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14)

“잘 들어, 첼루나. 너랑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한배를 탄 거야. 정말 모르겠어? 텔레스는 널 받아 주지 않아. 설령 지금은 받아 주는 척해도 나중에 단물을 다 빨아먹고 나면 버리겠지.”

블레논은 동생을 움켜쥔 채 그녀의 귓가에 뱀처럼 쉭쉭거렸다.

첼루나는 이제 진심으로 겁에 질려 숨을 참으며 그의 냉혹한 독설을 꼼짝없이 경청했다.

“황후가 우리 둘을 얼마나 벌레처럼 보는지 너도 알아야 해. 우리는 후궁 소생이라는 이유로 평생 그 여자한테 경멸받을 운명이야. 그러니까 괜히 그 운명 바꿔 보려고 설치지 말고 도우려면 나를 도와. 그게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이야, 알겠니, 응?”

블레논은 첼루나의 턱을 휘어잡고 그녀의 시선을 억지로 당겼다. 동생의 금색 눈을 노려보는 파란 눈은 포악하게 빛났다. 우습게도, 텔레스 황녀와 똑 닮은 눈이었다.

“내가 아직 너를 봐주고 싶을 때 그만둬. 아니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저승에서 피눈물을 흘릴 테니. 자기 딸이 자기 아들에게 죽임당하는 것만큼 비극적인 사건이 또 어디 있겠어?”

명백한 협박이었다. 계속 걸리적대면 죽이겠다는.

친동생이라는 사실이 무슨 상관일까? 그는 이미 자기 이복동생과 목숨 걸고 싸우는 사이였다. 혈연이라는 게 그토록 덧없었다.

“대답, 첼루나.”

블레논이 싸늘하게 재촉했다. 어느새 한껏 나긋해진 그의 목소리는 그래서 더욱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네, 전하.”

첼루나가 속삭였다. 블레논은 천사처럼 빵긋 웃더니 첼루나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아직도 팔이 얼얼했다.

“나는 고분고분한 동생을 좋아한단다, 첼루나.”

블레논이 경고했다. 동생 모두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첼루나는 끄덕였다.

“네, 전하.”

블레논은 인사 없이 퇴장했다. 그가 떠나자 첼루나는 바닥으로 무너졌다.

“헉……!”

그녀는, 전생에 진심으로 블레논을 무서워한 적이 없었다.

써늘하고 위압적인 아버지는 자주 무서웠는데, 블레논은 아니었다. 그저 치가 떨릴 만큼 싫었을 뿐.

지금껏 블레논이 첼루나 앞에서 제대로 된 적의를 보인 적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동복동생 앞에서 살의를 비춘 적 없어서.

블레논은 첼루나를 무시했고 멸시했으며 툭하면 폭행했지만 그건 말 안 듣는 동물을 학대하는 태도였지, 진지하게 밟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는 아니었다.

블레논이 첼루나를 아예 해쳐야겠다고 결심한 적은 없었다. 그럴 가치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난 4년간, 웬일로 유해진 동생이 꽤 맘에 들었으니까.

요즘 난생처음으로 블레논은 첼루나를 동등한 적으로 인식했고, 태도가 싹 바뀌었다.

시큰둥하게 업신여기는 태도는 사라졌다. 집요한 적의만 있을 뿐.

‘미친놈.’

정말로 골육상잔을 저지를 각오를 마친 놈이었다. 아마 텔레스는 평생 저런 눈빛을 마주하며 살았겠지.

첼루나는 바닥에 웅크려 가늘게 떨었다. 이제 텔레스 언니와 동급의 적수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할까. 그러기엔 너무 무서웠다.

‘만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원래 알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등골에 소름이 돋는다. 게다가 아까 붙잡힌 팔이 욱신욱신 아팠다. 아마 옷을 벗어 보면 시퍼런 멍이 들어 있으리라.

첼루나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뒤 천천히 일어났다. 눈을 내리감고 좀 더 기다리자, 화끈대던 눈시울도 곧 가라앉았다.

‘다행이네. 일말의 미련도 없어져서.’

