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14)

“궁수들, 사격!”

데아론이 마수의 시력을 효과적으로 마비시키자 궁수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시위를 당겼다. 강화 마법으로 더욱 튼튼해진 화살촉은 두꺼운 살가죽을 손쉽게 뚫었다.

마수는 마지막으로 괴성을 질렸고, 언덕이 무너지듯 와장창 붕괴했다.

“데아론, 데아론! 괜찮아?”

“으엑, 욱. 냄새 역해.”

마수의 거무튀튀한 피가 강처럼 철철 흐르자 데아론은 코를 막으며 비틀비틀 물러났다. 허둥지둥 달려왔던 그의 동료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 자식, 그게 다야? 냄새가 역한 거?”

데아론 텔로아는 평민 출신 사생아라는 점과 나이가 새파랗게 어리다는 이유로 토벌 시작 때까지만 해도 은근히 무시당했다.

그에 대한 여론은 막상 사냥이 시작되자 완벽하게 뒤집혔다. 실력을 중시하는 기사들에게 그의 혈통과 나이는 그저 부차적인 문제로 순식간에 전락했다.

친모의 핏줄이 어떻든 확실히 모리안 텔로아의 동생이 맞다 이건가. 텔로아 후작도 왕년에는 검술의 귀재로 소문이 자자했다.

저를 향한 시선이 호의로 덧칠된 게 데아론은 기쁘면서도 씁쓸했다.

드디어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좋은데, 이를 위해 이런 험한 곳까지 내몰렸다는 게 너무 극단적으로 여겨졌다.

누구는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편안하게 귀공자 대우를 받고, 누구는 제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마수의 소굴을 누빈다. 인생의 흔하디흔한 불공평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복귀한다. 사체 처리해.”

지휘관이 명령했다. 마법사들이 거대한 마수 사체에 불을 붙였다. 피보다 더 역한 냄새가 독 안개처럼 그들을 덮쳤다. 데아론은 황급히 망토로 제 코를 덮었다.

“이제 가자.”

동료가 채근했다. 데아론은 잠자코 말에 올랐다. 지친 군인들은 진영으로 돌아갔다.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 그러나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그들을 이곳으로 보낸 이는 황제였으니 고향으로 다시 불러들일 수 있는 이도 황제였다. 바로 그런 면에서 그들의 전망은 꽤 암울했다.

서부로 떠난 기사들에게 수도에 남은 친지들은 꾸준히 편지로 소식을 퍼 날랐다.

요즘 수도에서는 조만간 황자가 황태자로 책봉될 거라고 공공연히 수군댄다는 소식 포함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정말로 차기 황제가 되면, 그분의 이복동생을 따른다는 이유로 쫓겨난 우리는 어찌 되는 걸까?

“오늘도 수고했네, 데아론 경.”

“감사합니다, 백작님.”

진영에 도착한 데아론은 피곤하지만 흐뭇한 표정의 중년 귀족에게 정중히 예를 갖췄다.

데아론이 몇 번 제 목숨을 구한 뒤로 싸늘했던 백작의 태도는 급격히 변화했다.

데아론은 은연중에 백작의 자기를 향한 적의가 그의 장녀 루이사 펠르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런 생각이 너무나 창피한 자의식 과잉일까 봐 확신을 삼갔다.

‘설마.’

데아론은 작년 봄 데뷔 무도회에서 루이사를 처음 만났고, 지난가을 연회에서 그녀와 제대로 대화했으며, 이후 몇 차례 모임에서 그녀를 마주했다.

그때마다 데아론은 루이사가 제게 특별한 호감을 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나, 망가진 자존감이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터라 스스로 착각이라고 넘겨짚었다.

고귀하신 귀족 영애께서 설마 나 같은 거에 관심을 두시겠어. 그는 날카로운 눈치를 낮은 자존감으로 상쇄해 버렸다.

‘나를 무슨 제 딸을 홀린 파렴치한처럼 보던데…….’

