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114)

“이제는 제가 웃어도 되나요?”

데아론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실소마저 다정했다. 데아론은 첼루나의 손등에 보드랍게 입을 맞췄다.

“당연히 당신 하나뿐이죠. 제 마음을 의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맹세했다. 첼루나는 묽게 웃었다. 웃음에는 설움이 깃들었다.

“그래, 나는 그대를 믿어.”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어. 실제로 전생에 너는 한결같이 나 하나만 사랑해서, 나를 위해 죽고 말았는데.

“그럼 우리 서로 믿기로 해요.”

데아론은 간편하게 말했다. 첼루나는 픽 웃었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끄덕였다.

“그래.”

이후, 몇 마디 안부 인사와 그간 못 나눈 대화가 조곤조곤 흘렀다.

데아론의 출생을 걸고넘어지는 소문이 수도를 휩쓰는 바람에 그는 한동안 저택에서 근신해야 했고, 첼루나는 내내 그를 만나지 못했다.

이제야 그들은 데아론이 서부로 떠나기 전에 짧게나마 재회할 시간을 얻었다. 놓친 이야기를 차근차근 나눈 뒤 슬픔을 참으며 작별을 건넸다.

“공주님, 당신께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아쉬움을 삼키고 두려움을 누르며 끝내 돌아서기 직전, 데아론은 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무언가를 꺼내 첼루나에게 내밀었다.

“선물이라면 선물이고, 정표라면 정표겠죠. 어쨌든 제가 없는 사이 간직해 주셨으면 합니다.”

손수건이었다. 평범한 하얀색 무명, 그리고 모퉁이에 새겨진 섬세한 제비꽃 자수.

첼루나는 이 문양을 기억했다. 제비꽃은 데아론의 어머니가 사랑했던 꽃이었고, 그의 홍채와도 색깔이 같았다.

그래서 그가 쓰는 손수건에는 흔한 귀족들의 머리글자 대신 꼭 제비꽃 자수가 있었다.

“매일 저를 생각해 주시겠다고 했으니, 매개체가 있으면 도움이 될까 해서요.”

데아론은 생긋 웃었다. 첼루나는 목이 메어 잠잠히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보들보들한 천을 꼭 움켜쥐었다.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이 손수건으로 전생에 너는 내 눈물을 닦았다.

우리가 정말로 처음 만났을 때, 어둠 속에 혼자 숨어 초라하게 울고 있던 내게 너는 오직 다정함을 품고 다가왔어.

그때 제 뺨에 닿았던 뽀송한 천의 감촉이 아직도 선명했다.

가까웠던 소년의 숨소리, 들꽃을 닮은 따스한 눈, 모든 것이 어제처럼 생생했다.

“매개체 같은 게 없었어도 매일 그대를 생각했겠지만, 그래도 기뻐.”

첼루나도 데아론을 보며 힘껏 웃었다. 안면의 근육에 팽팽하게 힘주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울어 버릴까 봐 평소보다도 웃는 게 힘들었다.

연인과 이별하기 싫었다. 2년이든 두 달이든, 심지어 이틀이든 너무 길었다.

데아론이 이번에는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까 봐 지레 겁먹는 자기 자신이 싫었다. 불길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

첼루나는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였고, 데아론은 신호를 알아들었다.

소년은 소녀의 뺨을 다정히 감싸며 입술을 포갰다. 지금은 시녀들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이번 생의 첫 이별이었다.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토벌대 출정과 황녀의 출국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토벌대는 봄기운이 가장 무르익었을 때 떠났고, 황녀는 봄이 저물 즈음에 출발했다.

혼자 남은 첼루나는 독사 굴에 버려진 느낌이었다.

적이 된 오빠와 처음부터 저를 미워한 아빠, 정치적으로는 아군이지만 사적으로는 얼음보다 차가운 계모에게 둘러싸인 채.

