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14)

사실, 아델라는 내심 텔레스 황녀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부럽다고 생각했다. 오라비를 제치고 후계자가 되려는 그녀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는 게.

나와는 상황이 너무 다르지 않은가? 하긴, 그분은 황족이고 나는 아니니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겠지.

‘정말로 공주님은 황녀 전하 편으로 돌아선 건가? 왜? 어떻게? 언제부터? 아니, 대체 왜? 공주님은 황자 전하와 동복이잖아?’

황비의 딸이 황후의 딸을 편든다고? 아델라는 몰이해 속에서 헤맸다.

그러면서 두 자매의 갑작스러운 동맹이 제게 미칠 정치적 악영향을 절박하게 계산했다.

‘황자 전하한테 잘 보이고 싶었는데.’

여태 아델라는 블레논의 눈에 들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 어떤 성애적 맥락도 없이, 믿음직한 신하로서.

자신이 황족의 신뢰와 총애를 얻는다면 나중에 어떻게든 남동생 대신 백작위를 물려받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여겼었다.

블레논의 동복동생과 친하게 지내는 건 그런 면에서 제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첼루나는 갑자기 텔레스 황녀와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아델라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을 당혹에 빠트렸다.

‘그리고 왜 하필 저 사람이야?’

아델라가 당황한 이유는 더 있었다. 데아론 텔로아. 하필 그다. 텔로아 후작의 사생아 둘째.

텔로아 후작은 황녀의 측근이니, 공주가 보란 듯이 후작의 아들과 함께 다니는 건 정치적 선언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굳이 데아론 텔로아여야 했을까. 아델라는 의아했다.

평민 피가 섞인 불륜의 결실은 사교계에서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공주와 수준이 너무 달랐다.

아델라의 의구심은 데아론 본인의 것과 같았다. 조금 전 테라스에서, 그는 공주의 제안을 듣고 기절할 뻔했다.

<이제 슬슬 들어가야 할 것 같아.>

한참을 뜨겁게 키스하고, 한참을 다정하게 속삭였다. 서로 소곤소곤 대화하며 밀회를 즐기기 얼마, 첼루나가 연인에게 말했었다.

<네, 어쩔 수 없지요.>

데아론은 지독하게 아쉬워했다. 그는 남들 앞에서 첼루나와 각별한 티를 낼 수 없다는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밀회는 밀회로 그쳐야 하리라. 연회장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다시 서먹해져야겠지.

<공주님이 먼저 들어가세요. 저도 곧 따라가겠습니다.>

데아론은 상냥하게 권했다. 둘이 동시에 연회장에 다시 나타나면 의심을 살 테니 시간 간격을 두고 재입장할 생각이었다. 그게 당연한 이치였다.

<싫은데? 나는 그대랑 같이 들어갈 거야.>

첼루나는 그 당연함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인생 2회차 소녀는 담대하게 소년의 손을 감쌌고, 아직 비교적 서툰 소년은 장밋빛으로 얼굴을 붉혔다.

<나와의 관계를 숨길 필요 없어. 오히려 황녀 전하께선 이를 권장하실지도 모르지.>

첼루나는 텔레스가 계속해서 데아론을 어둠 속에 방치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오로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도 황녀는 예비 시동생을 빛 가운데로 끌어낼 것이다. 전생에 이미 그러했듯이.

<앞으로 우리 둘이 친하게 지내면 황녀 전하께도, 그대의 가문에도 좋은 일이 될 거야. 그러니 그대가 숨을 이유는 없어.>

첼루나는 부드럽게 단언했다. 데아론은 공주를 빤히 보다가, 진지하게 속삭였다.

<정말로 황녀 전하 편에 서실 생각이군요.>

데아론도 듣는 귀가 있기에 비슷한 얘기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었다.

성녀로 밝혀진 첼루나 공주가 요즘 동복인 황자보다 이복인 황녀에게 더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그리고 아까도 데아론은 똑똑히 봤다. 공주의 데뷔 무도회 때까지만 서로 데면데면하던 자매가 몹시도 다정하게 팔짱을 낀 모습을.

