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14)

“하아.”

첼루나가 먼저 신음했다. 가느다란 숨소리가 데아론을 자극했다.

그는 첼루나의 허리를 한결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제 소년의 몸짓은 어른에 가까웠다.

“흐으…….”

첼루나는 잠시 입술을 떼며 부르르 떨었다. 진득한 쾌락이 그녀를 꿰뚫었다.

그녀는 다시 전생의 농염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아니, 더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불편하신가요?”

데아론이 웅얼댔다. 그는 상대방의 의도를 가늠하며 머뭇거렸다.

그는 본질이 상냥해서, 또한 이번 생에는 아직 많이 서툴러서 자신이 혹 연인을 강압하고 있는 걸까 봐 불안했다.

그는 새삼 소심하게 공주의 눈치를 살폈고, 그 와중에도 숨이 가빠 가슴을 연신 달싹였다.

“전혀.”

첼루나가 속삭였다. 그는 과감하게 연인의 뺨을 감쌌다. 그녀가 다시 먼저 입술을 포갰다. 데아론은 눈을 감았고, 후끈한 입술을 열어 다디단 숨을 삼켰다.

데아론의 손가락이 첼루나의 머리칼에 얽혔다. 낮과 달리 지금은 머리를 자유롭게 풀어 내린 밤이라서, 비단처럼 매끄러운 감촉은 맨살에 쉽게 감겼다.

첼루나의 손이 데아론의 목으로 내려와 그의 단단한 어깨를 더듬고 마침내 다시 허리에 안착했다.

데아론은 첼루나의 뒷머리를 감싸며 바짝 끌어당겼다. 가슴이 맞닿았다.

“흐읏.”

말캉한 상체가 눌리는 느낌에 첼루나는 흠칫했다. 스치는 감촉마저도 야릇했다. 온몸이 쾌감으로 지끈거렸다.

“공주님.”

데아론은 뜨겁게 신음했다. 그저 호칭을 소곤댄 것뿐인데, 부른 쪽도 듣는 쪽도 마치 엄청난 주문에 사로잡힌 듯 고작 한마디에 이끌려 촘촘하게 맞물렸다.

어느새 무게 중심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첼루나가 데아론 쪽으로 기울었지만, 이제 소년의 열기가 소녀를 덮었다.

풀썩, 하고 몸이 꺾였다. 첼루나는 어느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데아론의 몸이 그녀에게 그늘을 드리웠다.

첼루나는 담금질한 황금처럼 번쩍이는 눈으로 연인을 올려다보았다.

“멈추지 마, 데아론.”

첼루나가 속닥였다. 부푼 가슴이 열기로 술렁였다. 데아론은 촛불을 등진 채 빙긋 웃었다. 낯설고도 낯익은 미소였다.

“그건 명령인가요?”

데아론이 농담했다. 그의 얼굴을 탐미하던 첼루나의 시선에 언뜻 슬픈 빛이 스쳤다.

“아니, 부탁이야.”

명령 같은 게 아니야. 네게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어. 전생에도 나는 네게 그 무엇도 강제하지 않았어. 오직 네가 스스로 선택했지.

아아, 저 낯설고도 낯익은 미소. 이번 생에는 처음이라 낯설지만, 지난 생에는 닳도록 보고도 지겹지 않았던 저 어른의 웃음, 남성의 눈빛.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사랑을 나눴다. 그래, 그건 그저 사랑이었다.

나는 내가 권력 없는 공주라는 게 그때만 기뻤다. 내가 너를 절대 강압할 수 없다는 점이.

차라리 내게 그럴 힘이 있었다면 좋았을걸.

그렇다면 나는 네게 억지 복종을 요구하며, 그날 네가 나를 위해 목숨을 잃지 않도록 돌려보냈을 텐데.

“명령이든 부탁이든 기쁘게 따르겠습니다.”

데아론은 약속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덮었고, 그의 숨이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첼루나는 달콤한 혀를 맛보며 눈을 감았다.

“공주님, 저는 당신이 정말 좋아요.”

첫사랑에 빠진 소년은 뜨겁게 고백했다. 그는 전혀 몰랐지만, 두 번째 첫사랑이었다.