그나마 공주궁의 시녀들과 교회의 사제들이 그녀가 숨 쉴 틈을 마련해 주었다.

시녀들은 공주님의 편이었고, 성녀의 지위는 사제들의 호감과 보호를 보장했다.

특히 첼루나에게 처음 성물을 빌려 줬던 젊은 사제는 이제 그녀의 친구나 다름없었다. 이름은 마누엘. 그는 오늘도 대교회의 기도실에서 그녀와 만났다.

아무리 황제라도 성녀가 교회에 들락거리는 걸 막을 명분은 없으므로, 첼루나는 여러 구호 사업을 돕는다는 핑계로 교회를 꾸준히 방문했다.

황궁에서 첼루나는 사실상 고립된 상태였다.

충직한 아랫사람들을 거느린 공주궁에서는 그나마 자유로웠으나, 다른 곳에서는 황제와 황자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주군을 빼앗긴 신하는 이토록 무력했다. 첼루나는 언니의 신속한 귀환을 기원했다.

“오늘은 조금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공주님께서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닐지.”

“괜찮습니다.”

마누엘이 친절하게 걱정을 표하자 첼루나는 싱긋 웃었다.

그녀는 기도실의 제단 앞에 꿇어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오랜 집중 끝에 다리가 저렸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시는 일이라면 주님께서 반드시 도우실 겁니다. 너무 근심하지 마세요.”

마누엘은 공주를 부드럽게 달랬다. 첼루나는 사제를 보며 유령처럼 웃었다.

“고맙습니다, 사제님.”

교회에 들를 때마다 제단 앞에서 무릎까지 꿇어 가며 기도하는 건 성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한 연극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신에게 매달렸다. 온몸이 끊어질 듯 간절하게,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두 번째 삶을 시작하고 본의 아니게 성력으로 마수들을 무찌른 첼루나는 더는 이 세상에서 초월적 존재의 영향력을 부정하지 않았다.

누구는 신의 존재를 회의하며 종교인들을 비웃고 첼루나 역시 과거에는 그만큼 냉소적이었지만, 본인이 여태 겪은 비현실적인 일이 워낙 많은지라 더는 고집부릴 수 없었다.

정말로 전지전능한 창조주인지 미신에 가까운 정령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뭔가 있다. 뭔가 있어서 첼루나는 회귀까지 했고 지금 성녀의 이름을 얻었다.

첼루나는 겸허히 몸을 낮췄다. 이런 거라도 해야 했다. 오만하게 뻗대느니 자존심을 꺾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보는 게 나았다.

‘제발, 데아론이 무사하게 해 주세요.’

연인의 안전을 위해 그녀는 빌었다.

성녀의 힘을 거저 얻었을 뿐 전생을 통틀어 신을 찾지도 않던 그녀가 뒤늦게 기도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싶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이번 생에도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세요. 정말 착한 아이입니다. 부디 보살펴 주세요.’

권선징악은 다 동화적인 망상이라지만, 그래도 세상에 정말로 정의라는 게 있다면 부디 착하고 올곧은 데아론이 끝까지 살아남게 해 줘. 그래야 공평하잖아.

부디 데아론의 선량함이 공정하게 보답받기를 바라며, 첼루나는 오늘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 또한 스스로 선택한 주군을 위해 진지하게 기도했다.

본인의 기도가 끝나고 나면 첼루나는 반드시 마누엘 사제의 축복까지 받아 냈다.

얼결에 성녀가 된 자신보다는 처음부터 선량하고 신실했던 성직자의 기도가 훨씬 믿음직했다.

할 일을 다 마친 첼루나는 사제와 함께 기도실을 나왔다. 밖에서는 엘리나와 호위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첼루나는 시녀와 호위를 데리고 건물을 벗어났다.

바깥의 길거리는 초여름의 햇살에 흠뻑 젖어 아름다웠다. 그래, 어느새 여름이었다.

