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계속 있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첼루나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데아론의 손을 살짝 만졌다. 그 은근한 접촉이 시녀들의 눈앞에서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애정 행각이었다.
문득, 첼루나는 절제가 답답해졌다.
“음, 데아론, 있잖아. 오늘 밤에 그대가 당직이지?”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했다. 결핍 하나가 해소되자 바로 다음 갈증이 일었다.
지난 생과 달리 숨지 않고 연애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기도 얼마, 첼루나는 또 다른 것을 그리게 됐다.
“네, 맞습니다.”
“그럼 새벽에 끝나겠네?”
“네.”
순순히 대답하던 데아론은 돌연 질문의 속뜻이 의아해졌다. 첼루나는 눈을 반짝 빛내며 즐겁게 속닥였다.
“으음, 그럼.”
이어, 첼루나는 상체를 숙여 데아론과 거리를 좁히더니 그의 귓가에 뭔가 짧게 소곤댔다. 소년의 얼굴에 발그레한 혈색이 번졌다.
“기다릴게.”
첼루나가 뜨뜻하게 웅얼댔다. 데아론은 잠시 말문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어려울 것 같으면 꼭 안 와도 돼.”
첼루나는 걱정스레 덧붙였다.
이번 생에 처음으로 연인에게 밀회를 제안한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녀는 그를 위해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에요. 어떻게든 가겠습니다.”
데아론은 나직이 약속했다. 새벽까지 황녀궁에서 호위 당직을 서고 나면 무기를 정돈하는 척 잠시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그는 그때를 기약했다.
첼루나는 달아오른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녀는 다시 데아론의 손을 거의 스치듯 만졌다. 일단은 이걸로 만족해야 했다.
두 연인은 밤을 기다렸다.
* * *
회귀 이후 4년 반째, 첼루나는 전생보다 아군이 많이 생겼다. 엘리나 외에도 꽤 많은 시녀와 시종이 그녀에게 진심으로 충성했고 그녀를 스스로 돕고 싶어 했다.
첼루나가 성녀로 판정되고 급작스레 텔레스 황녀와 친한 모습을 드러내자 공주궁의 궁인들도 대부분 손바닥 뒤집듯 황자에서 황녀로 갈아탔다.
애초에 딱히 뒤집을 만한 것도 없었다. 과거에 공주궁 사람들은 딱히 황녀를 따르지도, 그렇다고 황자를 섬기지도 않았다.
궁인들의 처지는 주인의 것에 따라 결정된다. 공주가 무력했던 시절에는 공주궁 사람들도 힘이 없었다.
본인의 신념이나 선호와 상관없이 황녀궁 사람들을 애매하게 적대하고 황자궁 사람들에게 굽신거려야 했던 게 그들의 현실이었다.
이제는 그 현실도 옛날이라, 요즘 공주궁 사람들은 대체로 황녀에게 우호적이었다.
공주님이 황녀 전하의 새 호위 기사와 단내를 풀풀 풍기는 것도 그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 호위 기사가 하필이면 평민의 피가 섞인 혼외자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들은 애써 염려를 그쳤다.
지난가을 이후 황녀 전하와 모리안 텔로아의 약혼이 거의 기정사실화되었으니, 조만간 그 혼외자 소년도 황녀의 인척이 될 것이다. 황족이 되는 것이다.
그 정도 지위라면 우리 공주님 옆에 서기에 부족함이 없겠지. 4년 반 동안 주인에게 잔뜩 정을 붙인 궁인들은 너그럽게 끄덕였다.
“공주님, 모시겠습니다.”
어두운 밤중에 엘리나가 속삭였다. 촛대를 들고 망토를 두른 채였다.
“고마워, 엘리나.”
첼루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과거와 달리 충성스러운 시녀를 곁에 둔 첼루나는 아랫사람의 유능함과 열정이 퍽 마음에 들었다.
오늘 밤 몰래 연인을 만나러 가는 공주를 위해 엘리나는 망을 보기로 했다. 전생에는 당연히 없던 일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엘리나는 겸손하게 고했다.
