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14)

“그 아이는 잘못이 없습니다, 전하.”

첼루나는 다소 서늘하게 덧붙였다.

소문을 퍼트린 황자 측이 문제지 자신과 데아론은 결백하다고 진심으로 믿었기에, 그녀는 황녀의 찡그린 얼굴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첼루나가 언니에게 화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냉엄한 분노는 오직 블레논을 향했다. 현재 그를 직접 찔러도 시원찮을 기분이었다.

‘감히 누굴 건드려?’

너 따위가, 데아론을? 이 미친 황자 오라비 새끼야. 안 그래도 출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애의 상처를 이딴 식으로 후비다니.

“그래, 그건 나도 알아.”

텔레스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녀의 표정은 사뭇 험악했으나, 그녀 역시 동생에게 화풀이할 마음은 없었다.

텔레스는 사납게 한숨짓더니 옆에 있던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역으로 이용할 만한 거리가 있나요?”

현재 황녀의 응접실에는 황녀, 황후, 공주가 둘러앉아 있었다. 일종의 비상 회의였다.

크레온 공작에게는 전갈을 보냈으나 아직 입궁하기 전이었고, 텔로아 후작은 현재 궁에 드나들기는커녕 자기 집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조심하고 있었다.

“일단 뒤를 캐고는 있어. 하지만 낙관은 어려울 것 같다. 황자가 반격의 가능성을 예측하고 대비하지 않았을 리 없고, 만약 이제 와서 황자에 대한 안 좋은 얘기가 돌더라도 사람들은 의심하겠지. 우리가 제 발 저려서 허겁지겁 상대편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린 게 아닐까, 하고.”

황후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녀는 첼루나에게 곁눈조차 주지 않고 오직 딸을 보며 설명했다.

황후의 냉대가 익숙한 첼루나는 상처받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제 언니와 제법 각별했지만 계모와는 갈 길이 멀었고, 어차피 처음부터 기대치는 낮았다.

“젠장.”

텔레스가 작게 중얼댔다. 황후는 딸의 품위 없는 언어에 미간을 옅게 찌푸렸지만 본인도 비슷한 심정이라 대놓고 나무라지는 않았다.

만약 블레논이 옛날의 황제처럼 아랫도리가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자였다면 그의 문란함을 꼬투리 삼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블레논의 성생활은 깨끗했다. 그는 여러모로 잘못된 인간이었지만 적어도 그런 면에서는 거의 강박적으로 청렴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속으로 자신을 혐오했다는 건 전생에 황제가 죽는 날까지 몰랐던 사실이었다.

황자의 혐오는 원망과 동의어였고, 이는 곧 본인의 금욕으로 이어졌다.

황자는 생각했다. 이 모든 건 아버지 때문이라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고 황후를 다시 품지 않았더라면.

내가 태어난 후에 다른 여자와 몸을 섞지 않았더라면. 황후의 불임을 자신하지 않았더라면.

텔레스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기어코 당신의 하룻밤 방만이 그년을 이 세상에 들여놓지 않았더라면.

전부 당신 잘못이야. 처음부터 내 자리였잖아. 당연히 내 자리였어. 나는 당연히 당신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운명이었어.

그런데 변수를 만들어? 내게 경쟁자를 안겨? 그런 식으로 내 어머니께 죄지었어?

사랑, 사랑, 사랑한다면서.

블레논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황족의 사랑이란 전부 그렇다.

황제 폐하는 진심으로 내 어머니를 사랑하여 그분이 돌아가신 후 단 한 명의 여자도 다시 품지 않았고, 그분의 죽음을 부른 첼루나를 시작부터 미워했지.

그럼 뭐 해?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황실의 권력 구도는 이미 꼬일 대로 꼬였다. 당신의 가증스러운 ‘사랑’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블레논은 아비를 싫어했다. 당연히 자신의 자리인 미래의 제위를 두고 이복동생과 경쟁하게 만든 지긋지긋한 아비를.

나는 더 나은 황제가 되리라. 아버지의 실수를 답습하지 않아.

