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14)

“제가 어떻게 공주님을 평생 남처럼 대하겠어요. 그간 소홀했던 점을 용서해 주세요.”

아델라가 이토록 쉽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건 자신이 그걸 받아 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첼루나가 제게 절대 화내거나 저를 영영 적으로 돌리지는 않을 거라고 아델라는 근거 있게 확신했다.

이제 아델라는 첼루나가 제게 목적이 있어 접근했음을 알고 있었다. 첼루나 본인이 말해 줘서가 아니라, 아델라가 직접 짐작해서.

첼루나는 애초에 작년부터 제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두 소녀는 서로에게 받아 낼 게 있었다.

“글쎄, 벌써 용서하긴 이르지 않나. 그대가 언제 또 나를 투명 인간 취급할지 모르는 일인데.”

첼루나는 짐짓 새침하게 말했다. 그러자 아델라는 서글하게 웃었다.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오늘 알려 드리려고 왔어요. 혹시 메르타 양이 다음 주에 다과회를 연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듣기는 들었어.”

하지만 초대받지는 않았지. 첼루나는 뻔한 사실을 암시했고, 아델라의 미소는 짙어졌다.

“제게는 초대장이 왔어요. 그런데 다과회에 가족이나 친구를 하나씩 동반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주제넘은 청일지 모르지만, 공주님을 제 지인으로 초대하고 싶어요.”

첼루나가 딱 원하던 바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리 곧이곧대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음성은 아직 서늘했다.

“과연 주제넘은 청이긴 하구나.”

황족을 동반 모임에 데려가겠다는 백작 여식이라, 꿈이 참 크기는 했다.

만약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첼루나는 비웃기에 앞서 분개했으리라.

아니, 애초에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아델라가 여기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메르타 양의 다과회라니, 저의가 뭐야?”

첼루나의 말투는 의도적으로 뾰족해졌다. 과거 성질머리가 더럽다고 소문난 공주답게 까칠한 태도가 범상치 않았다.

“나를 데려가서 스스로 모욕을 주고자 했니? 아니면 나를 모욕하려고?”

클라린 메르타는 황자의 아군이고, 첼루나가 작년부터 황자와 척졌다는 사실은 허드렛일하는 하녀까지 아는 얘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클라린의 다과회에 공주를 데려가는 건 질 나쁜 장난으로 오해받기 충분했다. 물론 그게 사실이 아님은 첼루나도 알았지만.

“모욕이라뇨, 절대 아닙니다.”

아델라는 순진한 척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신중하게 말을 고르며, 짐짓 머뭇대는 태도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그저 공주님과 화해하고 싶어요. 그리고 저희가 화해했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고 싶고요.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거든요. 제가 공주님의 총애를 받다가 하루아침에 버려졌다는 둥, 너무 가슴 아픈 말을 많이 들었어요.”

확실히 말이 많기는 했다. 프란체스의 딸 아델라가 지난가을부터 황녀에게 붙은 첼루나 공주와 친하게 지내는 것에 대해 다들 얼마나 떠들썩하던지.

이 때문에 백작가 내도 시끄러웠고, 아델라는 하마터면 황자의 시녀 자리까지 잃을 뻔했다. 귀족의 딸을 쉬이 해고할 수 없다는 관습 때문에 어영부영 미뤄졌을 뿐.

“하지만 그게 아니죠, 공주님? 우리는 아직 친구인 거죠?”

아델라는 우수가 가득한 눈으로 공주를 간절히 쳐다보았다.

첼루나는 그 아련한 눈빛 한가운데, 자신을 쏙 빼닮은 뱀 한 마리가 있는 걸 보았다.

“부디 저를 다시 받아 주세요, 공주님. 그러면 언젠가 저는 공주님께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예를 들어.”

아델라는 잠시 멈칫했다. 여기서 얼마나 더 노골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나중에 황녀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결국 아델라는 강수를 두는 심정으로 꿋꿋이 덧붙였다.

“저는 그때도 공주님의 좋은 친구로 남을 거예요.”

아델라의 말뜻을 풀이하자면 이랬다.

나는 여전히 공식적으로 황자 편이다. 내 집안 전체가 황자를 섬긴다.

그러니까, 나중에 혹 황녀가 패배해 당신까지 몰락할 위기에 처한다면 당신은 나와의 우정을 발판 삼아 공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의 상황에는 내가 당신을 도울게. 하니, 부디 당신도 나를 도와줘.

“그러니 공주님도 부디 제 좋은 친구로 남아 주세요.”

황자가 승리하면 아델라는 첼루나를 구하고, 황녀가 승리하면 첼루나는 아델라를 구한다.

아델라는 본인의 미래를 위해 양다리를 택했다.

지금은 일단 은근슬쩍 황자 쪽과 친하게 지내다가, 나중에 조금이라도 불리한 기색이 보이면 첼루나를 통해 냉큼 황녀 쪽으로 갈아탈 심산이었다.

이건 거래였다. 감히 황족을 상대로 백작의 딸이 패기롭게 내민 앙큼한 제안.

첼루나는 아델라의 발칙함이 불쾌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늘 황족다운 황족 취급을 받아 왔다면 고고한 자존심 때문에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첼루나는 멸시와 냉대를 받았던 공주였다. 전생에 그녀는 눈앞의 백작 여식보다 못한 삶을 살았고, 혈통주의와 신분제에도 회의감을 느꼈다.

나는 고귀하신 황제의 딸이니까 한낱 백작의 딸보다 훨씬 위에 있다고? 개소리. 누구의 핏줄로 태어났는지가 무슨 상관이야.

내 아비는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인간이지만 그 사람 때문에 나는 너무 오래 불행했어.

