빳빳하게 굳은 공주에게 기사는 공손히 인사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녀에게 모자를 내밀었다. 첼루나는 그것을 기계적으로 건네받았다.
“여기서 다 만나네, 라크문 경.”
첼루나는 가식을 떠는 시늉도 없이 서늘하게 말했다. 뒤에서 엘리나와 호위 기사는 앰벌리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황자의 심복을 향한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앰벌리는 곧장 사과했다. 이 또한 가식과는 거리가 먼 언사였다.
온갖 사교계 화법을 동원하여 화기애애한 척하는 대신 첼루나는 그에게 대놓고 냉담했고, 앰벌리는 이에 고분고분 수그렸다.
“불쾌했다니, 그럴 리가.”
첼루나는 그제야 최소한의 가면을 썼다. 여기서 그에게 날을 세워 봤자 얻는 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그와 언젠가 진짜로 친해져야 할 사이였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전생에 너는 언제부터 황녀 전하를 위한 첩자였니? 그에게 묻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설마 그 시기도 전생과 달라졌니? 지금 너는 실제로 누구 편이야?
혼자 회귀한 자의 답답함과 쓸쓸함이 또다시 그녀를 내리쳤다.
물어보고 싶은 말은 산더미인데, 물어볼 수가 없다. 그리고 자신의 궁금증이 더는 유효한지도 불확실했다.
전생에 앰벌리는 결과적으로 황녀의 편이었지만 이번 생에는 또 어떨지 모른다.
첼루나가 성녀가 되고 황녀가 1년 일찍 유학을 떠난 지금, 앰벌리의 선택이 과거와 같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대는 시내에 어쩐 일이야?”
“오늘 휴가라 잠깐 나왔습니다. 마침 살 물건도 있었고요.”
“그래? 원하는 걸 찾았기를 바라.”
“네, 공주님. 딱 필요한 것을 찾았습니다.”
“다행이군.”
뒤늦게 태도를 바꾸어 앰벌리와 선선한 대화를 이어 가며 첼루나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어떤 욕구를 따르는 게 맞을까?
‘이자를 떠보고 싶은데…….’
지금 앰벌리가 누구의 편인지, 벌써 마음은 황녀에게로 돌아섰는지, 아직은 황자에게 뼛속까지 충성하는지, 살가운 척하며 캐물을 수도 있었고.
‘그랬다간 여지를 줄까 봐 불안해.’
앰벌리가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직감에 따라 그와 거리를 두며 철벽을 세울 수도 있었다.
첼루나는 고뇌에 빠졌다. 그녀의 정치적 판단은 전자를 옹호했고 그녀의 양심과 신의는 후자를 주장했다.
자신을 향한 앰벌리의 호감을 이용해 짐짓 그에게 눈웃음을 치고 사근사근하게 굴며 속내를 캐내는 게 황녀에게는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생에는 언니에게 충성을 맹세한 첼루나는 그 선택지를 두고 갈등했다.
‘여러모로 너무 몹쓸 짓이야.’
데아론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설령 데아론이 영영 모른다고 해도, 진심 없이 순전히 정략적으로만 앰벌리의 감정을 이용한다 해도, 오직 데아론 한정 생생한 첼루나의 양심이 그녀를 아프게 찔렀다.
‘데아론이 나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상관없었겠지만…….’
첼루나 혼자 데아론을 사랑하는 상황이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으리라.
자기 진심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마음을 숨기고 엉뚱한 남자를 유혹해서라도 그녀는 원하는 것을 얻어 냈으리라. 그 또한, 오직 데아론을 위해.
그러나 애정과 신의가 쌍방이라면 첼루나는 결코 데아론을 배신할 수 없었다.
연인의 지순한 마음을 모독하는 그 어떤 행위도 감히 하기가 꺼려졌다.
‘이건, 좀, 너무 바람피우는 것 같잖아.’