나중에 자신이 권좌에 올랐을 때 또다시 황실에 피바람이 불지 않도록 블레논은 예로부터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툭하면 동복동생을 폭행할 만큼 잔인한 놈이었으나 적어도 음란한 작자는 아니었다.

차라리 그가 그런 면에서 절제력이 모자랐다면 나을 뻔했다. 황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꾹 물었다.

“텔로아 후작의 차남은 당분간 궁에 들이지 않는 게 좋겠어.”

“네, 휴가를 준 상태입니다.”

황후가 냉담하게 지적하자 텔레스는 지친 말투로 답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첼루나를 흘깃했다. 첼루나는 굳은 낯으로 제 손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권력 남용은, 무슨…….”

황후는 기가 차서 탄식 같은 혼잣말을 흘렸다. 첼루나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블레논 측은 마치 텔로아 후작이 작은아들을 황녀의 기사로 입궁시킴으로써 엄청난 부정부패를 저지른 것처럼 떠들어 댔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그게 근본적으로 공정한지 아닌지를 떠나, 후작 정도 되는 고위 귀족이 아들을 위해 그런 자리 하나쯤 마련한 건 통상적으로 흠이 아니었다.

그런 높으신 분들의 암묵적인 관례를 저잣거리의 평민들은 일일이 헤아려 줄 여유가 없었다.

대중은 가장 현명하면서도 우둔했다. 선동이 그들을 휩쓸었고, 그들은 그대로 휩쓸렸다.

권력 남용이라 했으니 권력 남용이겠지. 그들은 기꺼이 텔로아 후작을 욕했다.

그렇다면 문제의 그 사생아와 밤마다 놀아난다는 성녀님과, 그 사생아의 형과 약혼했다는 황녀님은 대체 뭐지?

“일부러 약혼 사실을 발표할 때까지 기다린 것 같아요. 황자 말이에요.”

텔레스는 사나운 안색으로 예리하게 분석했다. 첼루나는 언니의 의견에 동의했다.

황자 그놈, 왜 이렇게 오래 조용하나 싶더니 말을 퍼트릴 가장 적기를 기다렸나 보다.

모리안과 혼약으로 엮인 텔레스는 그의 가문에 던져진 비난을 꼼짝없이 함께 짊어져야 했다.

공식적으로 아무 관계가 아니었다면 적당히 발을 뺄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 그건 거의 불가능했다.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건가요?”

텔레스는 답답한 마음으로 황후를 돌아보았다. 황후는 잠시 침묵하다가 근엄한 낯으로 입술을 뗐다.

“내가 더 알아보마.”

첼루나는 부디 황후의 정보력과 행동력이 이 상황을 타개할 실마리를 제공하기를 바랐다. 최대한 빠르게, 곧.

그러나 그전에 황제가 먼저 선수를 쳤고, 며칠 뒤 그의 발표는 첼루나를 경악에 빠트렸다.

이 세상은 성력과 마력으로 이루어졌다. 그저 태초부터 그러했던 질서였다.

가끔 공기나 토양에 자연적인 마력이 지나치게 응축되기도 하는데, 그런 지역에 서식하는 동물은 마수로 변해 원래보다 곱절은 위협적이었다.

다른 평범한 산짐승과 마찬가지로 마수도 운 나쁘게 마주치지 않는 한 평소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역시 다른 산짐승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마수가 친히 인가에 출몰해 사람과 가축을 해치곤 했다.

제국 서부의 어느 지역은 특히 마수들이 많았다. 이따금 중앙에서 지원군을 보내기는 했으나 토벌과 퇴치는 주로 현지 병력의 몫이었다.

그토록 드문 중앙의 지원군 파견이 첼루나의 전생에는 딱 한 번 일어났다. 그녀가 열아홉 살 때, 황제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자기 아들을 편들기 시작할 때였다.

‘너무 일러.’

첼루나는 시녀를 기다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는 뜻이었다.

‘설마, 이것도 내가 성녀가 됐기 때문인가? 내가 변수야? 또?’