첼루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고맙다, 블레논 새끼야. 네 덕분에 더욱 간절해졌어.

아무리 그래도 동복이라서, 오빠라서, 조금은, 아주 조금은 망설였을지도 모르는데.

나를 대하는 너의 쓰레기 태도가 매 순간 조금씩 샘솟는 희망을 매 순간 또 짓밟는다.

무의식중에 혈육의 정을 그리는 외로운 소녀 첼루나는 또다시 와장창 깨진 기대감을 애써 무시했다. 평범한 가족애를 향한 기대감, 그런 것들.

‘데아론뿐이야.’

원래도 그 애뿐이었다. 첼루나는 이제 눈빛도, 마음도 건조했다.

‘나는 원래 이래.’

나는 원래 가족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외톨이였어.

첼루나는 그렇게 마음을 죽이며 생각에 집중했다. 계획하고 계산하고 싸움을 치르는 일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팔은 계속해서 아팠다.

마수 습격 사건의 진상을 밝혀 내고 교회 인사를 재편하느라 또 두 달이 걸렸다. 어느덧 가을이 가까워졌다.

텔레스는 동생과의 약속을 지켰다. 첼루나가 먼저 자기 약속을 지켰으니 마땅한 보답이었다.

조사가 슬슬 마무리되던 시점에 대사제는 황녀와 독대를 청했고,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니에게 대사제를 드리겠다는 공주의 다짐은 그렇게 이뤄졌다.

황녀는 황제에게 연회를 열어 달라고 청했다. 교회의 혁신과 성녀의 활동을 축하하며 격려하는 의미로.

그 말을 들은 황제의 눈빛이 워낙 사나워서, 텔레스는 아비가 제게 찻잔이라도 던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도록 하지.”

황제가 마침내 대답했다. 텔레스는 치맛자락을 사뿐히 쥐며 예를 갖췄다.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가 왜 저런 눈빛을 짓는지 텔레스는 넉넉히 짐작했다. 황제는 바보가 아니다.

요즘 교회가 성녀의 도움을 받아 개혁이랍시고 하는 일들이 전부 제 아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쯤은 그도 알아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막내를 싫어하는 황제인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맏아들을 공격하다니 황제가 화낼 만도 했다.

‘화낼 만도 하기는, 개뿔.’

그리고 텔레스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황녀의 눈빛은 차가웠다. 차가움의 실체는 기실 상처였다. 본인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런 점에서 텔레스는 사실상 첼루나와 비슷했다. 둘 다 가족의 사랑에 굶주렸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자매는 각자 약속을 지켰다. 연회 날짜가 잡혔고, 첼루나는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다.

‘사실 이렇게 신날 일이 아닌데.’

첼루나는 자신을 엄중히 다그쳤다. 이렇게 흥분해서 촐싹댈 때가 아니었다.

연회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대놓고 언니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예정이었고, 이는 제 오빠와 외가를 향한 선전 포고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연회를 앞두고 긴장이 아닌 다른 이유로 바보처럼 심장이 뛰는 건, 늘 그랬듯이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

‘데아론.’

약 넉 달 만에, 드디어 너를 만난다.

데뷔 무도회 이후로 그녀는 그를 만날 일이 없었다. 전생 이맘때쯤에도 이 정도 기간은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아직 데아론이 황녀의 기사가 되어 입궁하기 전이었고, 사저에 나가 있는 후작의 작은아들을 황궁에 사는 공주가 멋대로 찾아갈 명분은 없었으니.

설령 명분이 있었더라도 회귀 이후 첼루나는 절대 그를 찾지 않으리라 맘먹었었다. 이번 생에는 그와 엮이지 않겠다고 분명 다짐했는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어.’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는 오히려 데아론과 친하게 지내는 게 정치적으로 유리해.’

왜냐하면, 이제 성녀가 된 나는 내 언니에게 대놓고 충성함으로써 오히려 그분을 도울 수 있으니까.

원래 계획대로 계속 블레논을 따르는 척하며 텔레스를 위한 첩자로 활동할 이유가 사라졌다.

