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를 마음껏 총애하렴, 첼루나. 네가 텔로아 후작의 차남을 네 손안에 뒀다고 온 나라가 믿게 만들어. 너는 그렇게 나의 한층 믿음직한 충신이 되는 거야. 후작은 나와 가깝잖아.>
총애라니. 고작 그런 수직적인 단어로 데아론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정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첼루나는 어지러웠다. 지난 생에는 없었던 생경한 흐름이, 진정 기적 같아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안 그러니? 첼루나.>
지난 생에는 감히 꿈꾸지도 못했다. 상상조차 금지되었다.
데아론과 당당히 연인 행세를 한다니. 서로 아끼는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니. 혼담이 오가다니.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 본다니.
과거에 그녀는 황자를 따라 몰락했기에 황녀를 섬긴 충직한 기사와 결코 떳떳하게 맺어질 수 없었다.
이번 생에는 공주도 언니의 편이었고, 새로운 가능성이 펼쳐졌다.
<명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감정은 배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첼루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만약 황녀가 원하는 게 그저 연기일 뿐이라면 진심으로 데아론을 좋아하지는 않겠다는 유창한 허언과 함께.
감정에 휩쓸려 일을 그르치지 않겠다는 각오를 표현하기 위한 형식적인 언사였다.
실제로 그녀는 이 마음을 배제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배제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그러라고 대답하면, 정말로 할 수 있기나 해?>
황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첼루나는 그 아득한 저음에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무언가가 파묻혀 있는 걸 알고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해 머뭇거렸다.
<마음을 죽여 가면서까지 애쓸 필요 없어. 내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첼루나.>
언니가 다음 말을 덧붙일 때, 첼루나는 그녀가 지독하게 서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짧게 스치듯 그저 찰나의 눈빛이었지만.
여기까지가 지난가을 자매의 대화였다. 지금은 늦겨울, 해가 바뀌고도 시간이 꽤 흘러 곧 봄을 기다릴 일만 남았다.
첼루나와 데아론은 황녀궁의 온실 정원에 있었다. 텔레스는 동생을 황녀궁에 보란 듯이 초대해 자신과 성녀의 친분을 거듭 과시했다.
“요즘 키가 더 큰 것 같아, 데아론.”
“에이, 설마요. 슬슬 성장이 멈출 나이잖아요? 여기서 더 자라면 아마 옆으로만 커질걸요.”
“아니야, 진짜야. 더 큰 것 같아. 앞으로 한두 해는 더 자랄 것 같은데. 옆으로 말고, 위로.”
“진짜로 그랬으면 좋겠네요.”
데아론은 희망을 담아 한숨지었다. 그는 이미 평균보다 키가 큰 소년이었지만, 내심 자기 형만큼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리안을 원망했다. 미워했다. 동시에, 닮고 싶었다.
최근에 검을 배우고 공주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많이 밝아졌지만, 소년의 마음에는 여전히 열다섯 살에 받은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내가 형처럼 되면 나를 사랑해 줄 거야? 그는 아비에게 묻고 싶었다. 나를 진심으로 인정해 줄 거야?
책임지기 위해 집으로 데려왔지만, 이후 멸시와 냉대 속에 고스란히 방치한 사생아인 나를.
나도 형처럼 훤칠해지면, 멋있어지면, 더 ‘진짜 귀족’처럼 되면. 그때는 모두 나를 보며 조금만 더 웃어 줄까.
“진짜로 그럴 거야. 날 믿어.”
첼루나는 다정하게 약속했다. 그녀는 연인을 보며 예쁘게 힘껏 웃었다. 울음을 참는 것처럼.
첼루나는 데아론이 실제로 앞으로도 한두 해쯤은 키가 더 자랄 것을 알고 있었다. 전생에 그 모습을 봤으니까.
첼루나는 또한, 데아론이 저보다 다섯 살 위의 모리안을 보며 내심 형의 건장한 풍채를 부러워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생에 언젠가, 그가 직접 말해 줬으므로.
