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14)

언니가 쫓겨나고 연인이 떠날 동안 첼루나는 황궁에 남았다. 전생과 같으면서도 다른 전개였다.

그녀 혼자 남겨진다는 점은 같았으나, 그녀를 둘러싼 상황이 너무 달랐다.

언니도 없고 연인도 없다. 앞으로 당분간 황궁에 남은 아군이라곤 그녀를 꺼리는 황후뿐이리라.

그 생각에 첼루나는 아찔해졌다. 하지만 이보다도 더 심각한 고민은 많았다.

‘이번에는 얼마나 걸릴까? 2년? 3년?’

전생에 텔레스는 동생이 열아홉 살일 때 떠났다가 스물한 살일 때 돌아왔다. 마수 토벌도 그때쯤 끝났다.

전생에 첼루나가 스물한 살이던 해에는 황제가 쓰러져서, 황녀도 토벌대도 그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전생과 같은 기간이 걸릴 거면 2년. 전생과 같은 시기에 돌아오는 거면 3년.’

지금 떠나는 이들은 전생처럼 2년을 꽉 채운 뒤 그녀가 스무 살일 때 돌아올까, 아니면 전생과 같이 그녀가 스물한 살일 때 돌아올까.

이제 와서 전생을 기준으로 앞으로의 일을 가늠하는 데 의미가 있을까?

황제가 벌써 움직이기 시작한 시점부터, 아니. 공주가 전생과 다르게 성녀가 된 시점부터 흐름은 이미 엇나간 듯한데.

‘이번 생에는 더 빨리 돌아와야…….’

첼루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는 내내 지병이 있던 황제가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앓아누웠던 걸 기억했다.

당시 황태자였던 블레논은 곧장 섭정을 핑계로 권력을 잡았고, 그리고…….

“공주님.”

첼루나는 생각을 그쳤다. 그리운 목소리가 심장을 관통하고 다른 사고를 지웠다. 이제부터는 단 한 사람에게 집중할 때였다.

“데아론!”

후원에서 초조하게 배회하던 첼루나는 연인의 음성을 듣자마자 휙 뒤돌았고, 냅다 달려가 그의 목을 와락 안았다.

데아론은 곧장 마주 안았다. 그녀가 제 목을 끌어안은 것보다도 더 가깝고 뜨겁게 그녀의 허리를 당기며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주변에는 공주의 시녀들이 있었지만 둘 중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회귀 후 자기 시녀들을 확실하게 휘어잡은 첼루나였다.

공주님과 연인의 적나라한 포옹을 보고 감히 흉보거나 소문을 퍼트리거나 오래 쳐다볼 자는 없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 그렇게 닿아 있었다. 서로 만난 지 너무 오랜만이라 대화가 시급했지만, 말없이 그저 안고만 있는 시간도 소중했다.

“데아론, 그동안 너무 고생했어.”

“저보다는 공주님이 더요.”

첼루나가 마침내 속닥였다. 데아론은 다정하게 웃었다.

사실 그는 미소보다 울상에 어울리는 기분이었다. 최근 시국의 흐름을 고려하면 그가 웃을 일은 별로 없었다.

“있잖아, 나는 그대와 나에 대해 그딴 천박한 말을 퍼트린 자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여 버리고 싶어.”

첼루나는 스산하게 씹어 뱉었다. 싸늘한 말투에 비해 연인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퍽 다정했다. 데아론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공주님, 함부로 사람 죽인다는 표현 쓰면 안 돼요.”

데아론은 진심으로 타일렀다. 그의 보랏빛 눈에는 정죄보다 근심이 일렁였다.

소년의 눈에 그의 사랑스러운 공주님은 오직 선하고 어여쁜 것으로 이루어진 사람이었다. 죽여 버린다니, 그런 살벌한 언어는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첼루나는 푸핫 웃었다. 일순 모든 분노와 걱정을 잊을 만큼 경쾌한 폭소였다.

고작 ‘죽여 버린다’는 표현을 듣고 경악하다니. 자신을 향한 데아론의 말랑말랑한 오해가 싫지는 않았다.

“알겠어, 자제할게.”

