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아론 텔로아는 당시 서부에서 마수들과 싸우는 중이었기에 그때만큼은 연인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
앰벌리는 아무도 모르게 분노했다. 그는 싸늘한 증오에 사로잡혔다.
각자 가해자이면서 방관자인 황제와 황자, 라토르 공작까지 전부 싸잡아 불구덩이에 처박고 싶을 만큼.
황후와 황녀의 외면도 개탄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적어도 그들은 핑계라도 있었다. 황녀는 공주와 이복이었고 황후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니.
앰벌리는 상상했다. 자신을 믿고 등용해 준 블레논 황자의 몰락을. 제게 기사가 될 기회를 준 라토르 공작의 파멸을.
황녀가 죽고 황자가 살더라도 첼루나 공주의 삶은 별로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원래도 동생을 학대하던 놈이 경쟁자가 사라졌다고 해서 갑자기 선량해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황녀의 승리를 바라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어쨌든 황녀 측은 첼루나 공주를 적으로 상정한다. 공주가 수동적으로나마 여태 황자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기에 그런 상정은 근거가 타당했다.
만약에 황녀가 승리하더라도 공주는 살 수 있다면. 그렇다면 얼마나 이상적인 상황일까.
그때부터 앰벌리는 배신을 결심했다. 그게 그가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우선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공주의 약혼자로 당첨된 변태 귀족이 지방 영지에서 수도로 올라왔다. 신부를 데리고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수도에 도착하기 직전, 그 귀족은 길에서 ‘사고’로 죽었다. 바퀴가 빠져 마차가 뒤집히자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고 한다.
때마침 앰벌리 라크문이라는 기사는 휴가를 얻어 며칠간 황궁을 비웠지만, 누구도 그의 부재에 주목하지 않았다.
예비 신랑이 죽었으니 결혼은 당연히 무산되었다. 겨우 끔찍한 운명을 피해 간 첼루나에겐 또 다른 비참한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남자 잡아먹는 년, 불길한 계집이라고.
이제는 지나간 첫 번째 삶에, 그런 일들이 있었다.
황제가 앓아누웠다. 오랜 지병이 급작스레 도진 것이다. 황태자 블레논은 섭정을 빌미로 권력을 휘어잡았다.
그는 외국에 나가 있는 이복동생의 귀환을 최대한 늦추려 했지만, 아무리 입단속을 해도 황제의 목숨이 오락가락한다는 사실은 쉽게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황녀는 황자가 쉬쉬하던 황제의 와병 소식을 뒤늦게 알아내고 부리나케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입궁을 물리적으로 막으려는 시도마저 있었으나, 여전히 수도에는 황녀를 따르는 세력이 남아 있었다.
황제가 침상에 묶인 사이 황녀와 황태자의 대립은 이어졌다. 그리고 앰벌리는 황녀에게 은밀히 접근했다.
“그래서, 나를 위한 첩자가 되겠다? 그대를 반평생 먹여 주고 입혀 주고 검술 스승까지 붙여 줘서 여기까지 이끌어 준 라토르 공작을 배신하고.”
어둠 속에서 황녀는 부드럽게 읊었다. 그녀의 눈에는 옅은 경멸이 아른댔다.
“역시, 황태자 전하는 이래서 안 돼.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도 없어서야.”
황녀는 존칭까지 섞어 가며 나긋하게 비꼬았다. 앰벌리는 잠잠했다.
“주인을 무는 개라니. 나중에 주인이 바뀌면 두 번째 주인은 꽤 긴장해야겠어.”
나는 변절자를 쓰지 않아. 황녀는 낭창한 음성과 전혀 다른 차가운 눈으로 앰벌리를 마구 밟았다. 나는 네가 나한테 바치겠다는 충성을 못 믿겠어.
“개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금 더 승산 있는 쪽에 가서 꼬리를 흔드는 건 영리한 개의 본능입니다.”
앰벌리는 스스로 개라 칭하면서도 안색이나 말투가 변함없었다. 이 정도 시험이야 눈 감고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온화하고 정중한 모습이었다.
