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만 무성한 악명 높은 공주와 실제로 말을 섞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품위 있는 백작 여식 루이사는 설마 황족이 저런 천박한 언어를 구사하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었다.
아무리 상대방이 저보다 신분이 낮다지만, 엄연한 귀족 영애에게 저런 독설이라니? 통상적인 사교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대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그대는 데아론이 바보라고 생각해? 뭐가 자기한테 가장 좋은지는 그 애가 가장 잘 알지 않을까? 그대가 그 애 엄마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면서 웬 개소리야?>
<공주님.>
루이사는 탄식했다. 세상에, 데아론 경은 대체 이 사람의 무엇을 보고 사랑에 빠진 거야?
<데아론은 그대가 일일이 챙겨 줘야 할 어린애가 아니야. 무슨 못된 시누이처럼 그 애 뒤에서 몰래 애인 떼어 내는 행동 하지 말고, 그냥 꺼져. 그대 때문에 내가 확 피곤해졌거든.>
공주의 폭언은 이어졌고, 루이사는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한 가지가 유독 거슬렸다. 저 예의도 기품도 없는 한심한 공주가 데아론 텔로아 경을 너무나 친근하게 ‘그 애’라 칭하는 것.
루이사의 손끝이 움찔댔다. 만약 상대방이 저보다 신분이 낮은 자였다면, 아마 참지 못해 뺨을 날렸으리라.
<그래, 어디 한번 때려 보든가.>
공주는 싸늘하게 빈정댔다. 그녀는 루이사의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얻어맞고 사는 게 익숙한 그녀는 누군가 폭력을 행사하기 직전 어떤 눈빛과 몸짓을 짓는지 너무 잘 알았다.
물론, 루이사는 실제로 공주를 치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방이 이름뿐인 황족이어도 사회에는 최소한의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루이사는 무정하게 사과했다. 직후, 흔한 인사말도 없이 쌩하게 돌아섰다.
이게 전생에서 두 여자가 나눴던 유일한 대화였다. 블레논 황자의 동복동생과 텔레스 황자를 지지하는 숙녀. 둘 사이의 접점은 데아론을 향한 연정뿐이었다.
이번 생에도 첼루나는 루이사와 스치듯 몇 마디 나눠 본 게 전부였다.
비록 첼루나가 황녀 편으로 돌아서긴 했지만, 여태 다른 귀족들과 제대로 얘기해 볼 기회는 생각보다 적었다.
이제 첼루나는 드디어 회귀 후 루이사와 대면했다. 첼루나는 설레는 심정으로 자신과 동갑인 금발 소녀를 샅샅이 훑었다.
‘제대로 만나고 싶었다는 말은 진심이었어.’
이번 생에 첼루나는 루이사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전생에서처럼 어긋나는 건 사양이었다.
모든 건 그녀가 사랑하는 데아론과 그녀가 충성을 바치는 언니를 위해서였다.
“그대 부친께서는 집안에 자주 편지하시나?”
“네, 공주님. 그저께만 해도 저택에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무사히 잘 계신다고 합니다.”
“그렇구나, 다행이야.”
공주의 등장이라는 대단히 거북한 변수에도 불구하고 다과회는 어느새 매끄러운 분위기로 지속되고 있었다.
애초에 세 치 혀와 손부채 하나로 사교계를 제패하도록 강하게 키워진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전부 고수답게 가식적인 웃음과 우회적인 언어로 모임을 유려하게 이어 나갔다.
그 와중에도 첼루나는 수많은 곁눈질의 대상이 되었다. 거의 모두가 그녀의 속내를 분석하느라 바빴다.
어째서 그녀는 예비 황자비가 주최한 다과회에 모습을 드러냈는가? 이건 일종의 정치적 선언인가? 혹시, 그녀는 다시 황자 전하의 편으로 돌아서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건 황자 전하께 유리할까, 불리할까? 아니, 애초에 전하께서 동생을 받아 주실까? 이미 한 번 배신한 동복이었다. 두 번째 기회는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약 첼루나가 정녕 황녀를 버리고 다시 황자를 택한 거라면, 그녀는 몹시 유용한 패일 것이다. 성녀인 그녀는 여전히 교회와 민중에게 인기가 높으니.