첼루나는 즐겁게 약속했다. 올곧고 다정한 너의 새끼발가락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부족한 나는 네가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할 때마다 기쁘다.

마치 나도 너처럼 올곧고 다정한 사람인 것처럼, 누군가를 죽여 버리겠다고 벼르는 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렇게 착각하게 돼. 그렇게 맞춰 가게 돼.

아아, 데아론. 너는 내 유일한 도덕이자 최고의 스승이야. 네가 너무도 따스하고 상냥하기에, 나 또한 너를 보며 조금씩 배워 가.

“하지만 화가 나는걸. 멋대로 떠드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잖아.”

첼루나는 다시 분노를 떠올리고 섬뜩하게 푸념했다.

‘멋대로 떠든다’도 힘껏 순화한 표현이었다. ‘주둥이를 나불댄다’거나 ‘혀를 과하게 놀린다’ 등이 훨씬 솔직했다.

“보고 싶었어, 데아론.”

“저도요.”

“잘 지낸 거지? 살이 좀 빠진 것 같아.”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공주님이야말로 왜 이렇게 핼쑥해지셨어요.”

“음, 그 정도는 아닌데. 내가 환자처럼 보인다는 거야?”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고요. 그냥, 마음고생하신 게 티가 나서 속상해요.”

데아론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첼루나의 머리에 이마를 기댔다. 첼루나는 눈을 감고 그의 체향을 들이켰다. 심장 부근이 저릿하게 아팠다.

‘이번 생에도 떠나보내야 한다니.’

전생과는 달리 당당하게 연애할 수 있어서 기뻐했거늘.

내 오빠 놈이 너와 나에 대한 악소문을 퍼트리고, 전생보다 1년 일찍 네가 서부로 떠나면서, 우리는 또다시 이별하는구나.

전생의 기억이 거의 쓸모없어지는 바람에 이번에는 얼마나 버텨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애초에 다시 만날 수 있기나 할지 그것조차 확신이 부족했다.

“데아론.”

“네, 공주님.”

“다치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비명이 첼루나의 턱밑까지 차올랐다. 전생에 마수 토벌을 나갔다가 죽은 자들이 있었다.

데아론은 영웅이 되어 무사히 생환했지만 첼루나는 안심하지 못했다. 사건의 흐름이 과거와 달라졌기에.

제발, 몇 가지는 절대 변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건 명령인가요, 부탁인가요?”

데아론은 눈꼬리를 생긋 접었다. 첼루나는 데아론이 마지막으로 똑같은 말을 했던 때를 떠올렸고, 아랫배가 조금 뜨끈하게 조였다. 그러나 그런 열기는 지금 아무것도 아니었다.

“둘 다야.”

첼루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나는 네게 명령하여 복종을 강제하며, 동시에 네 앞에 무릎을 꿇는 심정으로 네게 애걸한다.

부디, 다치지 마. 죽지 마. 이번 생에는 내게 더 일찍 돌아와.

“어느 쪽이든 따르겠습니다.”

데아론이 다짐했다. 그는 연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마음 같아서는 훨씬 화끈하게 키스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주변의 시녀들이 믿을 만한 자들이라 해도 그런 노골적인 애정 행각은 역시 쑥스러웠다.

“당신께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제가 그리우실 틈도 없을 거예요.”

데아론은 빙긋 웃었다. 첼루나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녀가 정직하게 웅얼거렸다.

“나는 하룻밤만 못 봐도 그대가 그리워.”

이번에 데아론은 참지 못하고 첼루나의 입술에 빠르게 뽀뽀했다. 첼루나는 잽싸게 입술을 벌려 뽀뽀를 키스로 바꾸었다.

“사실 저도 그래요.”

이윽고, 아까보다 사뭇 촉촉해진 입술로 데아론은 낮게 헐떡이며 고백했다.

“하룻밤도 너무 깁니다.”

고작 반년간의 연정이 소년을 이렇게 집어삼킬 줄 누가 알았을까. 데아론은 산 채로 잡아먹히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풋사랑이라는 가벼운 단어조차 모독이었다. 데아론은 진심으로, 연인을 위해 이 세상과 맞설 수 있을 만큼 공주를 사랑했다.