설령 모시는 분이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짓을 하더라도 묵묵히 따르고 보좌하는 게 충직한 시녀의 몫이리라.
가르치고 바로잡는 건 스승이나 참모의 역할이었다.
만약 엘리나가 공주의 시녀가 아닌 예법 선생이었다면 밤중에 애인을 만나러 몰래 빠져나가는 소녀를 지독하게 훈계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시녀는 꾸중이나 타이름 대신 침묵을 택했다. 첼루나는 조용히 웃었다.
첼루나는 시녀를 데리고 1층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작년까지만 해도 공주궁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응접실이 있었다.
공주를 보러 찾아오는 손님이 없으니 응접실이 활용될 기회도 없었다.
지난가을 그녀가 언니와 손잡고 나서야 이 방도 슬슬 쓰임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기다릴게.”
“네, 공주님.”
첼루나는 응접실 안에서 멈췄다. 엘리나는 공손하게 꾸벅였다.
시녀는 공주를 위해 응접실에 촛불을 붙인 뒤 본인은 다음 역할을 하러 쪼르르 사라졌다.
첼루나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노련한 여인의 갈망과 수줍은 소녀의 설렘이 뒤엉켰다.
그녀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살며, 첫 번째든 두 번째든 그녀의 모든 삶을 가진 단 한 명의 사람을 기다렸다.
드디어 문이 열렸고, 데아론이 나타났다.
공주님의 연인을 위해 몰래 후문을 열고 그를 들여보내는 일까지 잘 감당한 엘리나는 말없이 인사한 뒤 퇴장했다.
“데아론!”
“공주님.”
첼루나는 빵긋 웃었다. 데아론은 지극한 안도로 한숨지었다.
이상하지. 서로 마지막으로 만난 지 한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떨어져 있으면 괜히 공허하고 불안했다.
다시 얼굴을 맞대자 숨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온몸이 노곤하게 녹았다.
첼루나는 단숨에 달려와 데아론을 와락 안았다. 소년은 깜짝 놀랐다. 가을밤의 첫 키스 이후로 이렇게 몸을 포개는 건 처음이었다. 데아론의 뺨이 더워졌다.
“진짜 왔구나!”
“당연히 와야죠, 누가 불렀는데.”
“못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오래는 못 있지?”
“네. 금방 복귀하지 않으면 의심을 살 겁니다.”
“그럼 30분만, 딱 30분만 이렇게 있자.”
“어, 이렇게요? 계속 이렇게 안고?”
“왜, 싫어?”
첼루나는 짐짓 눈을 가늘게 떴고 데아론은 절절맸다.
소녀의 온기가, 소녀의 숨결이 너무 가까웠다. 게다가 저녁에 목욕을 하셨는지 그녀의 머리칼에서는 아찔한 향기가 풍겼다.
“아, 아니요. 싫을 리가…….”
“다행이야. 나는 좋아서 죽을 것 같거든.”
“어, 그, 죽지는 마시고요.”
“……그냥 비유법이었어. 바보야.”
첼루나는 갈망도 설렘도 단숨에 싹 식는 걸 느꼈다. 데아론이 입에 담은 죽음이라는 말이 소름 끼치게 거슬렸다.
과거에 나는 네가 내 품에서 죽는 걸 봤다. 그 결말을 피해 현재로 도망쳤지만, 아직도 가끔 나는 비참한 악몽을 꿔.
“바보라니.”
데아론은 진심으로 상처받았다.
비교적 귀여운 타박이긴 했지만, 여태 공주님께 달고 보드라운 말만 들어 온 데아론은 바보라는 단어조차 엄청난 욕으로 들렸다.
“미안해. 바보라는 말은 취소.”
첼루나는 곧장 정정했다. 데아론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자 그렇게 해야만 했다.
아까 팍 식었던 기분이 다시 달아올랐다. 그녀가 그의 손을 감쌌다.
“데아론, 보고 싶었어.”
“저도요, 공주님.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 분명 오늘 낮에도 봤는데?”
“오늘은 아닙니다. 정확히 따지자면 어제죠. 자정이 지났으니까요.”
“그래, 그렇구나. 오늘이 아닌 어제네.”