물론, 그녀는 사실 황녀의 첩자일지도 몰랐다. 황자 편으로 돌아온 척하면서 황녀를 위해 여기 있는 숙녀들을 염탐할 목적으로.
여러 조용한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화제의 주인공은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옆자리에 앉은 루이사와 온화하게 대화했다.
“초조하지는 않아?”
“무슨 뜻인지요?”
“매사 여전히 침착해 보여서. 가족이 위험 지역에 파견됐으니 더 불안할 만도 한데.”
“어찌 걱정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걸 내색해 남들한테 우울한 기분을 옮길 이유는 없지요. 저 혼자만 가족을 서부로 떠나보낸 게 아닌걸요.”
루이사는 부드럽게 답했다. 첼루나는 묽게 웃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위로했다.
“그대의 부친은 반드시 무사히 돌아올 거야.”
전생에도 그랬으니까. 그거 포함, 몇 가지 사실은 이번 생에도 변함없었으면 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마냥 공손하기만 하던 루이사의 음성에 처음으로 온기가 스몄다.
루이사의 눈빛이 일순 애틋해졌고, 그때 첼루나는 때아닌 질투와 설움으로 명치끝이 지끈 쑤셨다.
루이사가 제 아비를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한다는 사실은 그를 언급할 때마다 그녀가 짓는 표정만으로도 유추할 수 있었다.
펠르만 백작 역시 딸들을, 특히 맏이를 끔찍하게 위하기로 사교계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가부장적 거만이 남자의 최고 미덕으로 여겨지는 케케묵은 사회에서 백작의 자식 사랑은 때로 비웃음을 샀지만, 주로 말 못 할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첼루나는 상상했다. 폐하께서 나를 그런 식으로 대했다면 어땠을까. 나도 그분을 떠올릴 때마다 저런 눈빛을 지을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공주님도 많이 걱정하시나요?”
“어?”
“공주님도 소중한 분을 서부로 보내셨잖아요. 데아론 텔로아 경이요.”
루이사가 데아론의 이름을 언급하자 첼루나는 흠칫 굳었다. 전생의 악몽이 떠올라 심장이 쿵쿵 뛰었다.
데아론을 연모했던 루이사. 그 애와 혼담까지 오갔던 루이사. 내게 와서 그를 놓아주라고 종용하던 루이사. 나 같은 것보다 훨씬 그 애와 잘 어울렸던 루이사…….
‘정신 차려.’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허우적댈 때가 아니었다. 첼루나는 날카롭게 마음을 다잡았다.
“글쎄, 뭐. 별일 없겠지.”
첼루나는 부러 시큰둥하게 말했다. 적절한 연기였다.
자신과 루이사의 대화를 열심히 엿듣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신이 황녀의 기사를 얼마나 절절하게 그리는지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데아론이 이미 애인으로 소문나기는 했지만 그 사실을 지금 여기서 쐐기 박을 이유는 없었다.
또 다른 전장이자 정치계인 사교계에서, 여지를 남기는 건 언제나 현명했다.
“그래요, 별일 없어야죠.”
루이사는 선선히 동의하면서도 의아하여 첼루나를 살폈다.
데아론 텔로아와 공주님이 애틋한 사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건 또 아닌 건가? 과장된 소문이었나?
바로 그때, 첼루나는 몹시 섬세하게 조절된 음량으로 작은 한숨을 흘렸다.
“후우.”
마치 속이 타들어 가는 심정을 억지로 참다가 겨우 조금 뱉어 내는 듯한 소리였다. 누군가 듣기에, 걱정과 온정이 가득한 한숨이었다.
아닌 척 열심히 엿듣는 다른 사람의 귀에는 그 자그마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 앉은 루이사는 그 한숨을 분명히 들었다.
