너무 깊었다.

결국 첼루나뿐이었다. 그는 연인을 생각하며 꿋꿋이 이동했다.

그의 목덜미에는 엄마가 물려준 금목걸이가 반짝였다. 토벌 중에도 항상 차고 다니는 유품이었다.

그가 기절한 사이 연신 진동하던 목걸이는 언제 그리 시끄러웠냐는 듯, 다시 조용했다.

전령의 얘기를 듣고 보급품 전달자들은 이동 속도를 높였다.

마력 폭주 때문에 사상자가 생겼으니 구호물자의 공급이 더욱 시급해졌다.

몇몇은 무리를 반으로 갈라 한쪽은 최대한 빨리 서부로 향하고 나머지는 공주님을 모시며 조금 천천히 가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만큼 첼루나는 고장 난 상태였다. 데아론 텔로아의 실종 소식을 들은 뒤로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죽음 같은 침묵에 잠겼다. 먹고 마시거나 심지어 잠드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첼루나 공주와 데아론 텔로아가 연인 사이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깊은 마음인 줄 몰랐던 사제들과 기사들은 당황했다.

원래 황족들과 귀족들의 연애란 문란하지 않은 선 내에서 그 상대가 시시때때로 휙휙 바뀌는 얄팍한 성질이었다.

어차피 나중에는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져 정략결혼을 해야 할 운명이니 연애만이라도 맘대로 하자, 뭐 이런 풍조였다.

공주와 후작의 아들이 애인 관계이긴 했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갈지 사람들은 장담할 수 없었다.

공주가 그저 황녀를 향한 자신의 지지를 입증하기 위해 황녀의 기사와 사이좋은 관계를 연기하는 거라고 추론하는 자들도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딱 거기까지인 관계였다. 첼루나도 그걸 알고 여태 철저하게 연기했다.

데아론과 단둘이 있을 때는 제 진심을 마음껏 보였지만, 남들 앞에서는 눈짓 하나 단어 하나 조심스러운 그녀였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무너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조차 관조하는 태도를 보일 만큼 그녀가 냉혈한은 아니었다.

아니, 설령 냉혈한이었더라도 오직 데아론 한정 모든 게 예외였기에, 그의 실종 소식을 듣는 순간 그녀의 세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마음속에 저주처럼 눌어붙은 자책이 그녀의 숨통을 더욱 옥죄었다.

“저기, 공주님.”

누군가 옆에서 조심스레 불렀다. 엘리나였다. 공주는 시녀를 텅 빈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방금 루이사 펠르만 양께 얘기 들었습니다. 인원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계속 서부로 가고 나머지는 여기 남아 공주님을 돌본다고…….”

“남아? 여기에?”

“네, 공주님. 남아서 공주님을 돌볼 겁니다. 천천히 휴식하시고 부디 뭐라도 좀 드셔 보세요.”

“아니, 아니야. 그럴 수 없어…….”

“공주님.”

“그럴 수 없어. 나도 갈 거야. 남긴 누가 남아. 나도 서부로 가야 해.”

텅 비었던 첼루나의 눈에 불꽃이 되살아났다. 엘리나는 애타게 입을 열었다. 그 누가 보기에도 공주는 현재 먼 길을 이동할 상태가 아니었다.

“엘리나.”

시녀가 미처 운을 떼기도 전에 첼루나는 고압적으로 내뱉었다. 엘리나는 움찔했다.

“나도 서부로 갈 거야.”

첼루나의 눈은 황금으로 불탔다. 절박함을 넘어 포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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