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14)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그녀는 이 자리에 섰다. 전생에 6년간 보은했던 걸로는 모자랐다. 아무리 주고 또 줘도 줄 사랑이 남으리라.

“그대가 나보다 훨씬 친절하고 겸손한데 정작 그대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첼루나는 솔직하게 푸념했다. 이에 데아론은 다시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가 흔쾌히 답했다. 첼루나는 다시 콧등을 찡그렸다. 대체 뭐가 늘 그리 감사한지.

데아론은 첼루나가 찡그리는 모습마저 예쁘다고 생각했다. 자각하면 자각할수록 깊어지는 건 절망뿐이었다.

‘미쳤어, 진짜, 너.’

그래, 그는 이제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생각보다 이 예쁘고 다정하고 이상한 공주님께 끌리고 있음을.

아직은 그저 열일곱 살 소년의 얄팍한 풋사랑일지도 모르지만. 잠깐 스치고 말 설렘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는 그녀를 좋아했다.

‘안 돼.’

그리고 데아론은 굳게 믿었다. 이 마음의 끝은 오직 비극일 거라고.

그의 혈통을 이유로 수군대기를 좋아하는 옹졸한 사교계 사람들이 이제는 공주님까지 싸잡아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게 상상됐다.

다정한 소년은 그런 식으로 좋아하는 소녀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다. 풋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내면 그만이다. 무지한 소년은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어…… 공주님. 저는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는 정녕 무지했다. 바보는 아니지만 바보 같은 데아론. 그는 한 가지 뻔한 사실을 미처 몰랐다.

“아닐 텐데?”

이 마음이 짝사랑으로 끝날 수 없다는 걸. 이미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상대방이 그를 이토록 간절히 원하는데 짝사랑이라니. 전제부터 어긋났다.

“데아론, 가지 마. 아직 안 가도 되잖아.”

“어, 음, 그게. 제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형님이랑 아버지가—”

“그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첼루나의 음성이 퍽 스산해졌다.

지난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데아론이 후작 저에서 겪은 냉대를 상상하면 그녀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그 사람들이 지금 나보다 더 중요해?”

첼루나는 다소 유치하게 따졌다. 그러면서도 이미 질문의 답을 알았다.

“……그건 아닙니다.”

데아론은 솔직하게 속삭였다.

고작 세 번째 만난 소녀와 피 섞인 가족을 저울질하다니 엄청난 패륜이었다. 하지만 그 패륜이 그의 진심이었다.

그에게 상처만 준 이름뿐인 가족보다 소녀가, 이 소녀가, 처음부터 제게 이상할 만큼 다정했던 이 소녀가 훨씬 중요했다.

두 사람은 서로 잠자코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깊이.

황금빛 눈이 제비꽃색 눈을 파고들어 그 안에 자신의 온기를 낱낱이 새겼다. 온기는 펄펄 끓어 아예 열기가 되었다.

지난 생을 잃어버린 소년에게 이 감정은 아직 풋사랑이었지만 첼루나는 달랐다.

6년간 그의 연인이었고, 회귀 후 4년간 그를 그렸다. 그렇게 총 10년간 그를 사랑했다.

그 긴긴 세월을 고작 찰나의 인내심으로 전부 억누를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삶에서 사랑은 그 무엇보다 강했다.

조금은 비합리적이고 맥락 따위 없어 보여도, 사랑이라는 이름 하나로 모든 논란은 종결되었다.

지난 생에도 그랬다. 데아론, 너는 바로 그 미련한 사랑 때문에 나를 위해 목숨까지 버렸지.

그저 스쳐 가고 말 한때의 호감이든, 말 그대로 목숨을 걸 평생의 연정이든. 지금은 이 마음이, 이 떨림이 제일 중요했다.

황금과 제비꽃이 지척에서 얽혔다. 점점 더 깊이, 짙게.

그리고 다음 순간, 아마도 충동적으로. 어쩌면 운명적으로.

입술이 닿았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 는 표현이 있다. 첼루나는 그 표현이 얼마나 물리적으로 정확한지 자주 생각하곤 했다.

사랑에 눈이 멀고 귀가 먹고 이성이 마비되어, 상대방의 향긋한 체취에 이끌려 고개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숨결이 섞였다.

