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14)

‘성녀의 실존은 교회에서 보증하고, 또 실제로 성력이라는 힘으로 사제들이 일하니까……. 성물의 존재도 있고. 내가 성녀라는 건 오히려, 미친 소리 같지만 그나마 그럴싸해.’

첼루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점은 자기가 성녀라는 사실 자체보다도 전생에는 이를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었다.

‘과거에는 내가 저주와 엮일 일이 없어서? 그래서 그랬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어마어마한 힘이 23년 내내 잠잠했다고?

“알겠다.”

한편, 텔레스가 답했다. 첼루나가 사전에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그녀가 곧이곧대로 믿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오늘 정말로 수고했어. 여러모로 말이야.”

황녀가 조금 부드럽게 덧붙였다. 첼루나는 그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공손하게 아뢰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이것도 아직, 하루가 끝나기 이전이었다.

긴긴 하루의 끝에 첼루나는 공주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공기가 명백하게 달라진 걸 느꼈다.

사용인들의 눈빛 하나, 손짓 한 번이 예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오묘했다.

“공주님,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시녀들의 음성에는 경외가 있었다.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우러르는 것 같기도 했고, 누군가는 공주님이 사기꾼이 아닐지 은근히 의심하는 눈빛마저 보였다.

공포든 경애든 의심이든, 하나같이 주인을 대하는 태도는 경건하기까지 했다.

공주는 예전의 공주일 수 없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많은 게 바뀌었다.

목욕을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첼루나는 시녀들을 모두 물렸다. 그녀는 침대에 눕지 않고 그저 걸터앉아 촛불 하나를 켜 둔 채 생각에 잠겼다.

‘성물. 성녀. 성력. 전생에는 없던 힘. 전생에는 없었던…….’

첼루나는 촉매제가 됐다는 성물을 손끝으로 잡고 골똘하게 굴렸다. 연한 금반지에 투명한 보석이 은은히 반짝였다.

“금.”

첼루나는 무심코 중얼댔다. 금반지. 투명한 보석. 금. 금목걸이?

‘데아론 어머니의 유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잘 쓰면,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있다는데.>

죽어 가던 데아론의 속삭임.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세상 그 누가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 또 다른 터무니없는 일이 터졌다.

‘설마, 설마, 설마…….’

전생의 마지막 순간, 첼루나는 죽은 연인이 남긴 목걸이를 손에 꼭 쥔 채 잠들었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기적이 일어난 뒤였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이 대낮이었다면 아예 바깥으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첼루나는 벌떡 일어나 침실을 정신없이 배회했다. 성물을 손에 꼭 쥔 채였다.

‘확인해 볼 방법이 있을까?’

처음으로, 첼루나는 진지하게 데아론의 어머니가 궁금해졌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 자체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데아론 본인을 떠올리자 심장이 한층 과격하게 날뛰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힘이 밝혀지며 많은 것이 달라졌다. 원인에 대해 궁금한 점이 산더미였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결과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성녀가 된 덕분에 첼루나는 원래 계획보다 훨씬 빨리 텔레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더는 텔로아 후작가를 적대하는 척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데아론.”

그녀는 가냘프게 속삭였다. 짤막한 이름을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절절하게 끓었다.

전에는 꿈꾸는 것조차 죄스러웠던 미래를 조심스레 그리자 넘치는 환희로 숨이 벅찼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혼란으로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도 마음에 담긴 갈망은 오히려 단순하고 명료했다.

아마도 오늘 밤은 잠들 수 없을 듯했다.

소문은 들불처럼 번졌다. 온 제국이 떠들썩했다.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 첼루나 포렌타인 막내 공주님에 관하여.

오랜만에 평민들과 귀족들은 공통의 화제를 찾았다.