<가끔 형님처럼 되고 싶을 때가 있었어. 검술 연마에 몰두한 것도 내가 기사로서 인정받으면 형님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나름 기대해서야.>
언젠가 데아론이 연인에게 반말을 쓸 때였다.
황족에게 하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당시 첼루나는 짓밟힌 공주였으므로 본인 포함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과분한 꿈이었지.>
청년 데아론은 나른하게 웃었다. 아마 술에 살짝 취한 밤이었다.
<내 몸속에서 엄마의 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뽑아내지 않는 한, 이룰 수 없는 꿈이었어.>
그래서 포기했어. 쓸쓸한 청년은 속삭였다. 나는 평생 형님의 그림자에 살 테니까.
그때 그 모습이 떠올라 지금 눈앞의 풋풋한 소년과 겹쳐 보였다. 제발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툴툴대는 열여덟 살 데아론.
그때의 청년도 지금의 소년도 사랑해 마지않는 공주는, 쓰라린 연민을 되삼키며 명랑하게 말했다.
“나중에 그대가 다 크고 나면 내 목이 꽤 아프겠어. 지금보다도 올려다봐야 할 거 아니야.”
전생에 첼루나는 이맘때쯤에 이미 성장이 멈추고도 남은 나이였었다.
열일곱 살에 처음 만났을 때도 상당했던 차이는 스물에 가까워질수록 현저하게 벌어졌다.
“감히 공주님 목이 아프도록 둘 수는 없죠. 공주님이 항상 내려다보는 쪽이게 하겠습니다.”
“어떻게?”
“공주님 발치에라도 앉겠습니다.”
“별로 맘에 드는 해결책은 아닌데.”
“공주님께서 제 무릎에 앉으시죠. 그럼 눈높이는 지금보다 맞을 텐데요.”
소년은 문득 엉큼하게 웃었다. 소녀는 숨이 막혔다.
아직은 대부분 수줍기만 한 연인이 이런 능청스러운 공격을 날릴 때면 첼루나는 속절없이 치명타를 입곤 했다.
“좋은 생각이네. 또 다른 방법은 없어?”
호흡 곤란에 위협당하는 와중에도 첼루나는 꿋꿋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데아론은 지금만큼은 자신이 우위임을 알고 씩 웃으며 성큼 다가왔다. 거리가 훅 좁혀졌다.
“제가 온종일 공주님을 안고 다니겠습니다. 그래도 눈높이가 맞겠네요.”
보랏빛 눈은 청명한 열기를 품고 황금빛 눈을 내려다보았다. 첼루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심장이 쾅쾅 울렸다.
데아론은 지척에서 눈을 빛내며 첼루나를 바라보다가, 맹렬한 아쉬움을 느끼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키스하고 싶어.’
데아론은 갈증을 삼키듯 열망했다. 갈증 외에 다른 것을 삼키고 싶었다.
예컨대 저 숨결, 저 입술. 자신이 지난가을 은밀한 테라스에서 실컷 맛봤던 녹진녹진한 혀를 다시 머금고 싶었다.
그날 테라스에서의 기억은 데아론의 심신에 달콤한 흔적을 남겼다. 그때 그 키스가 지금까지는 마지막이었다.
데아론은 형님과 황녀의 뜻에 따라 첼루나 공주와 각별한 관계를 드러냈지만, 노골적인 신체 접촉은 아무래도 상류층 예절과 거리가 멀었다.
‘……거슬려.’
지금 살짝 멀리 떨어져서 걷는 공주의 시녀들과 호위들이 퍽 성가셨다. 우리 둘만 함께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데아론은 아직 연애 초반이라 수줍을 뿐, 사실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한 편이었다.
전생에 그는 실제로 종종 첼루나가 숨이 가쁠 만큼 저돌적이었다.
그런 저돌성은 은근한 독점욕과 어울려 첼루나를 향한 갈망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소년의 첫사랑은 나날이 깊어졌다. 전생과 다르면서도 같은 속도로.
“그, 러면. 그대의 팔이 아플 텐데.”