아직 미숙한 열일곱 살짜리도 그 함의를 놓칠 수 없을 만큼 명백한 정치적 선언이었다. 데아론은 처음으로, 희망 비슷한 전율을 느꼈다.

<맞아.>

첼루나는 간결하게 시인했다. 간신히 되찾은 오랜 연인 앞에서는 사교계 화법으로 빙빙 돌려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내 언니를 섬길 거야.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그대의 가문도 이제 나와 같은 편이야.>

첼루나는 나지막이 선포한 뒤, 데아론의 손을 잡은 채 그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벌어지고 숨결이 섞였다. 또 한 번의 달콤한 순간이었다.

<그러니 겁먹지 마, 데아론. 우리는 함께할 수 있어.>

반드시 함께할 거야. 첼루나는 연인에게도, 본인에게도 단단히 약속했다.

회귀 직후, 데아론을 위해 그를 멀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정말로 자신이 그런 희생적인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제 보니 과욕이었다. 첼루나는 그렇게 희생적이지도 이타적이지도 못했다.

가장 간절한 소망을 힘겹게 억누르며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서만 바라본다고? 그런 건 할 줄 몰랐다.

지금 새 전략이 그녀의 천성에 훨씬 맞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갖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것.

<나랑 같이 나가자.>

첼루나는 데아론을 설득했다. 그리고 첫사랑에 빠진 소년은 속절없이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현재 첼루나와 데아론은 연회장에서 아델라와 앰벌리를 마주했다. 첼루나 혼자 태연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하긴, 설령 내게 섭섭한 일이 있어도 그대는 시원하게 말할 수 없는 처지겠지. 이해해. 미안하기도 하고.”

“어, 아니요, 공주님, 정말로 섭섭한 일은 없습니다.”

첼루나가 처량한 척 한숨을 폭 쉬자 아델라는 절절맸다.

실제로 아델라는 섭섭할 뻔했다. 지난 3년간 공주와 친구처럼 지낸 그녀는 약 두 달 전부터 엄청나게 바빠진 공주와 별로 교류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서운함을 토로하기에는 아델라가 영악하게 계산해야 할 점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공주님이 내게 갑자기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델라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흠, 그래?”

첼루나는 문득 곱게 웃었다. 그러더니 아델라에게 다정하게 팔을 뻗었다.

“그럼 다행이고. 나랑 같이 걷지 않을래? 그동안 못 나눴던 얘기를 하고 싶어.”

아델라는 망설였다. 여기서 그녀가 공주의 팔을 잡고 정답게 팔짱을 낀다면, 그녀 역시 이제 수군거림의 표적이 될 것이다.

황자의 시녀, 프란체스 백작의 딸이 공주와 사이좋게 지낸다. 그런데 공주는 이제 보니 황녀와 친하다. 그렇다면 프란체스가도 황녀를 지지한다는 뜻인가? 등등. 추론이 난무하리라.

‘……그걸 노리셨구나.’

그리고 영리한 아델라는 똑똑히 깨달았다. 그녀는 낯선 사람을 보듯이 공주를 관찰했다.

‘뭐야, 이분.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3년 전 첼루나는 순한 백치미를 뒤집어쓰고 아델라에게 접근했다.

회귀 후 새롭게 장착한 유순한 가면으로 타인을 속이며 또래의 호감을 샀다.

첼루나는 이제 가면을 벗어던진 채 훨씬 단단한 민낯으로 아델라를 마주했다. 아델라는 바로 그때 깨달았다.

“물론이죠, 공주님.”

이 공주도 자신과 비슷한 부류라는걸.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늘 기다렸어요.”

공주도 자신과 비슷한 야심가였다. 궁극적인 목표는 다를지 모르지만.

아델라는 어색한 표정을 싹 거두고 마주 웃으며 공주가 내민 팔을 잡았다. 소매가 맞닿았고, 소녀는 서로 눈을 맞추며 웃었다.

‘이분이 내 동아줄이 될 수도 있어.’