성력을 얻은 첼루나는 다른 방식으로도 언니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

더는 텔로아 후작의 아들을 멀리할 필요가 없었다. 데아론을 적대하는 척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첼루나는 심장이 뛰었다. 바보처럼, 아이처럼.

더는 냉철한 정치적 계산이라든가 예리한 두뇌 싸움 같은 건 없고, 그녀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렸다.

기다림 끝에 연회 날짜가 도래했다.

데아론은 마차에서 내려 황궁 앞에서 섰다. 살면서 어느덧 두 번째였다.

‘오늘 드디어 뵌다.’

데아론은 공주님을 생각했다. 그 공주 역시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모리안도 데아론과 같은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동생 옆에 잠시 서서 황궁을 올려다보았다.

동생이 공주를 생각하듯 형도 황녀를 생각 중이었다.

“가자.”

모리안이 나직하게 재촉했다. 데아론은 자신이 이곳에 발을 들였던 마지막 때보다 훨씬 갈급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최근에 데아론은 형한테 검을 배웠다. 형제가 처음 검을 맞대고 나서 고작 며칠 뒤에 시작된 교습이었다.

<그래서, 생각은 끝냈어?>

모리안은 오래 기다려 주지 않았다. 데아론은 뚝뚝하게 대꾸했다.

<아니요.>

처음 기사가 되라는 제안을 듣고 나서 소년은 밤낮으로 고민했다.

아버지와 형이 원하는 일이라면 어차피 거역할 힘은 없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본인의 기사를 향한 동경이 그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러나 매번, 매 순간 공주가 마음에 걸렸다. 내가 황녀 전하 편에서 검을 잡으면 언젠간 정말로 공주님을 적대해야 할까?

<황녀 전하한테서 전언이 왔다. 공주님이 너에 대해 얘기하셨다더군. 너를 전하의 기사로 임명하는 게 어떻냐고 직접 제안하셨다고 해.>

<공주님이요?>

형의 설명을 듣고 데아론은 깜짝 놀랐다.

자기가 황족들의 대화에 언급되었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그 언급의 주체가 자신이 늘 그리는 그 공주님이라는 사실은 거의 충격적이었다.

<그래, 공주님께서 직접. 그 정도면 네가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겠니?>

모리안이 물었고, 데아론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의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어쩌다 공주님이 황녀 전하와 그런 얘기를 하신 겁니까?>

텔레스 황녀와 첼루나 공주는 이복이었고 단순하게 추론하자면 둘은 서로 적이었다.

하지만 원래 정쟁이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법이다.

<내가 말했지. 우리가 첼루나 공주님을 적대할지 말지는 보류한다고.>

모리안이 상기시켰다. 그는 어느새 자신의 보잘것없는 동생마저 서슴없이 ‘우리’라는 표현으로 묶어 표현하고 있었다.

<답이 어느 정도 나온 것 같다. 그분을 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거야.>

아마도. 뒷말은 일단 속으로만 덧붙였다. 굳이 그걸 소리 내어 말한다면 동생을 설득하는 게 꽤 어려워질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럼…….>

데아론이 머뭇댔다. 마지막 방해물이 파스스 사라졌고 이제는 정말 확답만이 남았다.

<네가 황녀 전하께 충성한다고 해서 공주님과 적이 될 필요는 없다는 뜻이지.>

모리안은 명료하게 정리했다. 데아론은 잠시 바닥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형을 마주했다.

<배울게요. 검.>

그렇게나 간단했다. 모든 변수는 첼루나였다.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동생을 보며 모리안은 조용히 당황했다.

예전부터 어렴풋이 의심한 공주를 향한 동생의 감정이 생각보다 훨씬 깊은 듯해서.

모리안이 알기로 공주와 데아론의 유일한 접점은 그 둘의 데뷔 무도회였다. 그때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한 시간에 자리를 비웠었다.

대체 그때 둘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데아론의 시선이 저토록 간절한 걸까?

이에 대해 동생을 추궁하고 싶었으나 모리안은 질문을 삼갔다. 다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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