“매일매일 그리울 겁니다. 매일 당신을 생각하겠죠. 그러다 보면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러니까 당신도 저를 매일 생각해 주세요.”

“당연하지.”

첼루나는 온갖 시적인 고백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늘어놓는 애인을 기특하게 여기며 다정하게 응시했다. 데아론은 그 꿀 같은 시선에 잠겨 녹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작은 불안 하나가 존재했다.

“공주님.”

“응, 데아론.”

“……저 없는 사이에, 마음 바뀌시면 안 돼요.”

스스로 뱉고 나서도 너무 유치하게 여겨지는 발언이라 데아론은 목덜미부터 장미색으로 물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시선은 피하지 않고 꿋꿋이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만큼 진지한 불안이었다. 사실 작다고도 볼 수 없었다.

“절대 안 바꿔.”

첼루나는 아까처럼 웃었다.

자신의 험악한 말을 듣고 충격받았던 데아론의 태도가 우습고도 귀여웠듯, 지금도 어처구니없는 당부가 실소를 자아냈다.

데아론 혼자 계속 심각했다. 첼루나에겐 황당한 얘기였지만, 데아론에겐 타당한 불안이었다.

첼루나와 달리 데아론은 과거 6년의 기간을 기억하지 못했다.

전생에 그들이 숱한 역경을 견디고도 사랑했던 시간은 그에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불과 세 번째 만남에 처음으로 키스해서 고작 반년을 이어진 사랑이니, 나와 오래 떨어져 있으면 언제 공주님의 마음이 식을지 모른다. 데아론은 진지하게 걱정했다.

“웃지 마십시오.”

데아론은 뚱하게 비난했다. 첼루나는 그제야 표정을 가다듬고 본인도 정색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감싸며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웃어서 미안. 그런데 진짜야. 내 마음이 바뀔 일은 없어.”

전생에도 6년 내내 변한 적 없고, 회귀 후 5년째 한결같은 마음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는 게 익숙한 그녀지만, 데아론을 향한 사랑만큼은 그녀를 확신으로 채웠다.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게 어떤 느낌인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대야말로 마음 바뀌지 마.”

첼루나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뇌리에 이름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루이사 펠르만.

백작 영애의 벌꿀 같은 머리칼이 떠오르자 그녀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서부에서 그대가 그리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어야 해. 알겠지?”

너는 잊었지만, 나는 기억한다. 전생에 너와 혼담까지 오갔던 백작의 귀한 딸을. 단순히 정치 이상으로 너를 좋아했던 그 어여쁜 아가씨를.

첼루나가 데아론의 출정을 탐탁지 않아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 있었다.

전생에 루이사 펠르만은 마수 토벌을 계기로 데아론과 결정적으로 엮였다.

함께 마수 토벌에 참여한 펠르만 백작이 거기서 데아론의 역량을 보고 그를 재평가한 것이다.

그전까지 펠르만 백작은 텔로아 후작과 가깝게 지내는 것과 별개로 그의 사생아 아들은 내심 업신여겼다.

데아론이 마수 토벌을 통해 영웅이 되고 백작 본인의 목숨도 몇 번 구하고 나자 백작의 태도는 급격히 달라졌다.

백작은 장녀 루이사가 데아론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알고 이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후작과 내가 사돈을 맺으면 어떨까? 그럼 나와 황실의 관계 또한 더욱 긴밀해지겠지. 텔로아는 황제와도 사돈지간이니까.

결국 혼담은 혼담으로만 그쳤으나, 당시 첼루나는 루이사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공포에 시달렸다.

루이사 펠르만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첼루나는 연적을 미워하거나 질투할 힘조차 없었다. 아니, 자신이 루이사의 연적조차 될 수 없다고 믿었다.

천덕꾸러기 공주는 자신이 백작의 딸과 경쟁할 수 없다고 여겼다. 친부한테마저 경멸받는 그녀는 뼛속까지 열등감투성이였다.

데아론이 언젠가 자신을 두고 루이사 펠르만 같은 우아한 여자와 결혼하는 상상에 절망했다. 전생에 그녀는 참으로 불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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