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현재로 돌아와, 열아홉 살 앰벌리는 데아론 텔로아와 아델라 프란체스를 양옆에 거느리고 제게서 서서히 멀어지는 공주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데아론 텔로아. 텔로아 후작의 아들. 비천한 사생아. 아마 텔레스 황녀의 예비 시동생으로 이미 내정된 자.
앰벌리 본인도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곤욕을 치른 게 한두 번이 아니니 결단코 저 소년의 혈통 때문에 그를 깔아뭉갤 의도는 없었다.
다만, 첼루나 공주가 저 소년을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바로 그 눈빛을 보고, 앰벌리는 저 소년을 향해 활활 질주하는 이전과는 다른 불을 느꼈다.
그 불은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텔레스와 모리안도 아이들을 관찰 중이었다. 황녀는 프란체스 백작의 딸을 알아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프란체스를?’
저 아이는 황자궁의 시녀 아닌가.
첼루나가 아델라 프란체스와 친한 사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신과 손잡기로 한 이후에는 당연히 멀리할 줄 알았는데.
‘프란체스도 내 편으로 끌어오겠다는 건가? 하지만 그쪽은 워낙 라토르 공작과 친해서 어려울 텐데.’
정확히 말하자면, 야망 가득한 프란체스 백작이 라토르 공작에게 거의 비굴할 정도로 매달리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
텔레스는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이복동생의 의중을 골똘히 분석하는 사이, 모리안도 자기 동생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전하.”
“응?”
두 사람은 남들에게 들리지 않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화했다.
모리안이 자기를 부르자 텔레스는 무심코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생각보다 가까이서 만났다.
‘아.’
간격이 너무 좁았다. 모리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텔레스의 손끝이 살짝 움찔했지만, 이에 대해 그녀는 침묵했다.
“제 동생, 말입니다. 데아론이요.”
모리안은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고 자신이 원래 하려던 말을 했다. 그래도 말이 조금 어색하게 끊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첼루나 공주님과 생각보다 각별한 사이인 것 같습니다.”
“알아, 그래 보여.”
“어쩌실 겁니까?”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데?”
“……제 동생과 염문이라도 나서 공주님의 입지가 위태로워질까 두렵습니다. 이제 공주님은 전하와 같은 편 아닙니까? 평판에 흠이 생기면 여러모로 곤란합니다.”
“여전히 동생에 대한 평가가 박하구나. 네 동생과 염문이 나는 게 첼루나한테 불리한 일이라고 생각해?”
“아직 부족한 아이입니다.”
“하지만 네 부친의 아들이지. 네 가문의 이름이 가진 가치를 과소평가하지 마, 모리안.”
텔레스는 격려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모리안은 잠시 조용했다.
‘그래서 그 이름의 가치만 보고 전하께서는 저를 선택하셨습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수치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오히려 저 둘이 친하게 지내는 게 우리한테 이롭다고 생각해. 그리고 만약 저 둘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 이상이라면…….”
“이상이라면?”
모리안은 나직이 채근했다. 텔레스는 제 동생을 곰곰이 바라보았다.
첼루나는 백작의 딸과 후작의 아들과 함께 무언가를 얘기하며 웃고 있었다.
딱 지금만이라도 그들은, 그저 평범하게 사이좋은 열일곱 살 어린애들로 보였다.
“성녀이자 황족인 공주가 텔로아 후작의 차남과 혼담이 오간다면. 그 공주의 입지는 더 탄탄해지겠지? 후작가에 힘이 더욱 실리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텔레스가 느리게 속삭인 말에 모리안은 눈을 홉떴다.
텔레스는 다시 모리안을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의 얼빠진 얼굴이 이 와중에도 퍽 귀여워서.
‘미쳤지, 진짜.’
이 남자를 귀여워해서 뭘 어쩌려고. 텔레스는 덧없는 감정을 서둘러 갈무리했다.
“너와 나의 약혼이 발표되고 저 애들도 교제 중이라고 소문이 나면 나와 성녀의 동맹도 더욱 공고해지는 거야. 오히려 유리한 여론을 조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텔레스의 그럴싸한 설득에도 모리안은 여전히 썩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감히 황족과 염문 같은 게 나기에는 자기 동생이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고 믿어서만은 아니었다.
“공주님과 제 동생의 의사는요?”
그는 나지막이 물었다. 그는 질문을 입에 담자마자 후회했다. 어째서 자신이 그런 같잖은 질문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게 중요해?”
텔레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녀는 흐리게 실소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거를 신경 썼다고.”
덧붙인 말은 비아냥에 가까웠다. 상대방을 향한 옅은 조롱이요, 자신을 향한 아픈 자조였다.
“네가 설마 첼루나의 마음이 어떤지까지 일일이 섬세하게 신경 쓰는 건 아닐 테고. 데아론이 걱정되는 거야? 걔가 마음에도 없는 여자애랑 억지로 정분이 난 척해야 할까 봐.”
이제 와서. 텔레스는 눈빛으로 제 첫사랑을 슬프게 비난했다. 모리안은 침묵했다.
“뒤늦게 다정한 척하지 말자, 우리. 그래 봤자 다 위선일 테니까. 어차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지금 저 애들을 봐.”
텔레스는 가볍게 턱짓했다. 모리안은 다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지금만큼은 그저 평범한 열일곱 살 어린애처럼 보이는 세 사람. 여전히 그들은 웃고 있었다.
“저 눈빛을 봐, 모리안. 네 동생이랑 내 동생이 지금 서로 나누는 저 눈빛을. 저게 가짜로 보여? 연기 같아?”
아니.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 모리안은 하염없이 응시했다. 옆에서 텔레스는 아득하게 속삭였다.