‘과장된 건 아니구나.’
루이사는 그 한숨을 듣고 직감했다.
지금 공주님은 데아론 텔로아에게 실제보다 관심 없는 척하시는 거다. 그러나 마음을 온전히 억누를 수는 없어서, 저렇게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 거지.
루이사는 첼루나가 의도한 대로 추론했다.
첼루나는 루이사가 자신의 한숨을 듣고 자신이 내색하는 것보다 훨씬 깊게 데아론을 그리고 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래야 얘가 안심할 테니까.’
현재 루이사는 꿋꿋이 황녀 편이고, 첼루나는 자신이 황녀의 기사를 아낀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신이 그녀의 아군이라고 강조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래야 이번 생에는 얘가 마음을 접지.’
내가 황녀 전하의 충신이고 나와 데아론의 결합에 정치적으로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아야, 이번 생에는 얘가 마음을 단념하지.
제발, 이번 생에는 데아론을 마음에 담지 마. 내가 사랑하는 그 아이를.
첼루나가 오늘 다과회에 참석하고 싶었던 이유는 기실 이거였다.
그녀는 전생에 클라린 메르타가 개최한 다과회에 루이사 펠르만이 꼬박꼬박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클라린을 비롯한 황자 쪽 사람들은 루이사를 포함한 황녀 쪽 사람들을 불러다 주기적으로 잘근잘근 밟는 걸 즐기곤 했다.
그건 딱히 그들이 가학적 성향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건 사교계에서 승리를 공고화하는 전통적인 수법이었다.
패배자를 불러 그들의 기를 거듭 꺾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마지막 남은 자신감 한 톨까지 없애 버린다. 잔인하고도 효과적인 술수였다.
오늘 첼루나는 그런 잔인함으로부터 루이사를 지키기 위해 왔다. 이번 생에 루이사 펠르만은 중요한 아군이었다. 마냥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만약에, 이번 생에는 내가 이자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적어도 친우의 남자를 탐하는 부류는 아니니까.’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실한 정치적 동료가 될 수 있다면, 설령 루이사가 나중에 데아론을 마음에 품는다 한들 그녀는 단념할 것이다.
첼루나는 루이사의 현명함을 신뢰했다. 자신과 같은 편인 성녀이자 공주와 남자를 두고 경쟁하려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내분을 일으킬 리는 없지.’
전생에도 내가 블레논 편이라서 나를 싫어했던 애다. 이번에는 달라.
“정말로 별일 없을 거예요, 공주님.”
루이사는 다시금 힘주어 말했다. 이때 그녀의 음성은 첼루나가 전생의 그 어느 때 들었던 것보다도 친절했고, 그녀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나도 그 말 믿어.”
첼루나는 싱긋 웃었다. 한때 자신을 죽도록 괴롭혔던 저 바다 같은 남색 눈을 바라보며.
여름이 다 가기 전이었다.
그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왔을 때, 데아론은 아직 서부에 있었다.
서부는 아름다운 땅이었다. 광활한 황무지와 웅장한 산맥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화 같은 장면은 차마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거친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데아론을 비롯한 토벌대의 기사들은 그 매력에 흠뻑 젖어 아련한 감상을 읊을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진지하게 생존을 위해 싸웠고, 귀환을 위해 버텼다.
“키에에에엑!”
집채만 한 마수는 참 시끄럽게도 울었다.
데아론은 삭신의 피로와 전투에 대한 환멸에 앞서 귀가 너덜너덜한 느낌에 얼굴을 찡그렸다.
“데아론, 지금!”
청각적 고통을 한탄할 틈은 없었다. 동료가 외치자 데아론은 즉시 움직였다.
전력으로 말을 몰아 거리가 충분히 좁혀지자 그는 주저 없이 몸을 일으켜 안장을 박찼다.
공중에서 발검해 마수의 눈을 긋고 그 꼬리를 밟으며 가뿐히 착지하기까지, 숨 두어 번 내쉴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