첼루나는 감정이 덧칠된 눈으로 그를 보다가, 지난 생과 이번 생의 연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나도 네가 좋아, 데아론.”

너를 사랑해. 이번 생에는 미처 하지 못한 고백은 또 한 번의 키스로 조용히 지워 버렸다.

숨소리. 신음. 손짓. 일렁이는 촛불 아래 뒤엉키는 그림자. 더 깊숙이 닿고 더 간절히 안을수록 사랑은 깊어질 뿐.

차가운 겨울밤, 누군가는 뜨거웠다.

시간은 또 흘러 겨울이 거의 지났다. 봄이 가까워졌을 무렵, 텔레스 황녀와 모리안 텔로아의 약혼이 발표되었다.

오랫동안 기정사실화되었으나 정작 공식화되지는 않았던 두 사람의 결혼 약속에 드디어 법적으로 쐐기가 박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는 내내 황자 측은 잠잠했다. 이는 그 반대편을 오히려 불안하게 했다.

지난여름, 블레논은 자기 외가가 부패한 사제들과 손잡고 저주에 손댔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의 동복동생이 성녀의 이름을 걸고 공공연히 황녀 편을 들기 시작한 이후, 그의 상황은 더욱 불리해졌다.

그토록 위태로운 상황이거늘, 어째서 황자는 이토록 조용할까. 그의 숙적인 황녀는 공식적인 약혼으로 최대 아군인 후작가와 더욱 단단히 결속하며 점점 세력을 불려 가고 있는데.

황자가 그새 체념했으리라고 안일하게 넘겨짚기엔 황녀의 성격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텔레스는 자신이 기괴할 정도로 승승장구하는 지금 오히려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오라비를 주시했다.

첼루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작년부터 이어지는 블레논의 수상한 침묵과 탄탄대로를 달리는 텔레스의 행보는 도리어 초조함의 원인이었다.

‘그놈이 벌써 포기했을 리가 없잖아.’

첼루나는 매일 밤낮으로 오라비를 생각했다. 거의 집착에 가까울 만큼 블레논의 행동 하나하나를 곱씹고 그의 꿍꿍이가 과연 뭘지 끊임없이 추측했다.

무려 두 번의 생에 걸쳐 블레논을 가까이서 관찰한 첼루나는 그가 고작 이 정도 수세에 몰렸다는 이유로 얌전히 물러설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건 설령 회귀를 하지 않았어도 뻔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블레논의 성향으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그는 이렇게 쉽게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얌전히 몸을 사리기엔 모두가 너무 멀리까지 왔다. 황자도 황녀도 여태 각각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싸움에 임했다.

권력의 세계는 비정해서, 나중에 둘 중 누가 승리하든 패배한 쪽은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였다. 한때 지존의 자리를 두고 자신과 경쟁했던 자를 어찌 살려 두랴.

싸움에 이기고 나서 상대방을 제거하는 건 냉혹하기에 앞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어정쩡한 자비로 후환을 남겨 뒀다간 나중에 십중팔구 복수전이 벌어질 테니.

그러므로, 만약 이대로 텔레스가 승리하면 블레논은 반드시 죽는다. 블레논이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도, 텔레스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발악하리라.

‘나한테 진짜 예지력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첼루나는 절박하게 아쉬워서 입술을 깨물었다.

성력의 형태는 다양하며, 개중에는 미래를 예측하는 힘이 있다고 전해진다.

첼루나에게 그런 힘은 없었다. 그녀가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는 이미 지나 없어진 생에 일어났던 일의 똑같은 되풀이였다.

‘지금은 도움이 안 돼…….’

미래, 또는 과거는 이미 바뀌었다.

전생에는 분명 없었던 성력이 첼루나의 몸을 통해 발현되면서 그녀는 생각지도 못하게 달라진 상황을 마주했다.

이번 생에 첼루나는 데아론과 버젓이 연인이었고, 언니의 인정받은 아군이었으며, 민중의 사랑과 교회의 보증을 두루 받은 성녀였다.

이는 전부 첼루나에게 유리한 일이었으나, 그녀가 갖고 있던 한 가지 이점을 빼앗았다.

더는 전생의 잣대로 현생을 헤아릴 수 없게 되면서 그녀는 남들과 동등한 발판으로 추락했다.

‘불안해.’

