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14)

루이사는 무언가 더 말하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첫마디를 꺼내기도 전, 그녀의 아버지 펠르만 백작이 또렷하게 말했다.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후작님.”

그러더니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딸의 어깨를 가볍게 짚으며 멀리 밀어냈다.

루이사는 살짝 눈가를 굳혔다. 데아론은 어리둥절했다.

뭔가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는 그에게, 루이사가 어깨 너머로 친절하게 인사했다.

“그럼 다음에 또 볼게요, 데아론 군.”

소녀는 다시 옅게 미소했다. 펠르만 백작은 다소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백작이 풀풀 풍기는 냉기를 무시하려 애쓰며 데아론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살펴 가세요, 루이사 양.”

펠르만 백작이 사라지자 데아론은 안도했다. 그가 자신을 경계하듯 바라보던 게 심히 마음에 걸렸다.

마치 제 순진한 딸에게 수작을 거는 개자식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단 말이지.

‘그런 거 아닌데.’

데아론은 속으로 실소했다. 수작이라니 그럴 리가.

그리고 설령 자신이 저 우아한 백작 따님께 수작을 걸었다 한들, 그녀가 넘어올 리 없었다. 고작 반쪽짜리 사생아인 제게.

그토록 과하게 겸손한 데아론은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바로 그가 몹시 잘생긴 편이며, 그 사실이 오늘따라 유독 주목받고 있음을.

데뷔 무도회 때 데아론은 테라스에 숨거나 공주와 달빛 아래서 춤추느라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다.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텔로아 후작은 더는 작은아들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만약 정말로 황녀가 조만간 황자와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면, 황녀의 약점이 될 만한 작은 흠조차 남겨 놓지 않기 위하여.

이는 후작이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을 낳았다. 적어도, 먼발치에서 데아론을 힐끔힐끔 지켜보던 첼루나의 생각으론 매우 심각한 부작용이었다.

‘야, 쳐다보지 마라…….’

첼루나는 겉으로는 곱게 웃으며 속으로는 죄 없는 소녀들을 향해 이를 꽉 악물었다.

너무 많이 쳐다본다. 다른 여자들이, 데아론을.

특히 아까 루이사 펠르만이 지나갔던 게 마음에 걸렸다. 첼루나는 점점 조급해졌다.

연회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허공에서 옅은 술기운과 감미로운 음악이 달콤하게 엉켰다.

첼루나는 다른 사람을 찾는 척하며 데아론이 있는 쪽으로 슬그머니 움직였다.

데아론은 모리안 곁에 서서 피곤한 티를 감추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데아론은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가까이서 공주와 눈이 마주친 그는 숨을 참았다. 이어, 목이 졸린 듯한 음성으로 그녀를 부르려 했다.

“공—”

“정확히 한 시간 뒤에, 테라스로 와.”

첼루나는 빠르게 중얼댄 뒤 그를 쓱 지나쳤다. 데아론은 멈칫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했다.

드디어 한 시간이 느리게, 너무 느리게 지나갔다. 데아론은 대충 음료를 더 가져오겠다며 얼버무린 뒤 약속을 지키고자 테라스로 나갔다.

소년과 소녀가 이번 생에서, 또한 지난 생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장소였다.

후자는 시간이 거꾸로 뒤집히며 소년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혔지만 전자는 낙인처럼 머릿속에 선명했다.

데아론은 잠시 어둠 속을 서성였다.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발소리가 들렸고, 그는 돌아보았다.

“데아론.”

그 목소리를 듣자 이유도 모른 채 먹먹해졌다.

“공주님.”

데아론은 기쁘게 속삭였다. 그 호칭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꿀을 삼킨 듯 달았다.

첼루나가 천천히 다가왔다. 눈을 빛내며, 조심스럽게.

야회복 차림의 그녀는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그러나 설령 드레스가 아닌 누더기를 걸친다 한들, 데아론의 눈에 그녀는 여전히 어여쁘리라.

“보고 싶었어.”