물론, 자신이 앰벌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고 해 봤자 좀 더 많이 웃고 좀 더 상냥하게 대하는 것뿐이겠지만, 그 함의를 생각했을 때 결과적으로 그릇된 일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첼루나의 양심은 미약하게나마 뻗어 나가 앰벌리를 살짝 건드렸다.
절대 데아론만큼만은 아니었지만, 첼루나는 앰벌리를 상대로도 죄책감을 느꼈다.
‘이 사람이 나를 정말로 좋아하는 거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실컷 써먹어야지. 그녀의 냉정하고 비열한 내면이 부추겼고.
그건 데아론에게도 앰벌리에게도 못 할 짓이야. 사람 마음을 그렇게 이용해선 안 돼. 그녀의 자그맣고 양심적인 목소리가 나무랐다.
“그럼 이제 환궁하는 건가?”
“네, 공주님.”
결국, 어느 쪽이 이겼을까. 첼루나는 입을 열었다.
“마침 잘됐네. 같이 걸어서 돌아가지.”
그건 아마도, 삶의 많은 경우 왕왕 그렇듯 목소리가 큰 쪽이었다.
“날씨가 좋아서 일부러 마차를 부르지 않았어.”
첼루나는 앰벌리를 떠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 데아론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과하게 친절하게 굴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영광입니다, 공주님.”
함께 걷자는 공주의 제안에 앰벌리는 기쁘거나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그저 한결같이 매끄럽고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꾸벅일 뿐이었다.
도리어 엘리나와 공주의 호위 기사가 각각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다.
그 둘이 불안과 의구심, 배신감마저 엿보이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볼 때 첼루나는 앰벌리에게 집중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뭐를 사러 나왔냐고 물어본다면 너무 주제넘은 일일까?”
“설마요. 공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주제넘은 게 있겠습니까. 고귀하신 황족인데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해 아무 질문이나 던졌던 첼루나는 유려하게 받아치는 답변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정작 앰벌리 본인은 말짱한 얼굴이었다.
“그러니 말씀드리겠습니다. 별건 아닙니다. 원래 끼던 장갑이 너무 헤져서 새 장갑을 샀습니다.”
“……그렇구나.”
첼루나는 자신의 결정을 거의 곧장 후회했다.
앰벌리를 떠보겠다니, 너무 야심 찬 시도였나. 이 유들유들하면서도 점잖은, 한마디로 속내를 알 수 없는 능구렁이를 상대로.
이래서 첼루나는 앰벌리가 불편했다.
조급한 그녀는 항상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어야 마음이 편한데,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그러기가 어려워서.
텔레스와의 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쥔 쪽은 황녀였지만 적어도 황녀는 첼루나가 인정한 주군이었다.
설령 황녀의 행동과 동기가 첼루나의 이해 밖이어도 그 사실은 첼루나를 불안하게 하지 않았다. 어쨌든 황녀는 확실하게 아군이니까.
하지만, 앰벌리는? 지금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공주님께서는 교회에 다녀오십니까?”
첼루나의 궁리가 너무 길어지기 전에 앰벌리가 예바르게 물었다. 첼루나는 고민을 싹 감추며 담백하게 끄덕였다.
“응, 맞아. 수도를 떠난 자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왔어.”
첼루나는 넌지시 설명했다. 그녀는 ‘수도를 떠난 자’라는 표현에 은근히 강점을 두었다.
수도를 떠난 황녀를 자신이 에둘러 언급할 때 앰벌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앰벌리는 첼루나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을 상기했다. 그의 안색이 명백하게 어두워졌다. 첼루나는 흠칫했다.
“텔로아 후작의 차남을 위해 기도하셨나 보군요.”
서늘한 말투가 노골적이었다. 첼루나는 아예 우뚝 멈췄다. 조금 간격을 두고 따라 걷던 시녀와 호위도 먼발치에서 주춤했다.
“정말로 그분을 그렇게 아끼십니까?”
