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14)

앰벌리는 상대방의 말뜻을 알아듣고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그사이 첼루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녀와 보폭을 맞췄다.

“그렇다면 공주님은 제가 불편하시겠군요.”

“뭐?”

“저는 당신이 가장 아끼는 피붙이의 신하가 아니잖습니까.”

첼루나는 앰벌리를 흘깃했다. 앰벌리는 오직 정면을 응시했다. 그래서 첼루나도 다시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 불편하지는 않아.”

설령 자신의 모호한 언어가 상대방에게 잘못된 여지를 주는 행동이라 해도, 첼루나는 양심의 가책과 본능적인 불안감을 무릅쓰고 도박을 감행했다.

“하지만 훨씬 편하기는 하겠지. 만약에 그대가…….”

만약에 그대가, 주군을 바꾸어 블레논 황자가 아닌 텔레스 황녀를 섬긴다면.

첼루나는 일부러 말꼬리를 흐리며 앰벌리의 반응을 기다렸다.

자, 똑똑한 너는 내 뒷말이 무엇일지 유추할 수 있겠지. 그 뒷말에 너는 뭐라고 대답할래?

앰벌리는 오래 조용했다. 그 둘은 공주의 시녀와 기사보다 조금 앞서 나란히, 잠잠히 걸었다. 그러다 문득 앰벌리가 입을 열었다.

“만약에 제가 지금보다 훨씬 편해지신다면.”

내가 황자 대신 황녀를 택한다면. 당신과 똑같은 주군을 섬기기로 한다면.

“그렇다면 제게도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게도 동등한 기회가 생기는 거야?

“황녀 전하의 기사인 데아론 텔로아 경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기회요.”

나도 그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께 떳떳이 연인이라 불릴 기회가 생겨?

“뭐……?”

첼루나는 다시 걸음을 그쳤다. 상상도 못 한 노골적인 구애가 기가 막혀 첼루나는 앰벌리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녀가 나고 자란 귀족들과 황족들의 사교계는 가장 단순한 서술조차 최소 서너 번쯤은 돌려 말하는 꼬이고 꼬인 사회였다.

첼루나도 그걸 알았고 앰벌리도 그걸 알았다. 서로 그 사실을 얼마나 잘 아는지 훤히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지금 황제의 딸을 똑바로 맞바라보며 꾸밈없이 질문하고 있었다. 자신이 상대방의 연인이 될 수 있겠냐고. 희망을 품어 볼 여지나마 있는 거냐고.

만약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섬기는 주군조차 바꾸겠다고 그는 진심으로 고백하고 있었다.

“저야말로 주제넘었군요. 죄송합니다.”

그런 폭탄 발언을 터트려 놓고 앰벌리는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첼루나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분명 자신이 그를 먼저 떠보고자 대화를 시작했는데, 도리어 덫에 걸린 느낌이었다.

“황궁까지 계속 모시겠습니다, 공주님.”

앰벌리는 다시 기품 있게 아뢰었고, 첼루나는 공허한 낯으로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더는 그와 대화하는 시늉조차 하기도 벅찼다.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웠다.

<만약에 제가 지금보다 훨씬 편해지신다면.

그렇다면 제게도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황녀 전하의 기사인 데아론 텔로아 경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기회요.>

‘너, 설마.’

미친 가설이 첼루나의 뇌리를 들쑤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심한 자의식 과잉일 뿐이라는 반박이 떠올랐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가설을 폐기할 수 없었다.

‘설마, 전생에도…….’

전생에도, 나 때문에, 나를 위해, 고작 그런 이유로. 황자를 배신한 거야?

만약 그렇다면 너는 정말 미친놈이다.

아니, 잠깐만. 그럴 리가 없어. 전생에 나는 블레논 편이었잖아. 내 오빠가 죽으면 나도 죽는데, 너는 왜……?

‘설마.’