첼루나는 홍조를 띠며 중얼중얼 대꾸했다. 데아론이 자신을 안고 돌아다니는 상상을 하자 얼굴에 열이 쏠렸다.
참 새삼스럽게, 그녀는 다시 서툴고 풋풋한 열여덟 살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이미 한 번 지나 없어진 삶, 그녀가 첫 번째로 데아론과 사랑에 빠졌던 나날처럼.
동시에, 슬픔이 차올랐다. 실제로 지난 생에 데아론은 첼루나를 가볍게 번쩍 안고 다니곤 했으니까.
그 모든 건 어둠 속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몰래, 마치 수치스러운 일을 감추는 것처럼.
너는 황녀의 기사고, 나는 황자의 동생이었으니까. 전생에 우리는 그토록 어긋났다.
지금 이렇게 당당히 아랫사람들의 호위와 시중을 받으며 연인과 보란 듯이 웃고 떠드는 시간이 꿈만 같았다.
지난 생에 비해서 이 순간이 당연히 훨씬 나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 아쉬움이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꽤 튼튼합니다.”
데아론은 산뜻하게 자랑했다. 그제야 첼루나는 바짝 긴장했던 마음도 잊고 푸스스 웃었다.
“그래, 튼튼하겠지. 자랑스러운 기사님이신데.”
이 순간의 아쉬운 점은 바로, 전생과 달리 주변에 보는 눈이 많다는 것.
당당하게 연애할 수 있게 된 건 좋은데 단둘이 남겨지지 못하는 건 아쉬웠다.
제국의 사교계는 이성 교제를 장려했다.
애초에 무도회라는 행사를 만들어 남녀 둘이 공공연히 손을 맞잡고 춤추도록 부추기는 사회니 활발한 연애에 박할 리가 없었다.
다만 활발함과 문란함은 달랐다. 어쨌든 품위와 명예를 목숨처럼 중시하는 귀족들이었고, 황실은 한술 더 떴다.
군주가 후계를 만들기 위해 정부를 들이고 후궁을 세우는 기형적인 예외를 제외하면, 황실은 아마 이 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었다.
어차피 숨어서 교제했던 과거의 연인들은 그런 규율에 얽매이지 않았다. 전생에 그들은 서로 참 자유분방하게 만졌다.
상황이 달라진 지금, 첼루나는 기쁘면서도 답답했다. 분명 이 순간이 전생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키스하고 싶어.
“언젠가 보여 드릴 기회가 있다면 좋을 텐데요. 제가 정확히 얼마나 튼튼한지.”
데아론은 웃으며 속삭였다. 첼루나는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이미 알아, 걱정하지 마. 네가 어디가 얼마나 어떻게 튼튼한지…….’
전생에 너는 허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나를 안고 막……. 어쨌든, 크흠, 그랬다고.
“공주님, 얼굴이 빨간데요?”
“그, 그래? 온실이 더워서.”
“따뜻하긴 하네요. 여기에 있으면 겨울이라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그게 목적이긴 하지.”
첼루나는 황녀궁의 온실 정원을 둘러보았다. 웬만한 황족의 처소에는 꼭 하나쯤 있는 공간이었다.
쌀쌀한 계절에는 후원에서 산책하는 게 여의치 않으므로, 마법과 과학으로 훈훈하게 덥힌 온실이 훌륭한 대안이 되었다.
공주궁에는 온실이 없었다. 지난 생에 황제는 끝까지 막내딸의 처소에 온실을 지어 주지 않았다. 이번 생에도 똑같으려나. 첼루나는 씁쓸함을 되삼켰다.
“너무 따뜻하고 좋아서 떠나기가 싫어요.”
데아론은 쌩긋 웃었다. 입가에 번진 발랄한 미소와 달리 그의 눈빛은 퍽 침울했다.
온실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싫은 게 아니었다. 그저 매번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별이 서운했다.
영영 헤어지는 게 아님을 알지만, 매번 다음 시간을 향한 설렘을 품고 돌아서지만.
두 번째 첫사랑에 속절없이 사로잡힌 소년은, 공주의 모습을 눈에 담고 그녀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는 순간순간이 아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