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14)

혼자 서럽게 울고 있을 만큼 초라한 공주라 눈빛도 당연히 무기력한 패배자와 같으리라고 짐작했었다.

오라비에게 뺨을 맞고 아랫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공주라고 들어서, 그녀가 강자에겐 약하면서 약자에게만 강한 흔하게 비겁하고 비열한 부류인 줄 알았다.

그러나 눈물이 그렁그렁한 와중에도 똑바로 쏘아보는 저 맹렬한 시선 앞에서, 앰벌리는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공주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많은 것을 넘겨짚었다. 저런 눈빛을 짓는 사람이 강자 앞에서 비굴할 리가 없는데.

오히려 황자 앞에서조차 저런 눈빛을 짓다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더한 폭행을 당했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앰벌리도 정확하게 유추했다.

부끄러웠다. 귀족과 황족, 출신을 이유로 그를 무시하는 다른 윗사람들과 저 공주를 같은 부류로 취급한 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였다. 앰벌리는 묵묵히 자책했다.

당장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와중에도 있는 힘껏 꼿꼿하게 서 있는 저 소녀가, 어쩐지 궁금해졌다.

찍찍!

“으아, 깜짝이야.”

그때, 근처 덤불 뒤에 숨어 있던 다람쥐 하나가 후다닥 뛰쳐나와 풀밭을 가로질렀다.

공주는 화들짝 놀랐고, 앰벌리도 조용히 흠칫 놀랐다.

“뭐야, 그냥 다람쥐였네.”

공주는 안도하며 자그맣게 중얼댔다.

소녀의 눈빛이 부드럽게 풀렸다. 누군가에게 우는 모습을 들킨 줄 알고 잔뜩 날을 세웠는데 그냥 다람쥐였구나.

앰벌리는 또다시 충격받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서릿발처럼 매섭던 소녀의 얼굴에 한 가닥 포근한 미소가 깃드는 걸 보고.

공주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멈춰 도토리를 오물대는 다람쥐를 온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시는 사람 한정이었다. 그녀에게 상처 준 적 없는 작고 무해한 들짐승을 죽일 듯이 노려볼 이유는 없었다.

“귀여워라.”

공주는 사랑스럽게 속삭였다. 이렇게라도 결핍을 해소해야 했다. 도저히 사람한테 위로를 받을 수 없어서 그녀는 동식물을 보고 위안을 얻었다.

앰벌리는 계속 그녀를 지켜보았다. 한참 구경하던 공주는 다람쥐가 사라지자 아쉬운 기색을 삼키며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앰벌리는 자리에 혼자 남았다. 고요한 공간에 그의 숨소리만 크게 번졌다. 심장 뛰는 소리마저 유달리 선명했다.

혼자 울던 가련한 공주. 적군을 마주하는 장수처럼 사납고 꼿꼿한 공주. 다람쥐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던 상냥하고 따스한 공주.

그중 어떤 모습이 당신의 본질에 가까울까.

앰벌리는 난생처음, 다른 누군가의 내면이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지난 생과 마찬가지였다.

앰벌리는 계속해서 공주를 생각했다. 그러던 중, 희한한 소문을 들었다.

첼루나 공주가 달라졌다고 했다. 더 유순해지고 상냥해지고 착실해졌다고, 드디어 철드신 거라고 사람들은 기쁘게 얘기했다.

앰벌리는 공주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은 건지 궁금했다.

그가 그녀를 일방적으로 만난 게 고작 몇 달 전이었다.

그때 그토록 표독한 눈빛을 지었던 당신은, 그사이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기에 확 달라진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앰벌리는 공주를 직접 만나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황자궁에 상주하는 그가 무작정 공주궁에 넘어가 황족과 알현을 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약 1년 만에 그는 공주를 다시 마주했다.

“저기, 앰벌리 라크문.”

그리고 그는, 지독하게 실망했다.

“앰벌리 라크문, 맞지?”

“……첼루나 공주님을 뵙습니다.”

다시 만난 공주는 그때보다도 아름다웠다.