지독하게 불안했다. 원래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한 치 앞날도 예측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게.

첼루나는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적당히 똑똑하다고 여겼을 뿐, 엄청난 천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똑똑하듯 그녀의 적도 똑똑했고, 그녀는 방심과 자만을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을 무기 삼아 강력한 적수보다 늘 반걸음이나마 앞서고자 했다.

그런데 그 소중한 무기가 사라졌다. 첼루나는 이제 싸움의 궁극적인 결과마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설마.’

그녀가 성녀가 되면서 정녕 많은 게 달라졌다. 그러면 설마 이번 생에는 승자와 패자의 정체도 달라질까?

이번 생에는 블레논이 영광을 얻고, 텔레스는 몰락할까?

‘안 돼.’

첼루나는 끔찍한 생각에 몸서리쳤다. 황녀가 무너지면 황녀의 측근도 무너진다.

첼루나는 이번 생에도 황녀의 예비 시동생이 된 제 연인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절대 안 돼.”

침실에서 혼자 숙고하던 첼루나는 단호하게 중얼댔다. 결연한 다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최종 결과만큼은 바뀌어선 안 된다.

이 삶의 다른 모든 게 지난 생에는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뒤집힌다고 한들, 그것만큼은, 데아론의 주군이 이기는 결말만큼은 바뀌어선 안 돼.

이제는 첼루나도 너무 멀리 왔다. 더는 모호하게 선택지를 저울질할 틈은 없었다.

그녀는 이미 언니에게 단 한 번의 기회를 바쳤고 그로써 앞으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정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 또한 사랑하는 데아론을 위해, 첼루나는 자신이 회귀 직후부터 마음에 새긴 단 한 명의 주군을 섬기리라.

불안감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첼루나는 봄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봄이 미처 오기도 전, 블레논은 폭탄을 터트렸다.

“텔로아 후작은 부도덕한 인물이다.”

황자는 데아론을, 정확히 말하면 그의 아비를, 황녀의 든든한 지지 세력인 텔로아 후작가 전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황자 본인이 직접 목소리를 높여 텔로아 후작의 이름에 오물을 끼얹은 건 아니었다.

그와 라토르 공작은 아직도 저들을 따르는 교회의 사제들을 은밀히 움직였고, 그들은 교묘한 소문을 퍼트려 여론을 조종했다.

텔로아 후작은 부도덕한 인물이다. 그는 아내를 두고 불륜을 저질러 사생아를 가졌다.

심지어는 권력을 악용해 그 사생아를 황녀 전하의 호위 기사로 궁에 밀어 넣었다.

이는 기사가 되기 위해 오직 본인의 재능으로 정직하게 노력하는 다른 수많은 소년을 기만하는 행위 아닌가?

심지어 첼루나 공주님은 그 사생아의 꾐에 눈이 멀어 성녀로서의 위치를 망각하고 밤마다 망측한 만남을 이어 가시니, 전부 그 사생아가 불륜의 결실이라 천박한 친모를 닮았기 때문이니라.

거리에는 이제 그런 소문이 돌았다. 분노와 당혹으로 창백해진 텔레스는 곧장 동생을 불러다 추궁했다.

“정말로 데아론 텔로아와 밤중에 만난 적 있니?”

첼루나는 어설픈 기만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딱 한 번이요.”

첼루나는 자신이 데아론과 밤에 몰래 만났기 때문에 이런 악소문이 도는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지.

자신이 데아론과 만났든 만나지 않았든, 적은 똑같이 그녀와 텔로아 후작의 사생아를 싸잡아 모독하는 낭설을 퍼트렸으리라.

정갈하고 고귀한 이미지의 성녀 공주가 실은 밤중에 사생아 연인과 몰래 놀아나는 요부라 매도하고, 그 사생아의 아비이자 황녀의 예비 장인인 텔로아 후작도 깎아내린다.

텔레스 황녀가 자신과 성녀의 돈독한 사이를 과시하기 위해 두 사람의 연애 사실을 공론화한 것을 블레논 황자는 역으로 써먹었다.

이제 첼루나는 황녀의 예비 시동생과 사이가 각별한 공주님이 아니라, 밤중에 언니의 기사를 몰래 꾀어 만나는 저속한 계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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