만약에 네가 데아론처럼, 황자의 몰락 이후 나는 따로 빼돌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면.

나를 학대하는 황자가 승리해 봤자 내게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 차라리 황자의 패배를 유도한 뒤 나를 몰래 살릴 계획이었다면?

‘……아니면 전생에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그냥 이 모든 게 거대하고 창피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지난 생과 이번 생이 너무 많이 달라졌으므로, 현재의 감정을 토대로 과거의 일을 가늠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래, 설마 이 사람이 과거에서까지 나를 좋아하지는 않았을 거다. 만약 그랬다면 끝까지 황자 편을 들었겠지, 그렇지? 그게 내가 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게다가 전생에 너는 내게 상냥하지 않았는걸. 남들처럼 잔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너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내가 혼자 흐느낄 때 위로하지 않았다. 내가 황자에게 얻어맞아 얼굴에 푸르죽죽한 피멍이 들었을 때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래, 전생에 너는 나를 늘 지켜보기만 했지.

그 지켜보던 시선이, 어쩌면.

‘모르겠어.’

그 시선이 어쩌면, 정말로 이번 생과 같은 감정을 담고 있었는지.

어느새 두 사람은 황궁 앞에 도착했다. 경비병은 두 사람의 난해한 조합을 보고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황녀와 손잡은 공주와 황자의 충직한 기사라니, 어울리는 한 쌍은 아니었다.

경비병이 문을 열었다. 공주와 일행은 말없이 통과했다.

“오늘 제게 공주님과 대화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앰벌리는 공손히 인사했다. 첼루나는 그를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나도 즐거웠어.”

사실 즐겁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익한 대화였음은 분명했다. 앰벌리 라크문을 절대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겠다는 귀중한 교훈을 주었으니.

두 사람은 서로 예를 갖춘 뒤 돌아섰다.

각자 생각도, 감정도 어지러웠다.

* * *

앰벌리 라크문은 첼루나 공주의 사나운 시선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 그래, 그건 아마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마음이었다. 모두의 생각이 같지는 않겠지만.

혼자 숨어 외롭게 울던 공주. 그 주제에 악착같은 자존심은 남아 맹수처럼 포악한 눈빛을 짓던 공주.

그토록 외롭고 포악하면서, 작고 귀여운 다람쥐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부드럽게 풀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참으로 신비로웠다. 쓸쓸하고 오만하면서도 이따금 비치는 눈빛은 다정했다.

붉은 머리칼은 태양이나 불꽃처럼 정열적이었고 금빛 눈은 진짜 금속처럼 예리했다.

그런 공주에게 앰벌리는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 마음은 전생에 지속되었다.

앰벌리는 공주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쩌면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걸지도 모른다.

힘없는 평민으로 시작해 황자의 신뢰받는 기사 자리까지 올라간 그는 가까스로 거머쥔 영예와 권력을 스스로 놓고 싶지 않았다.

천덕꾸러기 공주를 편들어 봤자 제게 무슨 이득이 있으랴. 오히려 자신도 덩달아 낙인찍혀 앞으로 모든 권력에서 소외될지도 모른다.

그토록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이유로 앰벌리는 공주의 역경을 그저 먼발치에서만 지켜보았다. 속으로는 안타까워하며, 그러나 아무런 행동도 없이.

그런 면에서 그의 사랑은 다른 누군가의 사랑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훗날 공주를 위해 목숨마저 바칠 어느 남자는 남들의 시선과 가문의 핍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주를 만났으니.

데아론 텔로아는 아무리 그래도 후작의 아들이니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고, 부모 양쪽이 평민인 자신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핑계 댈 수도 있었지만, 글쎄.

앰벌리가 데아론의 위치에 있었다면, 과연 그는 데아론과 똑같은 선택을 내렸을까.

어차피 공주는 모두를 튕겨 내는 사람이었다. 앰벌리는 그 사실을 위로 아닌 위로 삼았다.