평소에 일반 백성은 높으신 분들의 어수선한 정치 싸움에 별 관심이 없고, 콧대 높은 귀족은 서민들의 가십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은 신분과 성별, 출신 지역을 초월하여 모두가 공주 겸 성녀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낭만적으로 부풀려진 영웅담에서 자극적인 음모론까지, 이야기는 과장되고 왜곡되고 온갖 사족이 가미되어 사람들이 모인 곳마다 장내를 휩쓸었다.

“야, 사제들이 저주에 손을 댔대!”

그러던 어느 날, 화제에 내용이 추가됐다. 마수 습격의 원흉이 누군지 밝혀지면서 나라는 더 시끄러워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성직자들이 괴물을 만들어 냈다는 폭로는 충격적이었고, 안줏거리로 씹어 대기에 손색이 없었다.

“라토르 공작이 마법사들한테 다 뒤집어씌우고 싶어서 사제들이랑 손잡았다는데? 그런데 우리 성녀님께서 그놈들을 싹 다 잡아내셨다, 이거야.”

“뭐 하러 마법사들을 그렇게 열심히 모함하려고 해? 공작이랑 마탑이랑 언제 또 척졌대?”

“야, 너 몰라? 마탑주가 황후 전하 친척이잖아. 마법사들이 욕먹으면 황후 전하도 욕먹는 거고, 그분이 욕먹으면 누가 덩달아 곤란해지겠어?”

“아하, 그렇구먼. 그러니까 이건 단순히 말해서, 황자 전하가 황녀 전하를 엿 먹이려고…….”

“예끼, 이놈아, 함부로 나불대지 마. 잘못 떠들었다간 모가지 날아가는 건 순식간이야.”

“쳇, 우리끼리 있는데 누가 듣는다고 그래. 자네가 날 고발할 건가? 현상금이라도 얻게?”

“거참, 농담 한번 살벌하게 하네.”

안줏거리로 씹어 대고 입에서 입으로 쉼 없이 전해지고.

사람들은 흥미진진하게, 또는 불안하게 황실의 정세를 지켜보았다.

높으신 분들의 정치 싸움이야 우리 알 바가 아니라며 으쓱하는 자들도 있었고, 위에서 피바람이 불면 괜히 휩쓸려 고생하는 건 그 아래 있는 우리라고 투덜대는 자들도 있었다.

“그나저나, 교회 윗대가리들도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 자기들 코밑에서 저주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걸 못 잡아?”

“그래서 대사제님이 공식적으로 사죄하셨잖아. 오늘부터 회개의 의미로 금식 기도 시작하신다더라.”

“흥, 그래 봤자 다 겉치레지.”

“에이, 꼭 그렇게 꼬아서 생각할 필요는 없지. 이참에 부패 성직자는 다 솎아 내고 대대적으로 교회 내부를 청소한다던데? 어찌 보면 잘된 일이지, 뭐.”

그 부패 성직자를 색출하고 수사하는 건 성녀가 포함된 교회 자체 조사단의 몫이었다.

신기하게도, 성녀님이 지목하는 사제마다 반드시 비리를 입증할 만한 확증이 쏙쏙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게 성녀님의 통찰력이라고 했다. 초월적인 힘을 받은 그분은 타락한 성직자를 단번에 알아보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건 통찰력이 아니라 전생의 기억을 생생히 간직한 거였지만, 평민이든 귀족이든 이를 아는 자는 당연히 없었다.

사람들이 모르는 또 하나는, 이번에 마수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거나 별개의 비리로 고발된 성직자 대부분이 전생에 어떤 식으로든 블레논 황자를 도왔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첼루나는 자신이 성녀의 지위를 이딴 식으로 남용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과거 황자의 조력자를 솎아 냈다.

그러나 원래 첼루나의 양심은 빈약한 편이었고, 그녀는 곧 죄책감을 잊은 채 실컷 권력을 남용했다.

그녀는 대사제를 구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구슬린다고 해 봤자 대사제와 친한 성직자는 절대로 고발하지 않는 것뿐이었지만.