초기 펠르만 백작의 자신을 향한 태도를 데아론은 정확하게 분석했다. 그러다 에이, 설마, 하고 내적 손사래 한 번으로 생각을 치워 버리기 일쑤였다.

이제 시간은 그 후로도 흘러 데아론은 펠르만 백작뿐만 아니라 토벌대의 모두에게 골고루 예쁨받는 영웅이 되었다.

그저 형의 권유로 시작하게 된 기사의 길은 점점 그의 적성에 맞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데아론은 제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 진심으로 안도했다.

‘이 정도는 해야 그분 곁에 설 수 있어.’

나의 사랑하는 공주님께 걸맞은 사람이 되려면 어느 한 분야에서라도 두각을 나타내야지.

그저 그런 보잘것없는 사내로 그분의 이름에 먹칠하고 싶지 않았다.

아아, 공주님. 데아론은 연인이 무척 그리웠다.

“도련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고마워.”

후작가의 시동이 데아론에게 다가와 편지를 한 통 내밀었다. 딱 한 통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공주님.’

데아론은 장막에 들어가 흙투성이의 망토를 벗고 피 묻은 검을 내려놓은 뒤 시동이 준비한 세숫물로 손을 정성스레 씻었다.

그토록 경건하게 준비를 마치고 데아론은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 봉투를 뜯었다.

처음 받는 편지도 아니면서 매번 순진한 소년처럼 설레는 건, 아마도 첼루나를 향한 그의 마음이 그만큼 특별하기 때문이리라.

[그리운 데아론에게.]

편지의 시작은 늘 같았다. 그리운 데아론에게.

데아론은 자신의 그리움을 꾸밈없이 드러내는 공주의 태도가 사무치게 좋았다.

나 또한 그대를 절절하게 그리고 있다고, 보고 싶어 미치겠다고 그녀가 자신의 귀에 직접 속삭이는 듯했다.

데아론은 줄줄이 이어지는 편지를 갈급하게 읽었다.

글은 종이가 두툼하게 접힐 정도로 길었으나, 데아론은 구구절절하다고 비웃는 대신 글자 하나하나가 아까워 애타는 마음으로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통으로 확인한 뒤, 데아론은 다시 위로 올라가 한 글자씩 조심히 곱씹으며 읽었다.

데아론은 편지를 쓰는 첼루나를 상상했다. 책상 앞에 앉은 당신의 모습. 밤중에 촛불에 비추어 글을 썼을까, 아니면 환한 대낮에 햇볕의 힘을 빌렸을까.

글을 쓸 때 여러 번 고민했을까? 아니면 일필휘지로 이 아름답고 정다운 문자를 기록했을까.

혹 손이 너무 아프지는 않았을지. 중간중간에 쉬면서 썼기를 바랐다.

“첼루나.”

편지를 읽고 나면 지독하게 행복하고도 쓸쓸해서, 데아론은 습관처럼 낮게 중얼댔다.

황족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건 불충이다. 여태 데아론은 연인의 면전에서 그녀를 이름으로 부른 적 없었고, 첼루나도 그러라고 허한 적 없었다.

사실 첼루나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데아론에게 본명으로 불리고 싶었으나, 그건 너무 전생의 기준을 현생의 연인에게 강요하는 느낌이라 애써 참았다.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는 데아론은 상대방이 듣지 못하는 곳에서만 그녀의 이름을 종종 속삭였다. 첼루나. 되뇌는 것만으로도 달콤했다.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아직 혼잣말로도 입에 담기 수줍은 고백은 덧붙이지 않고 침묵에 묻어 두었다.

편지 끝, 첼루나가 제 이름을 적은 부분에 데아론은 지그시 입을 맞췄다.

이제 계절은 늦가을, 블레논의 황태자 책봉이 거의 확정되었다.

그리고 마수 토벌대에게 겨울나기용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 서부로 떠날 인원이 추려졌다.

“저도 동행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첼루나는 직접 황제를 찾아가 원하는 바를 고했다.