‘그자’가 아니라 ‘그분’이라고 높여 칭하는 게 엄청난 물리적인 고통인 것처럼 앰벌리는 눈빛을 구겼다. 첼루나는 전략을 잊고 쳐다보았다.
‘뭐야…….’
이 사람, 정말 이상하다. 아니, 위험하다. 어째서 지금껏 실감을 못 했을까.
과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기 원래 주군의 등에 칼을 꽂은 놈인데, 어찌 그런 자를 상대로 방심했을까.
갑자기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고 시리고도 홧홧한 눈빛을 짓는 사내 앞에서 첼루나는 여태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직감했다.
‘날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 눈빛은, 저 넘실대는 감정은.
‘나한테…….’
집착이라도 하는 것 같잖아.
“응.”
첼루나는 사내의 연청색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뚝뚝하게 말했다.
“아껴.”
내가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정도보다도, 더.
부끄러운 마음이 아니니 숨길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그녀와 데아론 텔로아가 연인이라고 온 나라에 소문이 퍼진 와중에 부정하는 것도 우스웠다.
다만, 첼루나는 자신의 고백에 도발을 섞었다.
너를 똑바로 보며 내가 다른 남자를 원한다고 시인한다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진실로 궁금했다.
자신의 그 건조한 호기심이 데아론에게 독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분은 공주님의 이복인 황녀 전하의 기사입니다. 그런데도요?”
앰벌리가 되물었다. 그의 화법은 여전히 깍듯했으나, 늘 온화한 가면을 덧칠했던 시선은 어딘지 모르게 야만적이었다.
“이복이든 동복이든 무슨 상관이야? 오히려 동복이어도 더.”
첼루나는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날카롭게 받아치다가 아차 싶어서 말을 뚝 그쳤다. 그녀는 제 실수를 뒤늦게 후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쳤어, 첼루나, 그렇다고 이 사람 앞에서 블레논을 욕하면 어떡해? 아직 얘가 누구 편인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오히려 동복이어도 더 괴롭게 하는데. 대충 그런 식으로 내뱉으려고 했었다.
양쪽 부모가 같든 아버지만 같든 무슨 상관이야. 우리 모두 피붙이고 뭐고 서로 물어뜯으려는 건 똑같아.
동복이니까 너는 황자 편 아니냐, 그 논리가 이제는 지긋지긋해서 하마터면 솔직하게 발악할 뻔했다. 첼루나는 애써 감정을 다스렸다.
“이복이든 동복이든 다 같은 폐하의 자식이야. 내가 이복 언니의 기사를 마음에 담은 게 그리 문제인가?”
첼루나는 서둘러 말을 바꿨다. 앰벌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음에 담았다, 라. 그는 공주의 표현이 썩 달갑지 않았다.
“그렇군요. 다 같은 폐하의 자식이죠.”
앰벌리는 앵무새처럼 대꾸했다. 첼루나는 잠시 수치심으로 얼굴이 더워졌다.
다 같은 폐하의 자식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둘러댄 말이 스스로 곱씹어도 창피했다.
“하지만 가족끼리도 더 아끼는 쪽과 덜 아끼는 쪽이 있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공주님은.”
앰벌리의 눈빛은 다시 가면을 썼다. 하지만 첼루나는 그의 유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이미 많은 진심이 담겼다고 생각했다.
“작년부터 황녀 전하와 훨씬 친하게 지내셨죠.”
이제는 앰벌리가 떠보는 쪽이었다. 첼루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했다.
“우애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중 가장 오래가는 것은 자매애라고 들었습니다.”
앰벌리가 나긋하게 덧붙였다. 그가 잠시 뜸을 들이는 틈에 첼루나는 재빠르게 동의했다.
“맞아, 나도 그렇게 들었어.”
사실 그런 말은 오늘 처음 듣지만, 첼루나는 이를 퍽 요긴하게 써먹었다.
맞아, 자매애는 오래가지.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쭉 황녀 전하를 따를 생각이야. 그런 우회적인 선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