초라하게 숨어 우느라 잔뜩 헝클어진 모습과 지금 단정하게 차려입은 매무새를 비교했을 때, 후자가 더 고와 보이는 건 당연지사였다.

“제 이름을 아시는군요.”

그러나 앰벌리는 그 천사처럼 아리따운 모습에 감동하지 않았다.

높으신 황족께서 한낱 수습 기사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도 감격할 수 없었다.

“물론이지. 그대는 이미 황궁에서 유명한걸.”

공주의 상냥한 미소와 나긋한 말투가 전부 어색했다.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모습은 전부 가짜였다.

‘가식 덩어리.’

앰벌리는 정확하게 꿰뚫어 봤다. 그리고 속으로 차게 비웃었다.

‘결국 당신도 똑같아.’

앰벌리는 회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공주가 이미 한 번 스물세 살까지 살았었고, 이번 생에는 미리 아군을 모으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사근사근하게 군다는 걸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앰벌리는 상당히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어쩌면 본인이 오랫동안 눈칫밥을 먹으며 커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본인도 가식 덩어리인 그는 타인의 기만 역시 알아봤다. 그는 저런 모습을 지겹도록 봤다.

소위 사교계 화법으로 진심을 겹겹이 감춘 채 살랑살랑 접근하는 귀족들, 심지어 평민들까지.

앰벌리 주변에는 거짓말쟁이가 넘쳐 났다.

“그대에 관한 얘기를 참 많이 들었어. 내 외조부께서 그대를 직접 거두셨다고 했지. 늘 얘기만 듣고 서로 대화할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네.”

첼루나는 계속 웃으며 말했다. 순진한 소녀처럼, 온순하게. 앰벌리는 그 시선이 껄끄러웠다.

앰벌리는 겉으로는 자신을 존중하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그를 천하다고 비웃는 무수한 귀족을 기억했다.

출세한 그에게 어떻게든 잘 보여 본인도 콩고물을 얻어먹으려는 과거의 평민 이웃도 더러 있었다. 그들 역시 뒤에서는 그를 질투하고 매도하기 바빴다.

가식과 기만, 목적을 가진 속임수에 한껏 예민해진 그였다.

눈앞의 소녀도 뭔가 굉장히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제게 접근한 게 느껴졌다. 그 의도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마저.’

그는 자신의 태도가 퍽 우습다는 걸 알았다. 혼자 관찰하고 혼자 기대하고 혼자 동질감을 느꼈다가, 또 혼자 제멋대로 배신당해 화내는 꼴이었다.

자격 없는 실망감이었다. 머리로는 그걸 알았다. 그런데 마음은 괜스레 욱신욱신 쑤셨다.

“그렇습니까? 영광입니다.”

이참에 황제의 딸에게 은근슬쩍 아첨하여 자신의 입지를 돈독히 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권력 없는 공주라지만, 최근에는 평판이 바뀌고 심지어 황자와도 사이가 제법 괜찮아졌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평소에는 맘만 먹으면 거짓으로라도 한껏 매혹적일 수 있는 앰벌리가, 그때만은 도저히 가짜 미소를 그릴 수 없었다. 도저히.

“으응, 그래.”

공주는 당황한 듯했다. 그녀의 낯에서 순진한 기색이 싹 사라졌다.

거봐, 그럴 줄 알았어. 앰벌리는 씁쓸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럼 나중에 또 보자. 수고해, 라크문 경.”

“감사합니다, 공주님.”

적어도 포기가 빠르다는 점은 좋았다. 공주는 깔끔히 물러났고 앰벌리는 기꺼이 멀어졌다.

‘지긋지긋해.’

이름조차 붙일 수 없었던 불씨는 그날 꺼졌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불씨는 되살아날 계기조차 없어 보였다.

어느 날, 앰벌리는 다시 공주궁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이런, 첼루나 공주님을 뵙습니다.”

빈정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앰벌리는 멈칫했다. 그는 언젠가 그러했듯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수풀 너머로 현장을 유심히 살폈다.

