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14)

이번 생에 데아론의 갑작스러운 속도는 사실 그리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다.

전생에는 전개가 확실히 느렸다. 회귀 이전에 첼루나는 정말로 데아론과 초면이었고, 까칠함이 습관이었기에 그에게 마음을 열기까지 훨씬 오래 걸렸다.

게다가 과거에는 첼루나도 초보였다. 열일곱 살 풋풋한 나이에 처음 사귀게 된 연인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생은 달랐다. 첼루나는 이미 데아론을 사랑하는 상태로 그를 만났다.

한쪽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다정한 와중에 나머지 한쪽이 훨씬 상냥해져서 만났으니 장벽은 더 낮았다. 한쪽은 허물 마음의 벽이 아예 없었다.

과거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조금씩 천천히 다가갔다면 현재는 첼루나가 먼저 데아론을 향해 단숨에 달려왔으니 거리가 훅 좁혀질 수밖에.

양쪽이 다 조심스러웠다면 서로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까지 한참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기다림에 지친 첼루나의 조급함 덕분에, 상대편은 아예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더 할 거야?”

첼루나는 촉촉해진 입술로 속닥였다. 데아론은 새빨간 얼굴로 끄덕였다. 첼루나는 픽 웃었다. 아아, 사랑스러워.

“얼마나 더?”

실질적 연상은 열일곱 살 어린애를 놀렸다. 소녀는 소년에게 바짝 붙었다.

테라스의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몹시 가까웠다. 고운 비단이 바스락대며 엉켰다.

“어, 공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데아론은 중얼거렸다. 첼루나는 생글대며 그의 뺨을 쓸었다. 손끝이 스친 곳마다 뜨거웠다.

“그럼 눈 감아.”

첼루나가 소곤댔다. 데아론은 순순히 복종했다. 첼루나는 웃으며 입술을 겹쳤다.

이제는 신음할 틈조차 없었다. 호흡조차 성가신 일이 돼 버렸다. 두 사람은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간간이 산소를 마셨다.

데아론은 서툴게 헤매면서도 솔직한 갈망대로 첼루나를 어루만졌다.

소녀의 목덜미를 쓰다듬던 소년의 손이 허리로 내려와 도톰한 천을 더듬었다.

‘얘 좀 봐.’

첼루나는 즐겁게 생각했다. 자신이 과연 이래도 되나 싶어 쭈뼛쭈뼛 주저하면서도 슬며시 애무를 시도하는 소년이 귀여워 죽을 지경이었다.

“데아론.”

“네, 네?”

첼루나가 녹진하게 속살대자 데아론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첼루나는 짓궂은 미소를 그리며 그의 귀에 대고 도발했다.

“오늘은 어디까지 만지고 싶어?”

소년의 몸속에 화염이 폭발했다. 소녀의 더운 숨결이 그의 예민한 살을 긁었다. 데아론은 순간적으로 솟구친 아랫배의 열기가 생경해 부르르 떨었다.

“그, 그게 무슨…….”

어디까지 만지고 싶냐니. 데아론은 당장 옷을 벗으라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가련하게 삐걱거렸다.

얄미운 첼루나는 푸핫 웃었다. 그 모습마저 데아론의 눈에는 단지 사랑스러웠다.

“농담이야, 농담.”

아직은 농담일 수밖에 없었다. 첼루나는 억지로 속도를 조절했다.

안 그래도 지금 전생에 비해 너무 빨리 가는 중인데,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아아, 네, 농담…….”

“그래, 농담이라고.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귀엽게.”

속도든 뭐든 모든 것을 데아론의 기준에 맞추고 싶었다.

그가 전생의 농밀한 연애를 전부 잊었다면 잊은 대로 천천히 다시 시작하길 바랐다.

과거에 그녀는 연인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으므로, 이번 생에는 상대방을 좀 더 배려하고자 했다.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그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귀, 귀엽…….”

그래도, 조금 놀리는 건 괜찮겠지. 이 정도는 봐줄 수 있잖아.

첼루나는 자기 혼자 과거를 기억하는 게 너무 아파서, 슬픔을 짓궂은 미소로 덮었다.