첼루나는 여태 너무 오래 참았다. 4년, 회귀하고 나서 무려 4년이었다.

4년간 혼자 전생을 기억하며 자신을 위해 죽었던 연인을 그리다가 마침내 그와 재회했을 때, 그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해야 했다.

첼루나는 무슨 대단한 영웅 같은 게 아니었다. 뛰어난 군주도 아니었고 엄청난 초인도 아니었다.

요즘 그녀가 새롭게 얻은 성녀라는 호칭도 사실은 과분했다.

그저 평범하게 나약하고 인내심 얕은 한낱 인간으로서, 그녀는 열망에 굴복했다.

“……?!”

입술이 겹친 직후, 데아론은 찰나 동안 얼어 있었다. 아주, 아주 짧은 찰나만이었다.

그의 입술은 곧 부드럽게 열려 소녀의 숨을 받아먹었고 눈은 저도 모르게 사르르 감겼다.

키스는 점점 더 농밀해졌다. 살끼리 스치는 소리가 촉촉했다.

혀의 동작이 대범했다. 첼루나는 실질적 연상답게 움직임을 주도했다.

말캉한 체온은 안쪽까지 스며들어 끈적한 흔적을 남기고 입술을 앙큼하게 덧그렸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데아론은 움찔 떨었다. 이번 생을 기준으로 모든 게 새로운 그는 서툰 손을 어쩔 줄 몰라 허공을 헤매다가 끝내 첼루나의 허리를 감싸며 뜨겁게 안착했다.

첼루나가 다시 입술을 벌렸다. 촉촉한 혀끝이 달착지근하게 스쳤다. 첼루나는 희열로 심하게 떨었다. 이번 생에는 처음이요, 너무나 그리웠던 쾌락이었다.

데아론도 어느새 적응하고 있었다. 홧홧하게 키스를 이어 가던 그는 소녀의 허리에 포갰던 손을 올려 첼루나의 목을 그러당겼다.

머리칼을 하나로 땋아 틀어 올린 첼루나는 매끈한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보드라운 맨살에 데아론의 손이 닿자 그녀는 별수 없이 신음했다.

“흐으.”

그 노골적으로 야한 소리가 데아론의 억눌렸던 이성을 두드렸다.

오직 본능적인 감각에 자신을 맡겼던 그는 뒤늦게 화들짝 놀라며 젖은 숨을 삼켰다.

“죄, 죄송합니다!”

부지중에 전생의 욕망에 압도당했던 그는 다시 현생의 순진한 소년으로 돌아와, 부푼 입술을 다급히 덮으며 하릴없이 뒷걸음질했다.

“죄, 죄송합니다, 공주님. 저는, 그게, 그……!”

미쳤어, 진짜. 고작 오늘 세 번째로 만난 사이에 뭐 하는 짓이야?

게다가 상대방은 황족, 무려 지존의 딸이었다. 나는 불경죄로 죽게 될 거야. 데아론은 여러모로 아찔해졌다.

걷잡을 수 없는 과속이 그를 어지럽게 했다. 혀끝에 남은 소녀의 향기에 취한 듯, 정신을 다잡는 게 너무나 어려웠다.

사실, 원래 평민이었던 데아론은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그나마 익숙했다. 그는 오히려 상대방의 신분이 훨씬 마음에 걸렸다.

이분은 이런 거에 훨씬 예민할 텐데. 나를 파렴치한으로 생각하면 어떡하지? 황족은 원래 품위에 죽고 품위에 사는 족속이잖아. 아닌가?

혼란과 흥분으로 반쯤 넋이 나간 나머지, 데아론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데아론, 왜 사과해? 내가 먼저 키스했는데.”

첼루나는 거의 짜증을 냈다. 그 말을 듣고 데아론은 숨을 뚝, 그쳤다.

아, 맞다. 그는 멍청하게 되뇌었다. 상대편이 먼저 다가왔지.

“그러니까 그대가 싫었으면 내가, 내가 오히려 사과해야지.”

첼루나도 제정신이 아닌 건 마찬가지였다.

사무치는 그리움, 흥분과 슬픔, 과거에 한 번 눈앞에서 잃었던 연인을 이렇게 다시 마주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경이.

