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14)

“아델라, 이쪽은 데아론 텔로아야. 텔로아 후작의 둘째. 둘이 데뷔 무도회에서 인사했지?”

첼루나는 실연당한 친구를 친절하게 돌아보며 자신의 연인을 소개했다.

이번 생에는 프란체스 백작가도 황녀를 따랐으면 하니, 그 집 딸과 텔로아 후작의 아들이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건 당연지사였다.

“네, 전하. 넉 달 전에 서로 만났습니다.”

“네, 맞아요. 다시 만나서 더 반갑습니다, 데아론 군.”

아델라는 곰살갑게 인사했다. 엄청난 태도 변화였다. 넉 달 전 데뷔 무도회에서 데아론을 향한 아델라의 태도는 대부분 다른 귀족들만큼이나 쌀쌀했었다.

데아론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프란체스 양.”

하지만 아델라와 마찬가지로, 데아론도 정치를 생각할 줄 아는 아이였다.

무엇보다 아델라는 첼루나의 친구였다. 데아론은 연인을 기쁘게 하고 싶었다.

“우리 모두 동갑이니까 다들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너무 어른들 틈에만 끼어 있으면 피곤하잖아?”

첼루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판을 깔았다.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데아론과 아델라는 아직 모르지만, 조만간 사이좋게 황녀궁을 들락거릴 조합이니.

“어머, 사실상 우리도 벌써 어른 아닌가요, 공주님? 우리 모두 성년이잖아요. 가끔 저도 제가 벌써 열일곱 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기는 하지만.”

“저도 몸만 크고 마음과 머리는 아직 어린아이인 느낌입니다. 아직 나잇값을 하려면 한참 멀었다는 뜻이겠죠.”

아델라의 재잘거림을 데아론은 생긋 웃으며 매끄럽게 받았다. 아델라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글쎄요, 나이에 정해진 값이 있을까요? 인간은 편의를 위해 법적으로 성년과 미성년자를 나누지만, 실제 구분은 훨씬 모호한 것 같아요.”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불편해도 맞춰 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사교계에서 데아론의 평판은 ‘무식하고 천박한 평민 출신 사생아’로 그쳤다.

사람들은 정작 그와 한마디 대화도 해 본 적 없으면서 출신을 근거로 많은 것을 넘겨짚었다. 아델라도 원래 그중 한 명이었다.

이제야 그녀는 데아론과 실제로 말을 섞었고, 소년의 유려한 화법과 산뜻한 태도에 진심으로 충격받았다. 몹시 거만한 놀라움이었다.

‘놀란 거 다 티 나거든.’

데아론은 속으로 씁쓸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정중하고 유쾌한 낯을 유지했다. 전부 첼루나를 위함이었다.

공주의 이름에 불명예를 더하는 연인이 되고 싶지 않아서, 데아론은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귀족들의 가식을 스스럼없이 늘어놓았다.

연인. 어느덧 데아론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공주의 연인이라 일컬었다.

아까 테라스에서 나눈 키스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용감하고 달콤한 소녀가 상냥하게 맞잡아 준 손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차가운 사람들로 가득했던 암흑의 삶은 소녀에게 구원받았다. 그녀가 그의 기쁨이 되었다.

지난 생과 같은 흐름이었다. 물론 소년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사이, 어떤 기사는 불타는 연청색 눈으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 * *

앰벌리는 원래 평민이었다. 어린 소년이 우연히 공작의 눈에 띄어 검을 배울 기회를 얻은 건 그가 생각한 일생 최대의 행운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상냥하지 않은 태도도 그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못했다. 출신을 들먹이며 이기죽대는 사람들 앞에서 그는 진심을 감추고 정중히 웃었다.

그렇게 혼자 삭이고 혼자 견디며, 그는 이따금 울컥울컥 치미는 설움을 켜켜이 쌓아 한 덩이 싸늘한 원한으로 만들었다.

언젠가는 내가 너희 모두 위에 서리라.

