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14)

황녀는 동생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복 자매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약 두 달 전처럼, 그러나 그때와는 전혀 다르게.

“제가 예전에 이 방에서 전하께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첼루나는 곧장 본론으로 진입했다. 빙글빙글 돌려 말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텔레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첼루나는 부연을 기다리지 않고 신속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제 마음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블레논 전하가 아니라 당신을 제 미래의 주군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제가 당신을 돕게 허락해 주세요. 뭐든 하겠습니다.”

황제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미래의 주군 운운하는 건 명백한 역모였다.

그러나 황녀는 방에서 모든 사람을 물린 뒤였고, 자매는 솔직한 대화가 필요했다.

“이제는 제가 꽤 유용하다는 걸 아셨잖습니까. 그때처럼 망설이실 이유는 없을 듯한데요.”

첼루나는 자신이 고작 쓸모 있는 도구로 언니에게 이용당하고 싶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게 그녀의 진심이었으니까.

더한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언니의 조력자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로써 자신과 데아론의 미래를 보장할 수만 있다면.

“글쎄, 망설일 이유야 많지. 오히려 네가 너무 유용해져서 더욱 망설여야 하지 않겠어?”

텔레스는 신중하게 지적했다. 그녀가 예리하게 말을 더했다.

“너는 내 신하가 되겠다고 했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터놓고 얘기하자. 네가 그 누구의 신하도 될 필요가 없다는 건 생각 안 해 봤나? 너도 엄연한 황족이고, 이제 교회가 네 편인데?”

오빠, 아니면 언니라고? 아니, 이제 너에겐 또 다른 선택지가 생겼다.

아무리 부황에게 미움받는 천덕꾸러기 막내라지만 어쨌든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공주.

그리고 이제는 교회를 등에 업었다. 그 강하고 거대한 조직을, 그리고 민중의 질긴 신앙을.

“너를 믿고는 싶지만 그게 참 어렵구나. 우리가 원래 다 그렇잖니. 네가 나를 편드는 척하다가 나중에 내 등에 칼을 꽂을지 어찌 알아? 겸사겸사 블레논도 같이 처리하고.”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평생 군주의 자리만을 바라보며 산 황녀는 동생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공주는 진심으로 코웃음 쳤다.

“전하, 저는 제위에 오를 그릇이 못 돼요. 그건 전하께서도 짐작하셨을 텐데요.”

평생 군주의 자리만을 바라보며 산 황녀는 그곳이 최종 목적지라는 대전제가 너무 당연해서, 다른 황족에겐 다른 길이 있을 거라고 상상할 여지가 부족했다.

첼루나는 그 반대였다.

평생 그늘 속에서 조연으로, 아니, 조연조차 못 되는 단역으로 연명했던 그녀는 오히려 최고 자리를 탐내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럴 욕심도 없었다.

“제가 원하는 건 그저 가늘고 길게, 편하고 건강하게 사는 겁니다. 속되게 말하자면 혼자 조용히 잘 먹고 잘사는 걸로 충분해요. 그런데 가만히 있어서는 그게 안 되게 생겼으니 전하께 온 겁니다.”

권좌는 영광만이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권력이 막강한 만큼 책임이 막중한 자리였고, 추종자가 있는 한편 적군도 많았다.

블레논과 텔레스는 각자 이를 알면서도 즉위를 꿈꾸었다. 평생 배우고 각오하며 마땅히 자기 자리라고 생각하며 컸으니까.

첼루나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권력과 먼 삶을 살았다.

그녀의 소원은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무사히 천수를 누리는 거지, 이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게 아니었다.

“제가 전하의 자리를 탐내지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약속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제 충성을 의심하지 않고 저를 끝까지 보호해 주신다면, 저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하를 섬기겠습니다.”

부디, 나를 살려 줘. 그리고 데아론을 살려 줘. 전생에 당신은 승리했지. 이번에도 승리해서 데아론을 공신 삼아 줘.

그리고 전생과 달리 그 아이는, 패자의 동복인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일이 없으리라.

“……여유로운 척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겠다. 네가 내 편이 돼 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 네 말대로, 여러모로 유용하겠지.”

텔레스는 순순히 고백했다.