온갖 격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그녀의 몸을 후끈하게 덥혔다.

“싫었어? 내가 억지로 입 맞춘 거야? 그렇다면 지금 당장 말해.”

현재와 과거가 눅진하게 엉켜 말투가 뒤섞이고 경계가 흐릿해졌다.

그녀는 이제 냉정하게 굴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미친 사람처럼 보일지 차분히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그대가 싫으면, 원하지 않으면……. 다시, 다시는 절대 안 그럴 테니까.”

이번 생에는 내가 싫다면 말해. 다시는 추근대며 언짢게 하지 않을게. 멀리서만 너를 사랑할게.

마음을 아예 접겠다고 약속 못 해서 미안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몰라.

“말해 봐. 싫었어?”

실컷 키스해 놓고 이제 와서 동의를 구하는 게 웃겼다. 그러나 소녀도 소년도 웃을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울고 싶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지러웠다.

“싫었을 리가.”

데아론이 속삭였다. 그는 이제 뒷걸음질하지 않았다.

“싫었을 리가 없잖아요.”

멍청하게 걱정하는 건 첼루나도 똑같았다. 싫었을 리가 없잖아.

만약 데아론이 방금 그 입맞춤을 추행으로 인식했다면 허리를 안지도, 목을 감싸지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냥 안겨 있던 것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끌어당기며 자신을 내던졌지.

“공주님.”

그가 불렀다. 기어코 마음을 자각하고 키스까지 저지른 이상,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사실 이유야 많았지만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키스해도 돼요?”

첼루나는 데아론의 올곧은 눈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이제는 그녀가 망설였다.

어떡하지? 너무 빠른가?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너무 앞서가는 건 아닐까? 내 욕심이 네게 과속을 강요하는 건가?

이번 생에서 우리는, 오늘에야 고작 세 번째로 만났는데.

“……기꺼이.”

하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하도록.

“물어볼 필요도 없어.”

지금 자신을 보는 소년의 눈이, 너무 뜨거워서.

“당분간 그런 거 일일이 물어보지 마.”

첼루나는 연인에게 팔을 뻗었다. 시간을 거슬러 상대방은 기억을 잃었어도 여전히 연인이었다. 변함없는 첫사랑이었다.

지난 생보다 훨씬 빠른 첫 키스의 시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겨를은 없었다.

이번 생에는 너무 갑작스레 시작된 관계가 혹 자신들의 운명을 비트는 건 아닐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소년은 소녀를 끌어당겼고, 소녀는 소년의 품에서 녹았다.

“하아…….”

첼루나는 축축하게 탄식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사실,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차고 넘치게 많았지만 첼루나는 일단 키스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번 생에 나랑 얘는 아직 열일곱 살이다. 아직 연애 초반, 아니, 애초에 연애를 시작하긴 한 건지도 모르겠다.

“데아론.”

자기가 지금 옳은 방향으로 가는 건지, 상대방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첼루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데아론.”

그렇지만 당장 너무 좋아서, 또한 슬퍼서, 첼루나는 이성을 뒤로하고 뜨겁게 입술을 붙였다.

현생의 데아론은 무슨 마음으로 내게 키스하는 걸까. 내가 좋아서? 벌써? 아직 고작 세 번째 만남인데.

입맞춤이 마냥 달지만 않고 의문투성이라 씁쓸하다는 점이 퍽 서글펐다.

하지만 뭐 어때. 첼루나는 데아론에 관한 거라면 씁쓸함조차 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령 그가 연회에서 제공하는 샴페인에 취해 술김에 이러는 거라 해도 기쁘게 받아들이리라.

첼루나에게 사랑은 맹목이었다. 자신이 이용당하는 거라 해도 상관없었다.

“공주님.”

그리고 현재 저 속삭임을 듣고 저 눈빛을 직시하면, 데아론이 그저 술이나 욕정에 취해 제게 다가왔다고 상상하는 게 불가능했다.

“하아, 공주님.”

그의 눈빛은 그녀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선하고 청명한 눈빛. 설탕처럼 달차근한 제비꽃색 불꽃. 사랑에 빠진 자의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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