첼루나는 처음부터 폭탄을 투척했다. 꾸밈없는 고백에 거하게 치인 소년은 순간 호흡하는 법을 잊었다.

“그, 다음부터는 단둘이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면서요?”

데아론은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를 쥐어짰다. 공주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아팠다. 아, 아. 그는 이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상황이 바뀌었어. 이제는 이렇게 만나도 괜찮을 것 같아.”

소년의 코앞까지 다가온 소녀가 다정하게 속살거렸다. 거리가 너무 좁다는 생각에 소년은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광란의 춤을 시작했다.

“그래요?”

데아론이 간신히 되물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싱거운 반응이라 그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공주님 앞에서는 더 멋있고 의젓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다.

“응.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내가 너랑 같은 편이 될 수 없을 줄 알았거든.”

첼루나는 두서없이 설명했다. 그녀는 갈망을 삼키며 데아론 앞에 섰다.

지금 그녀는 고작 열일곱 살 소녀가 아닌, 과거에 이미 한 번 이 남자와 뜨겁게 사랑했던 완연한 여성이었다.

인내가 힘들었다. 끌어안고 싶다. 지금 이 순진한 소년은 상상하지도 못할 방식으로 그를 만지고 그를 깊숙이 삼키고 싶다.

이번 생의 데아론은 아직 어색하고 풋풋한 사춘기 소년이지만, 첼루나가 기억하는 스물세 살 청년은 여러모로 속속들이 어른이었다.

아, 지금과 같은 어둑한 테라스에서 우리는 서로 맞닿았지. 그 홧홧하고 저릿한 감촉을 너는 전부 잊었겠구나.

나를 위해 죽은 대가로, 너는 일생의 추억을 전부 잊었어.

“그런데 이제는 방법이 생겼어.”

첼루나는 자신의 설명이 퍽 불친절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지금 자신이 데아론을 별로 배려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첼루나야 과거에 이미 6년간 사랑했던 연인을 재회하는 것뿐이지만 눈앞의 데아론은 첼루나와 이제 고작 세 번째 만나는 거였다.

첼루나는 이번 생의 데아론과 속도를 맞출 의무가 있었다. 그 정도 배려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아, 그런데. 나는 어찌나 이기적인지. 역시 우리 중에 늘 착한 쪽은 너였어. 나는 너처럼 배려심도 인내심도 깊지 않아.

당장 손을 뻗어 겹치고 싶어. 네게 내 마음을 말하고 싶어.

“공주님이 성력을 각성했기 때문인가요?”

데아론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와중에도 똑똑하게 추리했다. 손끝까지 찡하게 울렸다.

어두운 공간에 단둘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긴장돼서, 그래서.

“그래, 맞아.”

첼루나는 활짝 웃었다. 역시 내 총명한 연인. 기특해. 사랑스러워. 예뻐. 그냥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긍정적인 형용사가 네게 속했어.

“음, 그런데 그게 정확히 무슨 상관인가요. 공주님이 성녀가 된 거랑, 지금 이거랑.”

데아론이 웅얼댔다. 이제는 볼까지 뜨거웠다. 너무, 너무 가깝다. 공주의 숨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지금 이거? 지금 이게 뭔데?”

“그…… 우리 둘이. 우리 둘만. 이렇게 가까이서. 이런 곳에 있는 거요.”

“이런 곳?”

“주변에 아무도 없잖아요.”

데아론은 새삼스레 지적했다. 얼굴이 사과색인 게 보였다. 흐응, 이 쓸데없이 조신한 남자란. 첼루나는 문득 픽 웃었다.

“그래서 싫어?”

“어, 아니요. 그건 아니고.”

“그럼 뭐가 문제야?”

“……저랑 이래도 되나요? 고작 저 같은 거랑. 공주님의 명예에 누가 될지도 모르는데.”

데아론은 바보가 아니었다. 열일곱 살이면 어리긴 해도 알 건 다 아는 나이니까.

그러니까 이 야릇한 분위기를. 팔뚝의 솜털이 올올이 솟는 듯한 긴장감을. 지금 소녀의 황금빛 눈에 활활 불타는 눅진한 열망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공주님, 저는 사생아입니다.”