“그리고 공주님도 저 보고 싶었다면서요.”
“응, 맞아. 나도 보고 싶었어.”
맥락 없는 속닥임이 주절주절 흩어졌다. 첼루나는 그것마저 좋아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애초에 첫사랑의 격정적인 설렘에 굳이 맥락을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억지로 냉정하게, 차분하게, 모든 걸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통제해야만 할까?
홧홧한 피가 끓는 열여덟 살 청춘에게 연정은 맹목이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불꽃이었다. 암흑을 뚫고 나타난 구원의 손길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소년은 너무 외로웠다. 그런데 이 예쁘고 다정하고 열정적인 공주님은 사랑스러운 눈짓으로 그 쓸쓸함을 지워 냈다.
소녀도 처음에는 단지 외로워서 소년을 사랑했다. 전생의 열일곱에는 분명 그러했다.
그러다 그들은 무려 6년간 사랑했고, 서로 다른 파벌에 속했음에도 끝내 마음을 접지 못하다가, 한쪽의 죽음으로 인한 괴로운 이별로 그 끝을 맞이했다.
이제 첼루나는 단지 쓸쓸한 와중에 소년의 상냥한 온기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이유를 찾아 붙이는 게 번거로울 만큼 그를 사랑했다. 당연하게, 숨 쉬듯 자연스럽게.
“우리 서로 보고 싶었던 거니까 잘됐네요.”
그리고 그 사랑은 전염성이 짙었다.
데아론은 전생 이맘때쯤보다도 더욱 단단히 사로잡힌 채 눈앞의 공주를 거의 숭배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전생에 두 사람은 온전한 초면으로 시작했고, 함께 서툰 보폭을 맞춰 가며 서서히 마음이 깊어졌다.
이번 생은 달랐다. 이미 수년간 상대방의 연인이었던 첼루나는 한번 다시 시작하고 나자 거침없이 잡아당겼다.
상대방은 망설일 틈도, 이유도 없었다. 그럴 의지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당기는 대로 당겨지길 원했다. 그 끝에 설령 비극이 있다 해도 상관없었다.
“우리 이제 뭐 할 거예요, 공주님?”
만약 우리의 끝이 비극이라면, 나는 그 비극을 혼자 끌어안고 진창에 떨어져 당신이 나를 밟고 지나갈 수 있도록 할게. 데아론은 전생과 똑같은 다짐을 내렸다.
“서로 보고 싶었던 두 사람이 이 야심한 시각에 만났는데.”
내가 지금껏 살면서 가장 외롭고 불행했을 때 곁에서 잡아 준 게 당신이야. 그리고 설령 그게 아니었더라도, 이제 더는 상관없어.
“여기 지금 우리 둘만 있는데, 이제 뭐 할 거예요?”
이미 답을 다 알면서, 데아론은 괜히 엉큼하게 물었다. 평소에는 강아지처럼 순한 눈매가 지금은 여우처럼 가늘게 접혔다.
역시, 열여덟 살이면 알 건 다 아는 나이였다. 연애는 처음이라 아직 가끔 서툴기는 해도 데아론이 완전히 백치인 건 아니었다.
“글쎄, 뭐를 할까.”
첼루나도 괜스레 모른 척했다. 그러나 그녀의 팔은 이미 애인의 허리에 단단히 감겨 있었다. 그 감촉에 둘 다 전율했다. 아랫배가 뜨겁게 꿈틀댔다.
“대화는 평소에도 많이 하니까 지금은 좀 색다른 걸 해 보자.”
첼루나도 눈꼬리를 휘었다. 지금 그녀는 원숙한 여인처럼 농염하기도 했고, 풋풋한 소녀처럼 싱그럽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사랑으로 이뤄졌다는 점은 똑같았다.
“예를 들어, 이런 거.”
첼루나는 즐겁게 덧붙였다. 이어, 입술을 겹쳤다.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밀회는 문자 그대로 밀회여야 했고, 비밀 유지를 위해 그들은 압축적인 정염을 신속하게 쏟아부었다.
기껏해야 30분. 가혹할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한순간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달콤함이요, 너무 소중한 뜨거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