내가 다가가 봤자 저분은 나를 거부하실 거야. 그러니 쓸데없는 짓으로 부담 드리지 말자.

이 또한 데아론 텔로아의 사랑과 달랐다. 그 상냥하고도 용감한 소년은 집요하지만 강압적이지는 않게 상처받은 공주의 마음을 조심히 두드렸고, 마침내 그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텔로아 후작의 사생아 차남과 천덕꾸러기 막내 공주가 서로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앰벌리는 그게 헛소문이었으면 했다.

그러던 어느 밤, 야간 순찰 중이던 앰벌리는 우연히 야릇한 소리를 엿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바스락대는 소리와 옅은 신음만 들렸기에 앰벌리는 혹여 누군가 다친 건 아닐까, 아니면 침입자라도 들어왔나 싶어 조심히 접근했다.

“하아, 데아론.”

“첼루나.”

그러나 그건 부상자도 침입자도 아닌 공주와 기사의 아찔한 밀회였다. 달뜬 숨소리와 녹진한 속삭임이 들렸다.

그건 흔한 삼류 애정 소설에 나오는 고수위 장면처럼 천박하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어렴풋이 목격한 것만으로도 너무 절절해서, 너무 지순해서, 숨이 탁 멎고 심장이 굳는 느낌이었다.

앰벌리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가서 방해할 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못 본 척 조용히 물러나는 게 상책일 텐데, 그는 물리적으로 묶인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기사는 다시 공주에게 키스했다. 그러다 우뚝 멈추며 공주의 손을 감싸 쥐었다.

“첼루나.”

기사는 공주의 귓가에 무언가 다급히 속삭였고, 공주는 겁먹은 표정을 짓더니 기사와 나란히 손잡고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갔다.

기사의 예리한 청력이 인기척을 잡아낸 게 분명했다.

연인들은 다른 은밀한 장소를 찾아 도망쳤고, 끝까지 얼굴을 들키지 않은 방해꾼은 덩그러니 남겨졌다.

굳어 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난폭하게, 잔혹하게, 너무 빠르게.

평소에는 늘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의 앰벌리가 지금은 이 홧홧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손끝까지 잘게 떨었다.

그 격정의 이름은 아마도 질투였다. 또는 절망, 진노, 증오, 집념. 하나같이 추악하게 끈적이는 것들이었다.

당시 미처 온전히 자각하지도 못한, 아마 사랑이라고 부를 법한 그 감정 때문에 앰벌리는 늪에 빠졌다.

그는 그 늪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데아론 텔로아는 열아홉 살에 마수 토벌을 떠났다. 황제가 본격적으로 아들을 지지하며 딸을 외국으로 내보낸 시점이었다.

떨어져 지내는 기간에 공주의 마음이 식기를 앰벌리는 내심 바랐다. 그러나 그의 소원이 이뤄지기는커녕,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결혼이라고요?”

공주에게 결혼 명령이 떨어졌다. 공주 본인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지방에 사는 어느 배불뚝이 늙은이 하급 귀족의 후처로.

공주는 본래 성질머리답게 격렬하게 반항했지만 상대방은 황제였다. 소리 좀 지른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황제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자를 죽이고 태어난 주제에 어미를 복제한 듯 빼닮은 막내딸의 얼굴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 당시 공주의 나이 스무 살, 제국의 혼인 적령기에 퍽 근접한 나이였다. 조금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막상 결혼한다면 그리 특이하게 여겨지지는 않을 나이.

황제는 딸을 팔아치우듯 시집보내 그녀를 제 시야에서 아예 치우고자 했다.

그는 좋은 혼처를 알아봐 주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고, 젊고 예쁜 신부를 들이게 된 늙은 지방 귀족만 변태처럼 좋아했다.

그 결정을 듣고 공주가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유독 간절하게 죽고 싶었는지 오직 공주 본인만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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