결국 데아론은 자기가 가장 싫어하고 첼루나도 가장 싫어하는 말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녀는 인상을 확 찡그렸다.

“그게 뭐 어때서?”

그 찡그림도 소녀의 눈에 담긴 불꽃을 꺼트리지는 못했다. 데아론은 힘겹게 부연했다.

“그러니까, 저랑 어울려 봤자 공주님께 좋을 게 없다는 뜻입니다.”

첼루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데아론은 자기 때문에 공주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게 가슴 아팠다. 그 통증이 워낙 드세서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구나.’

나, 당신을 좋아하나 봐.

오늘이 고작 세 번째 만남인데, 나를 향한 당신의 시선이 너무 애틋해서.

당신이 나를 정말 다정하게 봐 주셔서. 마치 오래전부터 그리던 소중한 사람을 대하듯 참 달콤하고 따스하게 대해 주셔서.

처음 당신이 나를 보고 이유도 없이 울었을 때, 그리고 넉 달 전 함께 달빛 아래서 춤출 때.

어머니를 잃고 나서 너무도 외로웠던 나는 당신의 미소에서 온기를 찾은 거야.

예쁘고 씩씩하고 천사처럼 아름다운 당신이 내게는 이렇게나 상냥해서.

하지만 이 마음조차 과분하겠지.

“그대는 후작의 아들이야, 데아론. 엄연한 고위 귀족의 자제지.”

“공주님, 그래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곧 그대의 진가를 알아볼 거다. 그건 내가 장담해.”

첼루나는 전생을 떠올리며 약속했다.

네가 황녀 전하의 충신으로 인정받기 시작하고 평민 소생 혼외자라는 낙인이 점차 옅어지고 나면 아무도 너를 비웃지 못하리라.

“감사합니다, 공주님. 하지만 공주님이 그냥 친절하신 거예요.”

데아론은 빙긋 웃었다. 처연한 미소였다.

내가 평민으로 살 때도 당신은 아득했고, 후작의 아들로 격상된 지금 역시 멀기만 하다.

당신은 어쨌든 황제의 딸, 그리고 지금은 성녀로 추앙받는 전설적인 존재.

내가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당신과 나란히 설 수 있을 리 없어.

“나 별로 안 친절해.”

첼루나는 거의 짜증 내듯 고백했다.

내가 친절하다고? 너한테만 그래. 내 성질머리가 얼마나 더러운지 4년 전에 모두가 알았어. 그새 다들 많이 잊었을 뿐이지.

“친절할 뿐만 아니라 겸손하시기까지 하시네요.”

이제 데아론은 가볍게 농담했다. 그가 눈꼬리를 접으며 부드럽게 웃자 첼루나는 콧등을 찡그렸다.

데아론이 짐짓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제 고통을 감추려고 하는 게 싫어서. 또한 그런 와중에도 미친 듯이 준수한 그의 얼굴이 꽤 얄미웠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네, 네. 원하신다면 믿어 드릴게요.”

“짜증 나…….”

“음, 그건 좀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사과하지 마. 그대한테 사과받으려고 한 게 아니야. 나는, 그저…….”

네가 그만 슬펐으면 좋겠어. 네가 사랑받을 수 있을 리 없다고 끊임없이 스스로 세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난 2년간 주입된 비하적인 언어에 짓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생에도 너는 참 오래 걸렸지. 우리 둘 다 오래 걸렸어.

비천한 사생아와 천덕꾸러기 공주. 사랑하고 사랑받는 데 미숙했던 우리.

그나마 데아론이 훨씬 나았다.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그는 가족을 잃고 나서 일시적으로 망가졌을 뿐, 소녀를 통해 다시 애정을 주고받을 기회를 얻자 빠르게 회복했다.

첼루나는 처음부터 상황이 막막했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는 없고, 아빠는 차가우며, 오빠는 난폭했으니.

첼루나는 오직 데아론을 통해 구원받았다. 오직 그만이 그녀의 빛이고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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