그녀는 오히려 아델라의 건방진 무리수가 마음에 쏙 들었다.

아아, 저 뻔뻔한 야망은 참으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전생에 천덕꾸러기 공주로 계속 무력하게 있다가 끝내 연인의 죽음을 불렀던 첼루나는 저 악착같음이 정녕 마음에 겨웠다.

“그대가 그렇게나 간곡하게 청하면 내가 계속 화낼 수가 없잖아.”

첼루나는 언제 그리 쌀쌀했냐는 듯 빙그레 웃었다.

공주는 아델라 프란체스가 진심으로 탐났다. 지난 생에 그녀와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울 정도였다.

“초대를 받아들일게, 아델라.”

어차피 꼭 가고 싶었던 모임이었다. 그곳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주님.”

아델라는 이제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활짝 웃었다.

거래 성립이었다.

루이사는 자신이 왜 황자의 약혼녀가 주최한 다과회에 초대받았는지 정확하게 짐작했다.

조롱당하고 모욕당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조롱과 모욕 아래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그러나 이 도도한 숙녀는 결코 무너지는 모습 따위 보일 생각이 없었다.

조롱과 모욕은 던지는 쪽 마음이지만, 적어도 이에 어찌 대응할지는 전부 제 몫이리라.

그토록 각오하고 다과회에 나타났거늘, 루이사는 당혹스러운 변수를 만났다. 첼루나 공주, 바로 그녀가 거기 있었다.

“어서 오세요, 펠르만 양.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클라린 메르타는 예상보다 훨씬 억눌린 태도로 루이사를 맞이했다. 루이사는 그 이유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클라린이 이 자리에서 가장 지위가 높았다면 마치 제가 정말 황제라도 된 듯 마음껏 설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저기에, 공주가 있었다. 공주이자 성녀, 부황에게 미움받기는 하지만 어쨌든 작년부터 존재감을 확실히 세운 첼루나 포렌타인.

다들 아닌 척하면서 공주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몇 년 전이었다면 그 누구도 공주를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건 이제 먼 옛날, 그녀가 아직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천덕꾸러기였을 때였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루이사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의 심란한 의문이었다. 황녀의 편으로 돌아선 공주가 황자의 사람들이 모인 다과회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니.

‘누가 초대했을까…….’

설마 클라린 본인은 아니었을 테고. 루이사는 느리게 시선을 굴렸고, 공주 옆에 있는 아델라 프란체스를 발견했다.

‘설마?’

아델라 프란체스는 첼루나 공주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명백하게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루이사는 의아하여 대놓고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

‘왜?’

프란체스 백작가는 황자를 따르지 않나?

듣기로는 작년에 백작의 딸이 살짝 일탈 행위를 보이기는 했지만, 황녀가 떠난 지금 그 일탈은 끝났을 줄 알았는데.

오래 고민할 틈은 없었다. 첼루나 공주는 방금 들어온 루이사를 발견했다. 그러더니 흡사 단짝 친구를 보듯 해맑게 빵긋 웃으며 빠르게 다가왔다.

“그대, 어서 와.”

첼루나는 한껏 달콤하게 속삭였다. 루이사는 혼란 속에서 맞바라보았다.

“꼭 한번 제대로 만나고 싶었어.”

이건 진심이었다.

첼루나는 루이사 펠르만이 불편했다. 전생에 그들은 악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부디 데아론 경을 놓아주세요.>

그렇게 간청하던 차가운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했다. 예쁘고 우아한 얼굴에 새겨진 서늘한 경멸의 빛도 언제나 생생했다.

<공주님의 집착이 그분을 망가트리고 있습니다. 그분을 정말 아끼신다면, 놓아주세요.>

서로 같은 남자를 마음에 담은 두 여자.

둘 중 한 명은 남자에게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는 쪽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남자의 인생에 하등 쓸모없는 자였다.

데아론은 첼루나를 사랑했기에 루이사 펠르만과의 혼담을 거절했다.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펠르만 백작가는 명문이었고, 텔레스 후작가와 더불어 황녀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두 집안이 혼인을 통해 더욱 돈독해졌다면 여러모로 좋았으리라.

데아론이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사랑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자였다. 그런 사람이 연인을 두고 다른 이와 결혼할 리 없었다.

거절당한 백작 영애는 자존심이 상하기에 앞서 진심으로 분노했다.

만약 데아론이 자신을 거절한 이유가 다른 ‘괜찮은’ 여인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면 상심했을지언정 그럭저럭 버티며 데아론의 행복을 빌어 주었을 것이다.

루이사는 그가 꼭 본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좋은 사람과 맺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랄 만큼 데아론을 좋아했다. 그녀의 연정은 진짜였다.

그런데 첼루나 공주라니? 그 이름뿐인 황족을, 블레논 황자의 꼭두각시로 나약하게 휘둘리는 그자를 선택했다니.

루이사의 차디찬 분노는 흠모하는 사내가 아닌 그 사내가 사랑하는 공주에게로 흘렀다. 분노는 그녀를 당돌하게 만들었다.

<공주님께는 과분한 사람입니다. 공주님도 그걸 아시잖아요. 부디 진정 그분을 위한 길이 뭔지 깊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주가 억지로 참석한 어느 무도회에서 루이사는 그녀를 찾아가 은밀한 경고 및 당부를 날렸다.

성질 더러운 공주는 루이사를 죽일 듯 노려보며 입술로만 빵긋 웃었다.

<지금 그대가 한 말을 어디 한번 그 애한테도 그대로 읊어 봐, 이 주제 파악 못 한 것아.>

공주가 독기를 담아 씹어 뱉은 말을 듣고 루이사는 흠칫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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