“내가 좀 더 승산 있는 쪽이라고 생각해?”
황녀는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앰벌리는 묵묵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황녀는 검지로 그의 턱을 받쳐 자신을 보도록 하고 나직하게 질문했다.
“그대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뭐야?”
생존, 승산, 그런 번지르르한 핑계 말고. 지금 너를 움직이는 솔직한 욕망을 말해.
“……전하께서 훗날 제위에 오르실 때, 첼루나 공주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앰벌리는 입을 열어 속삭였다. 뜻밖의 이름에 황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얼굴에 복잡한 빛이 스쳤다.
“그러지.”
의외로 흔쾌한 대답에 오히려 앰벌리가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한 기색을 능숙하게 숨기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황녀가 황제가 된 후에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데아론 텔로아는 황녀와 앰벌리 라크문의 비밀스러운 거래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대로는 공주가 사형당하리라고 타당하게 추론한 끝에, 그는 황녀가 미처 움직이기 전 공주를 먼저 빼돌렸다.
공주의 탈출이 알려지자 새 황태후가 움직였다. 공주와 공주의 조력자를 잡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황제는 모친이 모르게 이복동생을 살리려 했지만, 황제의 부하에 앞서 황태후의 부하가 먼저 변절자와 탈옥자를 따라잡았다.
황태후의 기사는 연인을 택하고 주군을 배신한 변절자 데아론 텔로아를 죽였다. 데아론 텔로아는 죽기 전에 본인의 원수를 갚았다.
첼루나 포렌타인은 절망했고, 연인의 시체를 등지며 일어섰다. 연인의 유언대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혼자라도 살아남아야겠다고 기계처럼 다짐했다.
아아,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삶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고독하게, 평생 혼자, 사랑하는 사람의 희생을 딛고.
그런 그녀를 위해 시곗바늘이 움직였다.
이제 지난 삶의 완전한 내막을 기억하는 자는 이 세상에 없었다.
* * *
아델라는 머리가 복잡했다. 지난여름부터 쭉 그런 상태였고, 올봄에 상황은 더욱 심해졌으며, 지금 당장은 아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안전한 길로 가느냐, 아니면 도박을 감행하느냐…….’
사실 그 안전한 길도 정말 안전하긴 한 건지 보장은 없었지만.
만약 이대로 황자가 승리한다면 안전한 게 맞겠으나 그런 미래를 장담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델라는 손에 쥔 다과회 초대장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사교계에서 다과회야 흔한 일이니 초대장 자체가 특별할 이유는 적었다. 다만 그 다과회의 주최자가 몹시 특별한 축에 속했다.
‘드디어 메르타까지 직접 나섰구나.’
메르타 후작의 외동딸은 황자의 약혼녀였다.
즉, 곧 황자비가 될 사람이자 숙녀들의 사교계에서 친황자파의 우두머리를 맡은 존재였다.
‘이제 완전히 자기 세상이다, 이거지.’
주로 남자들에게만 정치를 맡기는 세계에서 텔레스 황녀는 묘하게 이중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차기 군주를 꿈꾸며 사내들의 정계에 뛰어들었고, 동시에 가장 고귀한 숙녀로서 여인들의 사교계를 휘어잡았다.
그런즉 황녀가 황자와 엇비슷하게 대립할 때는 황자를 지지하는 가문들의 여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기회가 별로 없었다.
현재 황녀는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쫓겨난 상태였다. 이제 수도에서 황후 다음으로 가장 지위가 높은 여인은 황태자비, 또는 예비 황태자비였다.
‘여왕벌 등극을 공식화하겠다는 건가.’
아델라는 신랄하게 분석했다. 클라린 메르타의 다과회 개최에 대한 감상이었다.
이대로 황자가 승리하면 황녀는 제거되고 황후는 축출될 것이며, 그러면 미래의 황태자비 클라린 메르타는 황궁의 안주인이 될 것이다.
부지런한 후작 영애는 그때를 벌써 준비했다.