“저 둘은 지금 서로 진심이야. 이 분야에 대해선 나도 아는 게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알 것 같아.”
우리가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까. 고작 스물한두 살에 사교계와 정계에서 지독하게 찌들어 버린 우리.
잔뜩 망가진 어른이 되어 버렸어. 누구보다 능숙하고 교활한 배우야.
모리안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존재는 믿더라도 그 가치를 부정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가 의무적으로 아내와 몸을 섞어 자신을 낳았다는 걸 알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륜을 저질렀다는 걸 알았다.
또한 아버지의 그 사랑 때문에 어머니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 잘난 사랑 때문에 사생아로 태어난 내 동생은 또 어찌나 고통받았는지.
아이에겐 잘못이 없건만, 소년은 부모의 죄를 고스란히 짊어진 희생양이 되어 사람들의 손가락질 아래 으스러졌다. 전부 어른들의 ‘사랑’ 때문에.
텔레스도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의 가치뿐만 아니라 존재조차 의심스러웠다.
사랑인가? 정말로 저게 사랑인가? 내 부친이 저토록 쉽게 떠들어 대는 게 과연 사랑인가? 만약 아니라면 진정한 사랑은 대체 무엇인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황비에게 푹 빠졌다가 또 황후와 몸을 섞어 황녀를 낳았다.
황제가 그 자유분방한 아랫도리만 어떻게든 잘 간수했다면, 애초에 황자와 황녀의 살벌한 대립은 존재할 이유가 없었거늘.
이후에 황비는 딸을 낳다 죽었고, 황제는 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막내 공주를 고통 속에 몰아넣었다.
사랑하는 황비의 죽음을 전부 여식 탓으로 돌리며 저주하고 멸시하고 외면했다.
사랑, 사랑, 그 지긋지긋한 사랑. 텔레스도 모리안도 사랑을 경계했다. 그래서 그들은 혼담이 오가는 순간부터 생각했다.
사랑하지 말자. 절대 사랑하지 말자. 상대방이 너무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다. 고작 사랑이라는 변덕에 빼앗기고 싶지 않다.
제발, 너만은. 그리고 당신만은.
그러니 이따금 눈이 마주칠 때마다 철렁철렁 내려앉는 심장의 전율은 그냥 무시하자.
“괜찮을 거야, 모리안.”
텔레스는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녀의 시선은 내리 첼루나를 향했다. 데아론 텔로아를 바라보며 봄처럼, 또 해처럼 환하게 웃는 어린 공주를.
지금만큼은 저 애가 부럽다고 말한다면 미친 짓일까.
모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황녀와 마찬가지로 이복동생을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그 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서로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정말 달랐다.
그 사실을 알아낼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연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밤새도록 여러 대화가 오갔으며, 그중 단언컨대 으뜸을 차지한 화제는 황녀와 성녀를 둘러싼 숙덕임이었다.
“정말로 두 사람이 손잡은 걸까요? 황녀 전하와 첼루나 공주님이…….”
“글쎄요, 그게 어떤 형태든 과연 손잡았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황녀 전하께서 일방적으로 손 내밀었다면 모를까. 공주님께 무슨 힘이 있겠어요.”
“더는 그냥 공주님이 아니십니다. 성녀라고요. 듣기로는 아직도 꾸준히 대사제님을 만나신다고…….”
“세상에.”
“그분이 진짜 성녀가 맞기는 해요? 그냥 성서에 나오는 전설인 줄 알았는데.”
“성서뿐만 아니라 역사서에도 심심찮게 나오는걸요. 그리고 저는 직접 봤어요, 부인. 마탑 신축 기념행사에 갔었거든요.”
“그분이 진짜 성녀인지 아닌지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가장 중요한 건 교회에서 그분이 성녀가 맞는다고 발표했다는 겁니다. 대사제님이 직접 그렇게 공표한 이상, 상황은 끝난 거죠.”
“그럼 정말로 황녀 전하께서 앞으로는 교회와…….”
“하지만 그분은 원래 마탑 쪽과 줄이 닿은 걸로 알고 있는데?”
“마탑과 교회는 사이가 나쁘지 않나요?”
“제가 듣기로는 마탑 내에서도 파벌이 다양하대요.”
“그건 교회도 마찬가지죠.”
“사실 파벌이라면 어디나…….”
끊임없는 숙덕거림, 곁눈질, 저울질. 다섯 명의 황족은 그 모든 걸 예의주시했다.
그리고 연회 바로 다음 날, 그중 한 명이 움직였다.
“어서 오렴, 아들아.”
황제는 진정 반가운 낯으로 맏아들을 맞이했다. 블레논은 아비의 손등에 정중하게 입을 맞춘 뒤 깍듯한 태도로 아뢰었다.
“날씨가 좋으니 폐하와 잠시 걷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자꾸나.”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의 눈에서는 애정이 꿀처럼 뚝뚝 떨어졌다.
블레논은 부친의 저 맹목적인 친애를 항상 유용한 패로 여겼지만, 한순간도 진정으로 달갑게 느낀 적 없다.
부자는 함께 황제궁 후원으로 나갔다. 아직은 너무 쌀쌀하지 않은 가을바람이 두 남자의 금발을 가볍게 흐트러트렸다.
“어젯밤 늦게 잠든 것치고는 이른 시간인데. 너무 피곤하지 않으냐?”
“괜찮습니다, 폐하. 저야말로 너무 무례했던 건 아닌지 뒤늦게 걱정되네요. 폐하께서 아직 피곤하신데 저 때문에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아니다, 전혀 아니야. 만약 내가 무리해야 할 정도였다면 네게 말을 미리 했겠지.”
그건 그래. 블레논은 아비의 다정한 대답을 듣고 속으로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