“데아론.”

고작 한마디 깜찍한 농락에 당황해 절절매는 너. 나를 잊었어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너.

데아론의 발개진 목덜미에 무언가 연한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 빛의 정체를 알아본 첼루나의 시선이 얼핏 가라앉았다.

“나는 그대가 좋아.”

목걸이. 데아론이 애지중지하는 모친의 유품. 알고 보니 신비한 힘을 품은 비밀스러운 보물.

“이런 내가 가볍다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만.”

첼루나의 눈매와 입술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드러운 저음은 어느새 경건할 정도로 진지했다.

“이게 내 진심이야.”

키스에, 고백에, 연달아 휘몰아친 꿈같은 일들이 데아론의 심장을 아찔하게 관통했다. 적어도 이제 망설임은 없었다.

“……저도, 당신이 좋은 것 같아요.”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렇게 키스할 수는 없다. 고작 오늘 세 번째로 만난 사이에 이렇게 심장이 아프게 뛰지도 않을 테고.

첫인상은 그저 엄청나게 예쁜 소녀, 그리고 갑자기 울던 이상한 사람.

상대방이 평민의 피가 섞인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도 경멸하지 않고 따스하게 웃어 준 아이.

그러다 미처 밤이 다 끝나기도 전, 소년은 사랑에 빠졌다.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이되 두 번째였다.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고마워.”

첼루나가 속삭였다. 이어서 소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대며 눈을 내리감았다.

데아론은 소녀의 어깨를 감싸며 포근히 그러안았다.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마음속은 오직 사랑에 잠겨 고요했다.

서로 죽음조차 거슬러 사랑한 이들은, 그날 총 두 번째로 연을 맺었다.

앰벌리는 빛 속에 있었다. 황자의 기사로서 세련된 제복을 차려입은 그는 조명 아래 제법 근사한 모습을 연출했다.

선이 곱고 부드러운 얼굴과 비교되는, 굵은 목선에서 이어지는 검사답게 탄탄하게 짜인 몸이 또래 숙녀들의 야릇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앰벌리는 소곤대는 음성과 힐끔대는 시선을 느꼈다.

순수한 호감과 풋풋한 설렘 같은 무해한 감정이 대부분이었으나 때로는 불순물도 섞여 있었다.

‘지겨워.’

노골적인 탐욕.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그런 눈빛.

흡사 젊은 육체를 탐내는 변태 노인과 같은 시선이었다. 앰벌리가 원래 평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유독 그토록 혼탁한 눈빛을 품었다.

뛰어난 검술과 충성심을 인정받아 기사로 임명된 앰벌리 라크문.

작위를 받았으니 그는 엄밀히 따지자면 귀족이었으나 이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오만한 자들이 가끔 있었다.

앰벌리를 자신과 동등한 신분으로 보지 않는 이들의 시선은 유독 동물적이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 호감을 품기보다 대놓고 약자를 탐하는 자들.

앰벌리는 그런 인간들이 지겨웠다.

“라크문 경, 연회장에서 보니까 반갑네요.”

지금 그에게 방긋거리며 활기찬 인사를 건네는 은발 소녀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앰벌리는 아델라 프란체스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게요. 반갑습니다, 프란체스 양.”

그러나 그의 마음에 호감은 없었다. 그의 예의 바른 미소는 정말로 딱 그뿐이었다. 예의.

“우리 둘 다 황자 전하를 모시는데 막상 서로 마주칠 일은 별로 없어서 아쉬워요. 그래도 이렇게 대화할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네요.”

이 씩씩한 소녀는 오늘 황자의 시녀가 아닌 백작 영애로 연회에 초대받았다.

한껏 멋을 부린 열일곱 살 소녀는 아름답지는 않을지언정 발랄하고 솔직했다.

딱히 숨길 생각도 없이 지난 몇 년간 제게 꾸준히 추파를 던져 온 소녀가 앰벌리는 그리 싫지는 않았다. 단지 좋지도 않을 뿐.

‘헛수고야.’