황후궁 기사들과 공주궁 하녀들, 그리고 분노로 눈이 형형하게 단 첼루나 공주가 보였다.

아. 앰벌리는 저 눈빛을 알아봤다. 몇 년 전 그의 가슴을 세게 뛰게 했던 맹수의 시선이었다.

“야. 그대들이 그러고도 기사야?”

저 독설, 그래. 저 흉포한 말투가 앰벌리는 오히려 반가웠다.

“내가 너무 멍청해서 기사도의 뜻을 헷갈린 건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건 아닌 것 같거든. 자기보다 몸집 작고 나이 어린 여자들을 골리는 게 기사돈가? 무뢰배의 유희 아니고?”

사교계의 화법이랍시고 빙글빙글 돌려 말하는 다른 고귀하신 분들과 너무 다른 저 폭언이 좋았다.

나는 혹시 변태인가. 앰벌리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저기, 공주님.”

황후궁 기사들이 깜짝 놀라 절절매는 꼴도 좋았다.

앰벌리는 그들을 전부 알아봤다. 그의 출신을 이유로 뒤에서, 또한 앞에서 대놓고 이기죽대던 자들이었다.

“존경하는 황후 전하께서 지금 그대들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아시는지 모르겠네.”

겁도 없이 감히 황후의 이름을 걸고넘어지는 공주가 좋았다. 일종의 대리 만족이랄까.

“내가 아는 황후 전하는 기품 있고 지혜로운 분이신데, 가끔 그대들을 처벌하지 않고 그냥 두시는 걸 보면 의아할 정도야. 아니면 설마, 모르고 계시나?”

“공주님!”

“왜. 나한테 화가 나? 감히?”

원래 앰벌리는 신분 높은 자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남을 찍어누르는 걸 지독하게 싫어했다. 하지만 이때, 그는 그저 통쾌했다.

“내가 황제 폐하의 딸이라는 걸 그대들은 가끔 잊는 것 같아.”

그러게. 당신은 황제 폐하의 딸이다. 그런데 몇 년 전 그때, 당신은 그토록 쓸쓸하게 울고 있었어.

볼품없이 우는 와중에도 독기를 잃지 않은 당신의 눈빛이 참 오싹하게 고혹적이라 한동안 홀렸었다.

그런데 그랬던 당신이 어느새 순하게 내숭이나 떠는 평범한 애로 전락한 것 같아 멋대로 실망했었는데.

그런데 지금 자기 하녀들을 건드린 황후궁 기사들을 사납게 물어뜯는 모습이 마치 그녀를 처음 봤을 때와 같아서, 앰벌리는 마음이 술렁였다.

현재 공주가 저토록 화내는 이유가 자기 하녀들이 희롱당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마음에 쏙 들었다.

아아, 한낱 하녀를 위해 저토록 난폭하게 분노하는 공주라니. 참 아름답지 아니한가.

첼루나 공주님, 당신은 참으로 황홀하다.

“자, 어서 그대들이 불량배처럼 괴롭히던 아이들에게 사과해. 진심으로 정중하게 사과해야만 하네. 그리고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하게. 그럼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넘어가지.”

“……공주님, 아뢰옵기 송구하지만. 정확히 저희가 어떤 일로 누구에게 사과해야 하는 건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뭐?”

“억울합니다, 공주님. 저희는 맹세코 공주님이 보시기에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어? 내가 그대에게 무릎 꿇고 땅에 이마를 박으라고 명해야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겠는가?”

공주가 차디차게 씹어 뱉는 언어에 앰벌리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그 싸한 느낌마저 환영했다.

“사과해.”

만약 저분이 자신을 저토록 칼을 품은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압박한다면, 기꺼이 저분의 발치에 무릎 꿇고 발등에 입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응, 잘했어. 그리고 이 애들한테도 사과해.”

끝까지 하녀들을 챙기는 공주가 사랑스러웠다.

앰벌리는 황후궁 기사들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본인도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

그때부터 앰벌리의 마음속에는 불이 있었다. 스스로 도저히 어쩌지 못할, 처음에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 불길이.

전생과 퍽 닮은 흐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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