데아론이 수도를 떠난 지 약 두 달째였고, 텔레스가 국경을 넘은 게 약 한 달 전이었다.

‘거의 5년째네. 아니지, 딱 5년째야.’

또한, 첼루나가 회귀하여 두 번째 열세 살을 맞이한 지 정확히 5년째 되는 시기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마탑 사건이 터진 건 1년 전이고.’

작년 이맘때쯤 첼루나는 자신이 성녀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데아론의 연인이 된 것도, 언니의 공개적 아군으로 인정받은 것도 전부 예측 밖이었다.

‘……아직도 가끔은 실감이 안 나.’

처음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열세 살 소녀의 몸에 다시 떨어졌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이건 꿈이 아닐까, 또는 기괴한 사후 세계일까, 정신없이 고민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모종의 이유로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이후로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려왔다.

과거를 자주 돌아보기는 했지만, 그건 단지 전생의 기억을 현재와 비교하여 앞으로의 계획을 짜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토록 숨차게 꾸역꾸역 움직이다 보면 문득 허탈함과 두려움, 일종의 무력감마저 그녀를 짓누를 때가 있었다.

나는 정말로 맞는 길을 가는 중일까? 나는 내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를 정녕 제대로 써먹고 있는가?

어쩌면 다 망칠지도 몰라. 지난 생에도 그랬잖아. 내 이야기는 불행으로 끝났어. 이번 생에도 그럴지는 아무도 몰라.

이미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많은 게 틀어졌고, 첼루나는 이번이 두 번째 삶임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확신하지 못해 불안감에 시달리며 목을 옥죄는 외로움과 사투했다.

전생을 기억했기에 싸움을 준비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같은 이유로 지독하게 외로웠다.

‘보고 싶어…….’

데아론이 그리웠다. 서부에 무사히 잘 도착했다고 얼마 전에 편지를 보낸 데아론.

하지만 사랑하는 연인조차 때로는 첼루나의 결핍을 채워 주지 못했다.

전생에 데아론은 죽고 첼루나는 혼자 회귀했기에, 그녀는 멀쩡히 되살아난 연인을 떠올릴 때마다 안도와 기쁨 외에도 죄책감과 답답함에 꿰뚫렸다.

전생에 데아론은 첼루나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존재였다. 첼루나는 그와 모든 비밀과 추억을 공유했다.

하지만 자기 혼자 회귀한 지금, 부분적 침묵은 불가피했다.

‘너도 제발 나를 기억했으면.’

자기는 6년간 사랑한 기억을 전부 세세히 간직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고작 몇 개월짜리 연애로 마음을 가늠한다는 게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아니야. 너는 절대 기억하면 안 돼.’

모순적인 마음이었다. 데아론도 전생의 기억을 되찾아 아무런 벽 없이 대화하고 싶다는 갈망과 별개로, 첼루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만약 네가 기억을 되찾으면…….’

너는, 나를 미워하게 될까?

너는 나를 지키려다 죽었잖아.

온전히 네 선택이기는 했지만, 내가 너를 강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없었으면 네가 희생할 이유도 없었다.

비록 선량하고 고결한 아이지만, 너도 결국 인간이다. 어찌 아프고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으랴.

비참한 죽음의 때를 떠올리고도 네가 나를 여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설령 네 마음이 식더라도, 나는 붙잡을 자격이 없을 텐데.

“앗.”

여러 생각과 감정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술렁이던 그때, 유독 바람이 세게 불었고, 모자 끈이 훅 풀렸다.

첼루나는 길 한복판에 우뚝 멈추며 팔을 뻗었다. 시녀와 호위 기사 역시 당황하며 공주의 모자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훨씬 빨랐다. 그 사람은 정녕 느닷없이 나타났다. 첼루나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우연으로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공주님.”

누구보다 먼저 공주의 모자를 붙잡은 앰벌리 라크문은, 언제나처럼 정중한 태도로 그녀를 맞이했다.

“제가 도움이 돼서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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