온유하고 예바른 성품의 앰벌리는 사실 그토록 냉혹한 야망의 소유자였다. 한때 자신을 비웃었던 모두의 머리를 보란 듯이 밟고 싶었다.

실력으로만 따진다면 저보다 형편없이 뒤처지면서 혈통을 내세워 거들먹거리던 사내들.

준수한 평민 소년을 탐스러운 노리개쯤으로만 여기던 게걸스러운 여인들.

그들 모두에게 앰벌리는 복수를 다짐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황족의 믿음직한 수족이 되어, 그 인간들은 꿈꾸지도 못할 부와 명예와 권력을 거머쥠으로써.

두 번의 삶 모두 앰벌리는 그런 목표를 좇아 살았다. 첼루나 포렌타인, 그 힘없는 공주를 만나기 전까지.

“하여튼, 성질머리 하나는 제국 최고라니까.”

“쉬이, 말조심해. 누가 들을라.”

“들으면 뭐 어때? 누가 그분 편을 들어 준다고. 누가 듣든 나랑 같은 마음일걸.”

“그래도, 폐하의 따님인데…….”

“야, 언제 폐하가 그분 따님 취급하는 거 봤니?”

“쉬이, 이건 진짜 조심!”

“맞아, 이번에는 너 좀 위험했어.”

“난 공주님이 좀 불쌍하기도 하더라. 어제도 황자궁에 불려 가서 맞고 오셨다며. 그래서 오늘 그렇게 기분이 나쁘셨던 걸지도…….”

“흥,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우리한테 화풀이해도 되니? 그건 아니잖아. 그리고 자기가 또 뭐 맞을 짓을 해서 맞았나 보지, 뭐.”

“하긴, 나 같아도 내 동생이 평소에 그러고 살면 패고 싶었을 것 같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고.”

까르르 웃으며 조롱하는 시녀들의 목소리. 차가운 한숨 또는 은근한 음담패설을 섞어 공주를 언급하는 시종들.

열다섯 살 초봄, 황자의 수습 기사로 막 입궁한 앰벌리는 그런 얘기들을 주워들었다.

첼루나 공주, 황제의 사랑받지 못한 막내딸. 아랫사람들마저 그녀를 질긴 안주처럼 씹어 댔다.

‘가엽네.’

앰벌리는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황족으로 태어나도 별거 없구나. 혈통도 혈통 나름이었다.

그는 평민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했고, 공주는 군주의 딸로 태어나서도 조롱받았다. 참 이상한 세상이라고 앰벌리는 생각했다.

그 외에 접점은 없었다. 시큰둥한 연민, 조금의 동질감. 그런 감정은 어렴풋이 감돌다가도 곧 사라졌다.

‘그래 봤자 황족이야.’

아무리 불쌍한 마음이 들어도 서로 사는 세상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물리적으로 마주칠 일도 별로 없었다. 공주는 공주궁에, 앰벌리는 황자궁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앰벌리가 아직 드넓은 황궁 지리에 미숙할 때였다.

초조하게 후원을 헤매던 그는 낮게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우뚝 멈췄다.

“흐, 윽.”

서럽게 훌쩍이면서도 어떻게든 멈춰 보겠다는 오기마저 느껴지는 소리였다.

울음의 주인은 연신 가냘프게 떨며 젖은 숨을 삼켰다. 수풀 너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지?’

얼떨결에 수풀 뒤에 쪼그려 숨은 앰벌리는 이파리 사이로 빠끔히 훔쳐보았다.

아마도 열서너 살, 작은 소녀의 어깨가 보였다. 태양처럼 붉은 머리카락도.

‘……첼루나 공주.’

앰벌리는 깨달았다.

워낙 공주궁에 유폐되었다시피 사는 공주라 여태 한 번도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공주가 죽은 황비를 닮아 머리칼이 붉다는 사실은 들어 봤다.

시녀도 호위도 없이 이런 구석진 곳에 혼자 숨어 우는 황족이라. 확실히 초라했다. 앰벌리는 옅게 눈살을 찌푸렸다.