나는 당신께 드릴 마음이 없다. 앰벌리는 오늘도 아델라의 장단에 맞춰 주는 척하며 명백하게 선을 그었다.

“황자궁은 넓은 곳이니까요. 그대와 제가 마주치지 않는 게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죠.”

앰벌리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의 눈빛은 친절할지언정 뜨겁지는 않았다.

아델라는 이를 알고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주먹 안에 감췄다. 그녀는 애써 생긋 웃었다.

“그러게요. 그래도 우리가 함께 일한 게 벌써 몇 년짼데, 서로 아는 게 너무 적은 듯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서로 더 알아 가는 게 어때? 나는 네가 정말로 좋아. 그렇게 직설적인 고백을 바칠 수 없는 게 퍽 한스러웠다.

평소 성격이 당돌할 정도로 당당한 아델라지만, 그녀 역시 귀족 사회에 속한 사람이었다.

사교계의 암묵적인 제약을 하나하나 신경 써야 하는 부자유한 아이였다.

남자든 여자든 이성을 향한 너무 솔직한 구애는 품위 없는 일로 여겨졌다. 보통 그런 규칙은 여성에게 더 강압적이었다. 아델라는 망설였다.

안 그래도 옛날부터 아버지의 백작위를 탐낸다는 이유로 ‘숙녀답지 못하다’는 평을 지겹도록 들어온 그녀였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남동생의 자리를 넘본다고 했다.

내가 여기서 앰벌리에게 조금 더 다가가는 것도 숙녀답지 못한 일로 비난받을까? 앰벌리 본인이 그렇게 비난할까? 나는 참 주제를 모르는 여인이라고?

“아델라!”

그때 살가운 음성이 들렸다. 아델라는 흠칫했고, 앰벌리도 굳었다. 두 사람은 같은 쪽을 돌아보았다. 첼루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최근에 내가 그대에게 너무 소홀했지.”

첼루나 공주 곁에는 데아론 텔로아가 있었다. 소년은 어색해 미치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델라의 눈이 조금 커졌고, 앰벌리의 눈매는 반면에 가늘어졌다.

“아닙니다, 공주님. 제게 소홀하셨다뇨, 당치도 않습니다.”

아델라는 잽싸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불안하게 굴리며 지금 자기 눈앞에 나란히 나타난 공주와 소년을 분석하려 애썼다.

‘첼루나 공주님과 텔로아 후작의 아들이라니. 그럼, 설마, 진짜로…….’

아델라는 바보가 아니었다. 황궁에서 일하는 귀족의 딸은 필연적으로 많은 것을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요즘 첼루나 공주의 행보가 블레논 황자에게 퍽 불리한 쪽이라는 사실 등등.

두 달 전 공주가 성녀로 밝혀진 것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성녀를 앞세운 대사제가 황자의 뜻과 전혀 어긋나는 쪽으로 교회 인사를 갈아엎고 있다는 점은 더더욱 놀라웠다.

아델라의 가문은 황자를 지지했다. 프란체스 백작은 항상 라토르 공작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느라 바빴다.

자신이 약 3년 전 공주와 급격히 친해지기 시작했을 때, 아델라는 이 우정이 자기 가문과 황자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해 줄 줄 알고 좋아했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동아줄인 줄 알았던 공주의 친애가 이제 보니 덫이었다.

오늘 보란 듯이 텔레스 황녀와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던 공주를 보고 아델라는 기가 막혔다.

‘우리 집안은 황자 전하 편인데……. 그래서 나도 공주님이랑 친해진 건데……. 모두 같은 편이니까……. 그런데 이게 뭐야?’

큰일 났다. 망했어. 아델라의 등줄기에 소름이 싸하게 번졌다.

설마 내가 공주님과 친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내가 황녀 전하 편으로 돌아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설마, 설마?

‘아니야. 안 돼. 아버지랑 어머니랑 다 황자 전하 편이란 말이야.’

아직 부모님과 정치적으로 맞서는 걸 상상하기엔 너무 어린 열일곱 살이었다.

집안 어른들이 황자 전하를 지지하니 자신도 황자 전하를 지지하는 게 마땅했다. 그게 아델라의 신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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