여태 황자에게 잘 보임으로써 가문 내 제 입지를 다지려고 애써 왔지만, 사실 아델라도 알았다.

집안 어른들의 뜻은 견고하고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로날드가 차기 가주가 될 것임을.

이제는 새로운 황족에게 줄을 댈 시간일지도 몰랐다.

자기 부친인 프란체스 백작이 아닌, 오직 아델라 프란체스 본인과 친분이 있는 황족.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 황족은 아델라에게 퍽 상냥했다. 아델라가 자신이 쥔 동아줄을 놓을 생각이 없듯, 첼루나도 자신이 쥔 패를 놓칠 마음이 없었다.

“라크문 경. 그대도 혹시 우리와 함께 걸을래? 음식이 있는 쪽으로 가고 싶어서.”

첼루나는 살짝 덜 상냥해진 투로 앰벌리를 돌아보았다. 아델라와 달리 앰벌리를 향한 첼루나의 태도는 아직 갈피가 잡히기 이전이었다.

‘아군이야, 적군이야?’

전생에 그는 내내 황자의 편으로 보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황녀의 첩자였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그랬는가? 언제 너는 변심해서 새 주군을 택했지?

‘지금은 누구 편일까? 블레논, 아니면 황녀 전하…….’

첼루나는 확신할 수 없었고, 확신이 없으니 결정도 없었다. 통제하기 힘든 미지의 변수는 첼루나를 불편하게 했다.

“황송합니다, 공주님. 지금 저는 배고프지 않아서 공주님과 동행하기 힘들 것 같군요.”

거절이었다. 앰벌리의 음성은 낮고 부드러웠다. 여전히 첼루나가 만족할 만한 단서는 없었다. 그녀는 순순히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나중에 또 보지.”

공주의 금색 눈과 기사의 청색 눈이 서로 응시했다. 그때, 그 연푸른 심연에 빛이 일렁였다.

‘또.’

첼루나의 눈가가 미세하게 굳었다. 넉 달 전 데뷔 무도회에서 받았던 해괴한 느낌이 다시 그녀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자꾸만, 저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살펴 가십시오.”

앰벌리가 정중하게 아뢰었다. 그 깍듯한 목소리마저 묘하게 뜨거웠다.

첼루나는 고개만 짧게 까딱인 뒤 양옆에 아델라와 데아론을 거느리고 돌아섰다. 이때 첼루나는 아델라의 표정이 살짝 우울한 걸 보았다.

‘아, 맞다.’

첼루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전생과 현생에 동시에 속한 기억이었다.

‘아델라가 앰벌리를 좋아했었지.’

회귀 전, 아델라 프란체스는 앰벌리 라크문을 연모했었다. 첼루나가 알기로는 짝사랑이었다.

황자를 지지하는 백작의 딸과 황자의 충직한 기사. 서로 정략적으로나마 이어질 법한 사이였으나 실제로는 혼담조차 오가지 못했다.

싸움 막판에 궁지에 몰린 황자가 꼬리를 자르기 위해 프란체스 백작을 버리는 패 삼았고, 앰벌리 라크문은 알고 보니 첩자였으므로.

‘이번 생에도…….’

지난 3년간 의도적으로 아델라와 친하게 지내며 첼루나는 그녀의 시선이 종종 누구를 향하는지 봤다.

누구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아델라의 볼에 옅은 혈색이 도는지도.

‘곤란하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연정은 아니었다. 자기가 뭐라고 남의 마음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겠느냐만, 불만을 참기 너무 어려웠다.

‘아델라가 너무 아깝잖아!’

지극히 사적인 이유였다.

첼루나는 이번 생에 아델라가 퍽 맘에 들었고, 앰벌리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라 불편했다. 내 소중한 친구가 그딴 자식을 좋아한다고?

‘이번 생에는 더 좋은 인연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앰벌리 라크문은 잊어, 아델라.’

첼루나는 속으로 친구를 열심히 설득했다.

전생에도 닿지 못한 마음이니 이번 생에도 희망은 접어라.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거야. 없다면 내가 만들어라도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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