다과회를 열고 세력을 모아 친황자파 여인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이미 황녀가 완벽하게 패배한 것처럼 행동했다.
최근 황제의 행보와 황자의 기세를 봤을 때, 황녀의 패배를 확신하는 그 태도가 마냥 오만하다고 비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델라는 여전히 망설였다.
‘정말 이렇게 끝이라고?’
황녀가 비록 쫓겨나긴 했지만 황후는 아직 건재하다.
그리고 황녀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언제든지 제위를 요구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진 자였다.
‘한쪽에만 줄을 대기 불안해.’
야심 많은 소녀는 냉정하게 궁리했다.
아델라의 최종 목표는 언젠가 제 유약한 남동생 대신 백작위를 이어받는 것.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녀는 과연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최소한 여지는 남겨 둬야…….’
내가 이대로 집안 어른들의 뜻에 따라, 또한 수도의 시류에 따라 황자에게 계속 충성했는데 알고 보니 나중에 황녀가 이기면?
나중에 혹 우리가 패배하면 어찌 될 것인가? 내 가문이 몰락하면? 내가 물려받고자 했던 프란체스 백작위가 제국의 계보에서 지워진다면.
‘나중에 붙잡을 동아줄을 남겨 둬야 해.’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아델라는 양다리를 걸치고자 했다.
이대로 황자에게 계속 충성하는 척하면서 나중에 일이 수틀리면 곧장 황녀를 향해 돌아설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야 했다.
영악하고 교활한 변절자의 태도였지만, 뭐 어때? 아델라는 야망을 위해서라면 조금의 양심쯤이야 언제든 희생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자였다.
어차피 황자 전하가 무슨 대단한 성군이 될 것도 아니고, 내가 그분께 개인적으로 빚진 것도 없으니 절절한 충성을 바칠 이유는 없다.
아델라의 자기합리화는 그토록 빠르고 깔끔했다.
‘마침 내게는 그런 동아줄이 있지.’
첼루나 포렌타인 공주님. 아델라는 황제의 버림받은 막내딸을 떠올렸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살가운 사이를 유지하던 둘이었지만, 황녀의 유학이 결정된 뒤로 관계는 서먹해졌다.
아델라는 공주님을 스스로 먼저 찾아뵙는 눈물겨운 의리를 보이지 않았고, 첼루나 역시 상대방에게 편지 한 통 넣지 않았다.
황녀의 유학이 결정된 뒤로 황녀의 측근들은 전부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작년부터 자신이 언니의 아군임을 명백하게 드러낸 첼루나는 마찬가지로 공주궁에 조용히 칩거했다. 오래 친했던 황자의 시녀와 조금의 교류도 없이.
아델라는 클라린 메르타가 보낸 다과회 초대장을 빤히 쳐다보았고, 끝내 결심을 마쳤다.
바로 다음 날, 아델라는 공주를 찾아갔다.
첼루나는 아델라 프란체스가 제게 알현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듣고 미묘한 한숨을 지었다.
‘이것도 지난 생과 같구나. 시기는 앞당겨졌지만.’
전생에도 황자의 약혼녀는 황녀가 제국을 뜨자마자 수도의 사교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여기저기서 다과회와 무도회를 열었다.
그중 첫 번째 모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느 다과회에서 클라린 메르타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각각 지인을 추가로 한 명씩 데려올 것을 권했다.
사교계 숙녀들이 인맥을 넓히는 흔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첼루나의 추측이 정확하다면, 황녀의 출궁 이후 처음으로 아델라가 자신을 찾은 이유는 다과회의 그런 규칙과 연관이 있었다.
“여기는 웬일이야? 평생 남처럼 대할 줄 알았더니.”
그러나 일단, 첼루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 척했다. 쌀쌀맞은 연기는 덤이었다.
“이게 몇 달 만이지? 올봄 이후로는 처음이구나.”
이제 어느덧 여름이라 날씨가 퍽 더웠다. 아델라는 주눅 들지 않고 능청스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