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는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만약 황제가 방문객을 받지 못할 만큼 피곤했다면 상대방을 단칼에 거절했으리라. 극진하게 아끼는 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블레논은 아버지의 자리를 탐냈다. 언젠가 그 고귀하고 막강한 권좌를 물려받는 날을 꿈꿨다.
귀속된 책무도 분명 많지만, 그보다는 누릴 수 있는 권리가 훨씬 많아 보이는 자리였다.
예컨대, 사랑이라는 우스운 이름으로 온갖 해로운 짓을 저질러 놓고도 처벌받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자리.
내 아버지는 지금 그런 자리에 앉아 있다. 블레논의 부황을 향한 조롱은 다만 싸늘했다.
“그나저나, 블레논.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했니?”
아들을 향한 아비의 시선은 더없이 인자했다. 아들은 오랜 경멸을 감추며 공손한 효자의 태도로 답했다.
“제법 진지한 얘기입니다. 혹시 제가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더라도 부디 용서해 주세요.”
“네가 내 심기를 거스를 일이 뭐가 있다고.”
“그걸 어찌 제가 감히 헤아리겠습니다. 다만 진지한 만큼 예민한 사안이라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뿐입니다.”
이쯤 되자 황제의 눈빛도 심각해졌다. 블레논은 시선을 내리깐 채 정중하게 청했다.
“폐하, 부디 아랫사람들을 물려 주세요.”
황제는 아들의 뜻대로 했다. 호위들과 시종들이 멀어지자 황제가 말했다.
“이제 말해 보렴.”
“……폐하. 폐하께서 저를 황태자로 책봉할 생각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황자가 본론을 꺼냈다. 황제의 낯에 더 이상 웃음기는 없었다.
블레논은 여전히 시선을 내린 채라 부황의 표정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살갗에 전해지는 온도만으로도 그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텔레스에게 그 자리를 주고자 하신다면 제가 황궁을 떠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차라리 그게 모두에게 이로울 겁니다.”
황제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블레논은 바닥을 보며 기다렸다.
일부러 이런 정면 돌파를 감행한 건 어젯밤 연회에서 결심한 도박이었다. 부디 그 끝이 성공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들아.”
황제가 마침내 불렀다.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운 걸 듣고 블레논은 안심했다.
“내가 여태 너를 불안하게 했구나.”
네, 그렇습니다. 무척이나. 블레논은 황제의 탄식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이 난장판의 원흉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라고 사납게 씹어 뱉고 싶었으나 블레논은 현실을 알았다.
“아니에요, 불안한 게 아닙니다. 그저 폐하의 의중을 확실하게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앞으로 제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현명할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블레논은 감쪽같이 거짓을 말했다. 실은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어젯밤부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첼루나 그년이 성녀랍시고 설치기 시작할 때부터 블레논은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다.
‘하여튼, 쓸모없는 계집.’
블레논은 속으로 욕설을 뇌까렸다. 동복동생을 떠올리는 그의 눈이 일순 차갑게 빛났다.
‘끝까지 도움이 안 돼.’
너는 태어나며 우리 어머니를 죽였고 이제는 황후의 딸에게 붙어먹었다.
우리는 한배를 탔다고 누누이 경고했거늘, 그 배를 걷어차고 바닷속에 뛰어든 건 네 선택이다.
“블레논.”
황제는 엄중하게 불렀다. 이때 그의 중후한 음성에는 스물두 살 황자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무게감이 있었다.
이럴 때는 블레논마저 아비 앞에서 진심으로 겸손해졌다.
“너는 나를 뒤이어 이 나라의 황제가 될 거다. 반드시.”
블레논의 온몸이 전율에 뒤덮였다. 그는 고개를 퍼뜩 들고 아비를 직시했다.
황제는 제 자식 중 두 명과 똑 닮은 파란 눈으로 아들을 똑바로 맞바라보았다.
“이 사실을 내가 모두 앞에서 공표하기를 바라느냐?”