가장 성스러워야 할 교회에도 세속적인 파벌이 있었고, 무려 두 번의 삶을 살며 그런 것들을 관찰한 첼루나는 자신의 지식을 최대한 교묘하게 이용했다.

대사제의 환심을 사서 그가 텔레스를 지지하도록 유도한다. 교회에서 블레논의 수족이 될 만한 자들을 미리 잘라 낸다. 그게 첼루나의 주된 계획이었다.

계획은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일이 너무 잘 풀려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지난 4년간 아무리 애써도 얻지 못한 성과를 느닷없이 거저 받은 힘으로 해결하는 느낌이라 마냥 통쾌하지만은 않았다.

‘괜찮아. 잘됐어. 결과가 좋으면 괜찮은 거야.’

첼루나는 씁쓸함을 떨쳐 내며 자신을 다독였다.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편, 일이 잘 풀릴수록 오히려 생겨나는 문제도 있었다. 첼루나는 미리 짐작하고 각오했다.

“블레논 전하.”

어느 날, 조사 때문에 교회에 들렀다가 공주궁으로 돌아온 첼루나는 불쾌한 소식을 들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겠다는 기별도 없이.”

방문을 예고하지도 않고 주인 없는 응접실에 들이닥친 황자는 동생이 입장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블레논은 성큼성큼 다가왔고, 첼루나는 움찔했다.

과거에 오빠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게 익숙했던 첼루나는 블레논의 난폭한 표정과 몸짓을 보고 반사적으로 움츠렸다.

그러나 블레논은 첼루나를 치지 않았다. 치고 싶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황자는 포악한 만큼 교활했고, 요즘 첼루나는 자신이 함부로 손찌검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슨 수작이야?”

하여, 블레논은 동생에게 손을 올리지는 않고 그저 지척에서 스산하게 씹어 뱉었다.

“뭐가요.”

첼루나는 차갑게 되물었다. 더는 온순한 백치를 연기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그녀는 오라비에게 대놓고 삐딱했다.

“하, 그래.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블레논은 정확하게 비꼬았다. 이 건방진 태도는 정녕 첼루나의 본질이었다.

회귀 후 첼루나는 힘이 필요해서 필사적으로 가련한 모습을 꾸며 냈다. 그러나 남들에게 아양을 떨어 얻어 낸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제 그녀는 새로운 수단이 생겼다. 바로 성녀라는 이름, 그리고 교회의 보증. 그녀의 존재를 우러르는 들뜬 민중과 신앙심 깊은 귀족들.

거저 받은 힘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의 힘이었다. 그녀를 예뻐하는 주변 사람들이 아닌, 순전히 그녀 본인에게서 나온 힘.

언제 받았는지 알 수 없으니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를 힘이었지만 그래도 가진 동안은 성심껏 써먹을 생각이었다. 황자를 무너트리고, 황녀를 드높이기 위해.

그리고 똑똑한 블레논은 이미 동생의 의도를 눈치챘다.

“언제부터야? 언제부터 텔레스한테 붙어먹었어.”

아직 첼루나는 그 어떤 공식적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전 언니 편이에요! 오빠는 쓰레기예요! 그렇게 외치며 돌아다닌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블레논은 첼루나가 성녀로 밝혀진 날 저녁 텔레스와 독대한 걸 알고 있었고, 요즘 교회에서 줄줄이 파면당하는 고위 사제들이 전부 자기 외가와 친밀한 사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년이 널 받아 줄 것 같아? 이제라도 개수작은 포기하고 얌전히 있어.”

“무슨 뜻인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전하. 저는 전하와 달리 워낙 멍청해서 말이죠.”

“너……!”

첼루나가 쌀쌀맞게 시치미를 떼자 블레논은 이를 악물며 동생의 팔을 콱 잡았다.

‘윽.’

파고드는 악력에 첼루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는 블레논을 뿌리치려 했지만, 신체적 힘만 따진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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