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14)

그 후로 또 두어 달이 흘러, 다시 황궁이었다. 텔로아 형제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눈부신 곳에 입장했다.

연회장에 들어오자마자 데아론은 안 그런 척하며 주위를 두리번댔다. 그러기를 얼마, 소년은 공주를 발견했다.

‘아.’

데아론은 공주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그의 눈에는 그녀가 가장 예뻤다. 빛이 시선을 끌어당기듯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첼루나는 누가 보기에도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데아론이 보는 첼루나는 조금 달랐다.

그건, 뭐랄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고결하고 찬란한 것들만 그러모아 하나의 흠 없는 생명체로 빚은 듯한 느낌이었다. 데아론한테는 그랬다.

아직 제대로 자각하지도 않은 첫사랑이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과 마찬가지로 거의 운명처럼 그를 사로잡은.

데아론이 그녀를 볼 때 첼루나 역시 돌아보았고, 두 사람의 눈이 만났다.

‘엇.’

데아론은 어색하게 굳었다. 첼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배시시 웃었다. 눈매도 입술도 전부 둥글게 휘며.

데아론의 얼굴에 열이 쏠렸다. 이대로 심장이 폭발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데아론.”

옆에서 모리안이 중얼거렸다. 그제야 데아론은 정신을 차렸다.

황실 연회에 초대받은 사람은 황제께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한다. 순간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텔로아 형제는 상석에 자리한 황제 일가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데아론의 호흡은 위태롭게 얕아졌다.

‘뭐지?’

심장이 쿵쿵대는 와중에도 데아론은 의아했다.

공주님이 계속해서 나를 보신다. 심지어 아까는 웃어 주시기까지 했다. 그가 각오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그때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분명…….’

<앞으론 그대와 이렇게 단둘이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데뷔 무도회의 끝에서 공주는 그렇게 예고했고 데아론은 가슴 아프게 받아들였다.

눈칫밥 먹는 사생아와 어쨌든 고귀한 공주. 둘 사이에 간격은 커서 데아론은 자신이 다시 공주님과 말만 섞어도 기적일 거로 생각했었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빴다. 데아론은 여전히 그때와 똑같이 눈칫밥 먹는 사생아였지만 공주는 성녀이기까지 했으니.

‘내가 기사 임명을 받으면 더 나아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니었다. 데아론은 이제 막 검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을 뿐, 정식으로 기사가 되기까지 한참 남았으니까.

그런데, 나는 여전히 황족의 치맛자락 끝에 닿지도 못할 만큼 미천한데.

공주님은 나를 보며 웃어 주신다. 분명 내게 거리를 두자고 지난번에 당부하셨음에도.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황자 전하, 황녀 전하, 공주님께도 인사드립니다.”

옆에서 모리안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인사를 올렸다. 데아론은 묵묵히 따라 했다.

첼루나는 내리 데아론을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눈을 뗄 수 없었다.

‘보고 싶었어.’

그녀가 속으로 외쳤다. 조급한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였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고백이 쏟아져 나올까 봐 불안했다.

‘안고 싶어. 만지고 싶어. 너랑 얘기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아.’

지난 넉 달간 대체 어떻게 인내했나 싶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뜨겁게 달았다.

이딴 연회, 그냥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싶다. 죄다 집에 돌려보내고 저 애랑 단둘이 남고 싶어.

형식적인 인사가 끝났다. 형제는 황족들을 지나쳤다. 공손히 묵례를 마친 데아론은 첼루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른 황족들이 전부 지켜보는 앞에서 데아론이 저를 과하게 의식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첼루나는 마음이 아팠다.

“이제 너희도 연회를 즐기렴.”

손님들이 인사를 다 마치고 난 뒤, 황제가 아이들을 돌아보며 권했다. 그 아이들은 딱 두 명이었다. 황제의 시선은 여느 때처럼 첼루나를 마냥 건너뛰었다.

처음으로 첼루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조금의 상처도, 분노도 없었다. 그녀는 데아론을 생각하느라 바빴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존재는 그녀를 지키는 부적이었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사교춤 중심으로 돌아가는 무도회와 달리 연회는 담소와 식사가 주를 이루었다. 그래도 그 모든 행위의 목적이 친목이라는 점은 같았다.

“황녀 전하, 저를 다른 분들께 소개해 주시겠어요?”

첼루나는 예정대로 언니에게 다가갔다. 목소리는 유독 맑고 낭랑했다. 이 또한 의도적이었다.

“그럼, 물론이지.”

텔레스는 웃으며 각본대로 답했다. 그녀가 동생에게 팔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팔짱을 꼈다.

주변에서 힐끔대던 사람들은 이제 아예 눈을 휘둥그레 뜨며 쳐다보았다. 몇몇은 전혀 귀족답지 않게 입을 쩍 벌리기도 했다.

뭐야, 둘이 언제부터 저렇게 친했어? 황녀 전하와 막내 공주가, 황후의 딸과 황비의 소생이?

황자 전하는?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는 무슨 생각이시지?

다들 이 놀라운 장면을 분석하고 해석하느라 바빴다.

황녀와 공주는 과연 어떤 사이인지, 이번에 성녀가 거든 대교회의 인사 개편에 황녀는 어디까지 개입했는지, 이야기가 늘어졌다.

그사이 블레논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변했고 라토르 공작이 손자에게 서둘러 다가왔다.

공작이 무어라 중얼거리자 블레논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걸로 끝이었다.

앰벌리 라크문은 블레논의 기사로서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첼루나를 바라보았다.

“첼루나, 크레온 공작과 공작 부인이셔. 너도 이미 알겠지만 내 외조부모 되시지.”

텔레스는 주변의 소란한 반응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척 연극에 집중했다. 첼루나도 성실히 연기에 임했다.