지금껏 황제의 선택은 늘 아들이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변함없었다.
다만, 이 능구렁이 같은 노회한 지배자는 정계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는 재주가 얄미울 만큼 탁월했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과 아예 정식으로 쐐기를 박는 건 서로 전혀 다른 일이다.
현재 웬만한 사람은 전부 황제의 황자를 향한 편애를 알고 있지만, 황제가 황자를 후계자 삼겠다고 대놓고 말한 적은 없기에 아직 황녀에게도 승산이 있다고 대부분 믿었다.
만약 황제가 제 진심을 공표한다면 황녀, 즉 황후의 지지 세력과 정면으로 부딪쳐야 할 시기가 오리라.
그는 여태 노골적인 갈등의 때를 교묘하게 미뤄 왔다.
그러나 갑자기 마수가 나타나고 막내딸이 성녀가 되고 온 나라가 들썩이기 시작하면서, 눈 가리고 아웅이 매우 어려워졌다.
더는 싸움을 물밑에 가둬 두고 안 보이는 척 외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정쟁을 수면 위로 끌어내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봐야 하리라.
승자와 패자가 각자 어느 쪽이든 간에.
“폐하께서 원하시는 걸 저도 원합니다.”
황자는 모범적인 아들답게 말했다. 아니, 아들이 아닌 신하일까. 황실에서는 피차 마찬가지였다. 아들이든, 신하든.
“그래.”
황제는 묵직하게 대답했다. 이어, 사랑하는 아들을 보며 정녕 자애롭게 웃었다.
“그러면 너는 네가 원하는 걸 얻을 거다.”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이었다.
그 약속의 결실은 조금 훗날에 드러났다. 그리고 그전에 양쪽 다 헤쳐 나갈 폭풍이 많았다.
겨울은 제법 조용하게 찾아왔다.
수백 년 만에 성녀가 나타나고, 황자의 외조부와 부패한 성직자들이 저주에 손댔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황궁의 이복 자매가 급속도로 친해진 여름과 가을보다는 확실히 고요한 계절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요즘 검술 수업은 어때? 실력이 좀 느는 것 같아?”
열여덟 살이 된 첼루나는 마찬가지로 한 살 더 먹은 데아론에게 물었다.
물론, 열여덟 살은 오직 현생의 신체 나이였다. 굳이 따지자면 공주의 진짜 나이는 스물여덟쯤 되리라.
“네, 그렇습니다. 배우는 재미가 있어요.”
새내기 기사 데아론은 공주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데아론은 최근에 황녀의 기사로 임명되었고, 꾸준히 이복형의 가르침을 받았다.
제대로 검을 배우기 시작한 지 별로 오래되지도 않은 소년이 황족의 기사가 된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소년이 정말 천재거나, 아니면 인맥이 화려하거나.
신분에 따라 사람의 귀천이 나뉘는 세계에서 후작의 아들이 황궁의 호위병 자리 하나쯤 얻는 건 그리 충격적인 일도 아니었다.
정말 실권이 달린 자리라면 모를까, 낙하산이라고 욕먹을 만한 여지도 없었다.
다만, 처음에 데아론은 그런 방식에 퍽 거부감을 느꼈다. 여태는 사생아라는 이유로 구린 대접만 하다가 이제 와서 아빠 덕을 좀 보라고?
그런 반감과 별개로 데아론은 끝내 받아들였다. 역시, 그는 아직 형과 아비에게 반항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에 그 선택은 그의 크나큰 기쁨이 되었다.
황녀의 기사가 된 데아론은 이제 정식으로 궁에 드나들 수 있었고, 첼루나를 만날 명분과 기회가 동시에 늘어났다.
이제 두 사람은 사실상 연인이었다. 첼루나 공주와 후작의 아들 데아론, 두 아이의 알콩달콩한 모습은 이제 황궁에서 흔하디흔한 풍경이었다.