‘공주가 저 지경이 되도록 아무도 챙기지 않는다고?’

앰벌리는 이 황실의 작태가 우스웠다.

거만한 황족과 귀족 연놈들, 자신들이 고귀한 피를 타고났다는 이유로 온갖 사람을 무시하면서 정작 자신들도 천박하기 짝이 없다.

귀족 궁인들은 평민 출신 앰벌리를 은근히 멸시했지만, 그의 눈에는 그것들이 자기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결국 그것들도 똑같이 잔인하지 않은가. 어쩌면, 더.

‘황제 폐하랑 황자 전하도…….’

심지어 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두 남자는 피 섞인 가족이 혼자 버림받아 울고 있는데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황녀는 이복이고 황후는 남남이니 그렇다 쳐도, 두 사람은 대체 뭔데?

앰벌리의 연민이 짙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공주를 위로하기 위해 다가가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제비꽃색 눈을 지닌 어느 소년이 지금 여기 있었다면 공주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당장 다가갔을 텐데, 앰벌리는 그러지 않았다.

‘가엽네.’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무시당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았고 더는 그 비참한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도록 힘을 원했다.

아무도 아끼지 않는 까칠한 공주에게 줄을 대 봤자 앰벌리에게 도움 될 건 없었다. 그는 냉정하게 판단한 뒤 슬그머니 돌아섰다.

뚝!

‘젠장.’

실수로 밟은 나뭇가지가 시끄럽게 부러지는 순간, 앰벌리는 속으로 욕하며 퍼뜩 얼었다.

“누구야?”

그새 눈물을 그친 어린 공주가 날카롭게 불렀다.

앰벌리는 가만히 숨죽였다. 제가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여러모로 어색한 상황이었다.

“거기 누구냐고 물었어.”

공주의 음성은 고압적이었다.

이건 그녀가 회귀하기 전, 과거와 다른 삶을 살기로 한 그녀가 전략적으로 모두에게 온순하게 굴기 이전이었다.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는 그녀는 가장 고귀한 이의 딸로 태어났으면서도 혼자 우는 게 익숙했다.

그 와중에 악착같은 자존심만 남아서, 그녀의 말투와 눈빛에는 날이 뾰족하게 서 있었다.

앰벌리는 조용히 식은땀을 흘렸다. 이제라도 나가서 상황을 얼버무려야 하나?

‘어쩔 수 없지.’

앰벌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이렇게 영영 어정쩡하게 숨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공주가 먼저 다가와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게 나을 듯했다.

앰벌리는 천천히, 마지못해 공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공주는 계속 수풀 쪽을 노려보았다.

몸을 일으키기 전, 앰벌리는 수풀 너머로 공주를 직시했다.

첼루나는 여전히 앰벌리가 보이지 않았다. 앰벌리만 상대방이 보이는 각도였다.

그때, 앰벌리는 숨이 막혔다.

‘아.’

소녀는 그 어린 나이에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고작 열세 살 꼬마의 미모에 홀려 앰벌리가 호흡마저 그친 건 아니었다.

저 형형한 눈빛이, 저 꼿꼿한 자세가, 전부 소년을 압도했다.

황금처럼 반짝이는 눈은 물먹은 와중에도 처연하기보다는 사납고 예리했다.

사교계에서 여인은 주로 꽃에 비유되지만, 소녀는 한낱 무력한 식물 따위가 아닌 잘 벼린 칼을 닮았다.

다만, 그 칼은 손잡이가 없어 잡은 이조차 다치게 할 흉기였다.

사랑받지 못한 공주 첼루나는 자신이 상처받은 만큼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사람들에게 까칠하고 쌀쌀맞게 굴수록 그녀 또한 다쳐서 피를 흘렸다.

앰벌리는 그 눈빛에 홀려 버렸다. 저토록 포악하면서도 외롭고, 강렬하면서도 서글픈 눈빛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