“반갑습니다, 공작, 공작 부인.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죠.”

“그렇습니다. 영광입니다, 공주님.”

“영광입니다.”

올해 열일곱 살이나 먹은 공주가 이제야 황후의 부모에게 인사를 올리는 건 참으로 새삼스러웠다.

그만큼 공작 내외가 이전까지 첼루나를 꿋꿋이 무시했다는 뜻이며, 첼루나가 그 무례를 꾸짖을 만한 권력 따위 없었다는 뜻이다.

이제 판도가 바뀌었다. 황녀의 외가 식구는 황녀의 지시 아래 공주를 아군으로 받아들였다.

크레온 공작 내외는 마치 친손녀를 대하듯 공주를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그 온기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원래 그들이 사는 세계가 그랬다.

“앞으로도 종종 뵈었으면 좋겠네요.”

“물론이죠, 공주님.”

첼루나의 간드러진 미소에 상대방은 인자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완벽하게 화기애애한 장면이었다. 역시, 겉으로는.

신하들의 명연기에 만족한 텔레스는 동생과 팔짱을 낀 채 몸을 살짝 틀었다. 그녀는 새 동료를 소개받기 위해 다가온 또 다른 신하들을 마주했다.

“첼루나, 이쪽은 텔로아 후작이야. 이쪽은 후작 부인.”

첼루나는 언니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심장 뛰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리고 모리안 텔로아, 데아론 텔로아야.”

데아론 텔로아. 후작도, 후작 부인도, 그들의 잘난 아들도 필요 없었다. 첼루나는 오직 단 한 사람을 바라봤다.

데아론도 첼루나를 보고 있었다. 원래 데아론은 후작 부인이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으면 학습된 죄책감으로 소심하게 움츠리곤 했다.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보고, 보고, 오직 바라보느라 바빠서, 평소에는 습관처럼 그를 짓누르는 죄악감 따위 파고들 틈이 없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후작, 후작 부인.”

첼루나는 어른들을 보며 인사했다. 지금은 웃으며 연기하는 게 아까보다 힘들었다.

첼루나는 저 두 사람을 싫어했다. 저들 때문에 데아론의 마음에는 참 상처가 많았으므로.

“제대로 인사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첼루나 공주님.”

텔로아 후작이 대답했다. 그의 머리칼은 밤하늘처럼 검었고 눈은 숲을 닮은 녹색이었다.

첼루나는 데아론이 아버지의 눈 색까지 물려받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안 그래도 부자는 겉모습이 퍽 닮아서, 만약 눈까지 같았다면 첼루나는 기분이 꽤 상했을 것이다.

첼루나는 데아론의 제비꽃색 눈이 좋았다. 맑고 짙고 부드러운, 보석보다 들꽃을 닮은 그 보랏빛이.

첼루나는 한 번도 만나 보지 않은 그의 어머니가 똑같은 눈을 가졌었다고 한다.

첼루나는 또다시, 데아론의 엄마가 궁금해졌다.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게.

“만나서 반가워요, 모리안 텔로아 경. 그리고 데아론 군.”

첼루나는 차례로 인사했다. 데아론의 이름을 부를 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고작 연기로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영광입니다, 공주님.”

“……영광입니다.”

한결같이 차분한 모리안과 달리 데아론의 대답은 다소 더뎠다.

그 미세한 망설임을 알아채고 후작은 아주 살짝 눈살을 찌푸렸으며, 모리안은 데아론을 흘긋했다.

데아론은 주변 사람의 반응을 깨닫지도 못했다. 그 역시 첼루나처럼 너무 떨려서, 지금은 열일곱 살이 아닌 일곱 살 어설픈 어린애가 된 느낌이었다.

“앞으로 이들과 친하게 지내도록 해, 첼루나. 특히 데아론이랑. 둘이 동갑이지?”

옆에서 텔레스가 발랄하게 말했다. 첼루나는 끄덕였다.

“네, 전하.”

첼루나는 또 갈증에 꿰뚫렸다. 이 사람들 전부 치워 버리고 싶다. 데아론과 단둘이 있고 싶어. 이 세상 모두가 방해물이었다.

텔레스는 또 다른 유력한 인물들에게 동생을 소개하기 위해 움직였다. 첼루나는 황녀를 뿌리치고 싶은 마음을 온 힘을 다해 인내했다.

데아론은 황녀와 팔짱을 낀 채 멀어지는 첼루나를 외롭게 바라보았다. 단지 아쉽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한 감정이었다.

그는 이 순간, 황녀를 질투했다.

“오랜만입니다, 후작. 그간 잘 지냈나요?”

“덕분에 무탈했습니다. 그대는요?”

그사이 다른 귀족들이 다가왔고, 데아론은 공주의 뒷모습에서 억지로 시선을 뜯어냈다.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데아론 앞을 오갔다. 어디 후작, 어디 백작, 누구의 따님, 누구의 형제.

데아론은 사교계의 예법대로 필요한 만큼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길 얼마, 바다처럼 짙은 남색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루이사 펠르만입니다.”

“데아론 텔로아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이사 양.”

데아론은 펠르만 백작의 장녀를 알아보고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루이사의 남색 눈에 잠시 빛이 스쳤다.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소녀가 말했다. 소년은 내심 당황했다.

“네, 데뷔 무도회에서 뵈었으니까요.”

데아론은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었고 자신과 데뷔 무도회에서 나란히 섰던 다른 귀족들의 이름과 얼굴쯤은 외우고 있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렇군요. 대화한 적이 없어서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영광입니다.”

“어, 영광일 것까지야.”

데아론은 멋쩍게 대답했다. 루이사는 살짝 미소했다. 데아론은 예의상 마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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