“네가?”

황제의 말투는 여느 때처럼 차가웠다. 딱히 첼루나가 청한 내용 자체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는, 그냥 막내딸을 대하는 그의 평소 태도였다.

“네, 폐하. 마침 동행하는 사제님들이 계셔서 그분들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실제로 보급품 중 교회의 헌금으로 조달한 물건이 적잖아서 사제들도 함께할 예정이었다. 성녀인 첼루나가 따라붙기에 적절한 핑계였다.

어차피 황제는 제 얼굴을 보는 걸 싫어하는 작자니 자신이 알아서 떠나겠다고 하면 옳다구나 하고 승낙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황제는 의외로 적대적이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이냐?”

첼루나는 뺨을 맞은 기분이 되었다. 매번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또 매번 기어코 상처받는다. 상대방이 피 섞인 아빠라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수작이라뇨, 폐하. 그런 게 아닙니다.”

첼루나는 울컥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하마터면 상대방이 황제고 연장자며 제 부모라는 사실도 잊고 험한 말을 뱉을 뻔했다.

생각해 보니 억울했다. 저분은 내가 자기 딸이라는 사실을 늘 잊고 사는 듯한데, 나는 저분이 내 아비라는 사실을 항상 상기하며 지내야 하니.

“그냥 황궁을 잠시 벗어나고 싶을 따름입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요.”

첼루나는 싸늘하게 아뢰었다. 이번에는 말투도 내용도 진심이라서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여기서 어떻게 나오든 황제는 아니꼽게 볼 것이다.

그러니 괜히 피곤하게 머리 굴릴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그녀는 차라리 안도하기로 했다.

“분위기 전환, 이라.”

황제가 서늘하게 읊조렸다. 막내딸을 향한 그의 시선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죽은 듯이 살던 공주가 갑자기 성녀가 되더니 사교계에 나서 이복 언니를 지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황제는 그녀를 날카롭게 주시했다.

“대사제는 물론 허락한 일이겠지?”

“네, 폐하.”

“그렇다면 어차피 내가 막을 수는 없겠구나. 대사제와 성녀께서 이미 얘기를 마쳤으니.”

아비의 비아냥에 첼루나는 다시 울컥했다.

그게 당신 딸한테 취할 태도야?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단지 태어나기만 한 게 죄야? 어머니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고작 그따위야?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런 게 사랑일 리가 없어.

첼루나는 이미 진짜 사랑이 뭔지 알았다. 상대방을 위해 목숨조차 바치는 사랑, 이미 그런 사랑을 배웠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죽은 친모를 빼닮았다는 이유로, 또한 그분이 자신을 낳다가 죽었다는 이유로 저를 증오하는 제 아비를 경멸했다.

역겨운 당신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식을 학대하면서 그걸 사랑으로 포장한다.

저승에 계신 자기 어머니가 과연 그 사랑을 어여삐 여길지 의문이었다.

“다녀오거라. 필요한 게 있으면 궁인을 통해 전달해. 준비해 둘 테니.”

냉담한 승낙이 떨어졌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는 아비의 자비에 첼루나는 부질없이 감동하지 않았다.

황족이 공식 업무로 길을 떠날 때 필요한 물품을 제공받는 건 너무나 당연한 권리였다. 그런 당연한 일조차 첼루나에겐 낯설기만 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도 어쨌든 기뻐하기로 했다. 몇 주만 기다리면 데아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비로 인해 받은 상처가 연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스르르 아물었다.

‘보고 싶어.’

전생에 첼루나는 무려 2년간 연인과 떨어져 지내야 했지만, 이번 생에 성녀로서 서부 방문의 명분이 생긴 그녀는 예정보다 빠른 재회에 안도했다.

하루빨리 그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의 눈을 마주하고, 체온을 느끼고, 자신을 부르는 그의 다정한 음성을 듣고 싶었다.

데아론, 데아론, 데아론. 첼루나는 오늘도 그가 준 사랑으로 살았다.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 날짜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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