궁인들과 귀족들은 공주와 기사가 눈이 맞았다고 수군댔고 황녀는 소문을 부추겼다. 당사자들도 이를 부인하기는커녕 은근히 즐기는 기색을 풍겼다.
모든 건 텔레스 황녀의 정략대로였다. 그녀는 성녀로 판정된 자신의 이복동생이 정녕 자신의 아군이 됐음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다.
첼루나의 대중적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어떤 구체적인 행위보다는 그냥 존재 자체에서 나온 인기였다.
그녀는 신화 속의 성녀님, 그리고 문자 그대로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공주님이었다.
매일매일 사는 게 팍팍한 평민들은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를 안줏거리 또는 위안 삼아 흥미를 영위했다.
개중에서 황실의 소문과 성녀의 전설은 가히 일품이었다.
민중은 첼루나를 숭배했다. 공주를 둘러싼 복잡하고 지저분한 정치 싸움과 공주 본인의 됨됨이 같은 게 뭐가 중요하랴?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당장 먹고사는 일과 상관없는 세세하고 따분한 내막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들은 그저 재밌는 이야기가 필요했고, 공주님이자 성녀님은 훌륭한 주인공이었다. 그 흐름이 곧 인기였고, 인기는 첼루나의 힘이 되었다.
텔레스는 동생과 대외적으로 정다운 자매애를 과시하여 대중의 열렬한 관심에 넌지시 숟가락을 얹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이었으나 텔레스가 가장 기쁘게 여긴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대사제와의 달라진 관계, 그리고 교회 내의 권력 구조 변화였다.
외가의 연줄을 통해 마법사들의 지지를 확보한 황녀는 종교계에서도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싸움이 점점 격화하는 지금, 거침없는 행보였다.
“재미도 있고 재능도 있는 거겠지. 잘하지도 못하는 걸 억지로 하려면 재미없잖아.”
배움의 재미를 논하는 데아론을 첼루나는 싱긋 웃으며 칭찬했다.
데아론은 수줍은 환희로 얼굴을 붉히더니,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중얼댔다.
“뭐, 제가 못하는 편은 아닙니다.”
과한 겸손이었다. 데아론의 검술 실력은 이미 탁월했다.
본인의 타고난 재능과 성실한 태도, 가혹할 만큼 엄격하면서 천부적인 소질을 자랑하는 스승이 만나 데아론의 잠재력을 날마다 속성으로 끌어냈다.
“다행이야. 나는 그대가 잘할 줄 알았어.”
첼루나는 뿌듯하게 선포했다. 데아론은 짐짓 코웃음을 쳤다.
“그걸 공주님이 어떻게 알아요?”
“글쎄, 나는 모르는 게 없으니까?”
“하하하.”
“농담이고, 그냥 그럴 것 같았어. 이 세상에 그대가 못하는 일이 있을 리 없지.”
“음, 그거야말로 농담이시네요.”
“맞아, 농담이야.”
별 뜻 없이 경쾌한 대화가 오갔다. 빙빙 돌려 말하는 사교계 화법도, 압축된 의미를 담은 심오한 정치적 논의도 없었다.
나중에 정확히 서로 무슨 말을 나눴는지는 잊힐 수 있어도 이 순간의 눈빛, 미소, 온기는 절대 잊히지 않으리라. 절대.
그들은 꿈속에 사는 느낌이었다. 당장에라도 깨질 듯 위태로워서가 아니라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매 순간 달아서.
지난가을부터 내리 그랬다. 텔레스 황녀의 제안이었다. 자기가 데아론 텔로아를 기사로 들일 테니 첼루나 너는 그 아이를 보란 듯이 가까이하라고.
<어쩌면 약혼을 주선할 수도 있어. 진짜 혼담이 오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런 소문이 돌아다니게. 네가 블레논을 버리고 나를 택했다는 사실에 공개적으로 쐐기를 박는 일이니까.>
그 말을 듣고 첼루나는 멍해졌다. 약혼? 혼담? 내가? 데아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