올해 첼루나의 나이는 아직 열여덟 삶, 전생 기준으로 무려 한 해가 일렀다. 마수 토벌은 원래 나중 일이었다. 그런데 왜 벌써 중앙에서 서부에 지원군을 보낸다는 거지?

사건의 시기가 바뀌었으니 그 내용도 달라진 거였다면 좋았으련만.

그러나 앞당겨진 건 시기뿐이었다. 다른 부분은 거의 그대로였고, 이 점이 첼루나를 불안하게 했다.

‘황제가 방관을 그쳤어. 무려 전생보다 1년 일찍.’

과거에 황제의 마수 토벌대 파견은 순전히 정치적이었다.

그전까지 아들딸의 다툼을 지켜보기만 했던 황제는 토벌대 파견을 기점으로 공개적인 노선을 확정했다.

황제는 토벌대 인원을 직접 골랐다. 그 인원은 대부분 황녀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황제의 술수는 단순한 만큼 효과적이었다.

마수 토벌을 명목으로 서부 오지로 쫓겨난 이들은 자연스레 중앙 정계에서 멀어졌고, 물리적인 거리에 가로막혀 예전처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마수 토벌대가 꾸려졌다는 건, 조만간 황녀 전하도…….’

전생에 황제는 딸의 측근을 변방으로 내쫓아 수족을 자르는 것도 모자라 그녀 본인을 멀리 귀양 보냈다.

겉으로만 유학이었지 사실상 귀양이 맞았다.

대륙의 다른 나라를 두루 다니며 견문을 넓히라는 무성의한 핑계와 함께 아버지는 아예 딸을 국외로 내보냈다.

텔레스 기준, 참 암울하던 시기였다. 첼루나는 그때를 선명히 기억했다. 그때는 그녀도 블레논이 이길 줄 알았다. 오라비와 외조부가 얼마나 으스대던지.

하긴, 황제가 그때부터 대놓고 자신을 지지하기 시작했으니 블레논이 으스댈 이유도 충분했다.

이복동생의 세력은 대부분 뜯겨 나가 서부에 버려졌고 이복동생 본인은 약혼자와 함께 국외로 쫓겨났다. 게다가 폐하께서 친히 자신을 황태자 삼으시니 대체 무엇이 두려우랴.

전생에 첼루나는 열아홉 살부터 스물한 살까지 거의 2년을 연인의 무사 귀환을 빌며 지냈다. 황녀의 기사라는 이유로 토벌대에 포함되어 멀리멀리 떠난 데아론을 그리며.

‘이번에도, 설마.’

아, 다른 것도 같이 달라졌다면 좋았으련만. 그러나 시기만 앞당겨졌을 뿐, 나머지는 주로 똑같았다.

“그래, 좀 알아봤니?”

“네, 공주님.”

첼루나가 기다리던 시녀가 드디어 나타났다. 시녀는 주인께 고개를 꾸벅 숙이며 몹시 황송한 낯으로 아뢰었다.

“데아론 텔로아 경께서도 이번 마수 토벌에 참여하신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너는 기어코, 나를 떠나 서부로 갈 운명이다.

마수 토벌이 결정되었고, 황녀에게는 유학 명령이 떨어졌다. 텔로아 후작의 장남도 약혼녀를 수행하라는 이유로 국외로 쫓겨나게 생겼다.

후작의 차남마저 마수 토벌을 이유로 멀리 떠나게 되었으니 이제 텔로아 후작가는 완전히 끝장난 거 아니냐고 불길한 수군거림이 돌았다.

텔로아 후작뿐만 아니라 크레온 공작가와 펠르만 백작가 등 상당수 명문의 청년들이 황제에 의해 무작위로 차출되었다. 대부분이 황녀를 따르는 자였다.

황제의 의도는 명백했다. 사제들을 매수해 마수 습격 사건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엄청난 불명예를 당했던 라토르 공작이 슬슬 위세를 되찾고 있다고 사람들은 숙덕댔다.

“폐하께서 황자 전하를 곧 황태자로 책봉하실 거라는데?”

이런 소문조차 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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