성녀 하나 포섭하지 못했다고 와르르 무너질 만큼 그녀의 세력이 허술한 건 아니었지만 만약 그 성녀가 적군을 편든다면 꽤 곤란해질 것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내 편이 되어 줄 거지? 성녀의 이름으로 온 나라 사제들을 구슬려 나를 지지하게 만들 텐가? 너도 알겠지만, 지금 대다수가 블레논 편이야. 블레논의 동복인 네가 성녀로 판정됐다는 점이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할지도 모르지. 라토르의 피에 거룩한 힘이 흐른다고 떠들 자도 있을 거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첼루나의 정치적 선택과 별개로 그녀가 블레논 황자와 같은 태에서 났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황비의 혈통은 곧 성녀의 혈통이다. 그런 식으로 여론이 모인다면? 블레논과 교회의 결탁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대사제님을 전하께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백성의 마음을요.”

첼루나는 매끄러운 혀로 설득했다. 그녀가 엄숙하게 아뢰었다.

“이번 조사가 끝나고 저주의 배후가 밝혀지면 대사제님은 전하의 편이 될 것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전하께 도움이 되겠죠?”

“대사제가? 확실해?”

“네, 전하.”

왜냐하면, 전생에도 대사제는 결국에 당신 편을 들었거든.

대사제는 장남이 당연히 보위를 이어야 한다고 믿는 보수적인 교회의 대표였지만 라토르 공작이 자신의 지위를 노리던 다른 고위 성직자와 결탁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바꿨다.

이번 생에 그 폭로는 훨씬 앞당겨질 것이다. 첼루나는 범인이 누구였는지도 기억하니까.

“그건, 실제로 유용하겠네.”

황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첼루나는 끄덕인 뒤 덧붙였다.

“그리고 나중에 조사가 다 끝나고 나면 폐하께 아뢰어 연회를 열어 주십시오.”

“연회를?”

“네. 연회든 무도회든 큰 행사면 좋습니다. 거기서 제가 전하께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하겠습니다.”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친한 척을 하겠다, 이거지?”

“친한 척이라뇨, 섭섭합니다. 저는 전하와 진심으로 친해지고 싶은걸요.”

여기서 첼루나는 살짝 진지함을 거두고 눈매를 접으며 슬며시 웃었다. 텔레스는 그 음흉함에 기가 찼다. 그렇다고 싫지는 않았지만.

“여태 여우 한 마리를 숨기고 있었구나.”

텔레스가 지적했다. 여우인지, 늑대인지. 첼루나는 다시 말개진 시선으로 눈을 깜빡였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녀가 얌전하게 말했다. 텔레스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다시 진지해졌다.

“블레논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쪽에서도 어쨌든 네 지지를 확보하려 애쓰겠지.”

어쩌면, 첼루나가 자기 동복이라는 이유로 방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나중에 배신감은 더 크겠지. 당연히 자기편이라고 생각했던 동생이 제 뒤통수를 거하게 치는 거니까.

배신감이 클수록 보복도 매서우리라. 텔레스는 자기 이복동생을 걱정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제가 황자 전하께 바칠 충성은 없습니다.”

첼루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 증오였다.

원망. 설움. 조금의 희망과 기대감, 그리고 그럴수록 더욱 무참했던 슬픔.

과거에, 어쩌면 매우 먼 옛날에, 첼루나는 가족의 정 같은 걸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 오라비에게. 너무, 너무 외로워서.

그러나 무력하게 죽은 아버지와 한심하게 패한 오라비, 이로 인한 자신의 몰락과 뒤따른 연인의 죽음까지 겪고 나서 첼루나는 온전히 복수를 다짐했다.

이번 생에도 피눈물을 흘리는 건 너야. 첼루나는 블레논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그 말이 끝까지 사실이길 바라.”

텔레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만약 중간에 변심한다면 나는 너를 죽여야 하리니. 언니가 하지 않은 말을 첼루나는 어차피 알아들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첼루나는 꿋꿋이 말했다. 이어, 공손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전하,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

“네. 텔로아 후작의 둘째 아들인 데아론 텔로아에 관한 이야긴데요.”

첼루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표정 관리와 말투 조절에 힘썼다.

자신이 그 소년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정략적인 관심, 그뿐이어야 했다.

“그자를 전하의 기사로 임명해 주실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내 기사, 라.”

“네, 전하. 외람된 말씀이라면 용서하세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전하와 텔로아 후작의 첫째가 몹시 가까운데, 그 동생은 사교계에서 평판이 나쁜 게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전생에는 첼루나의 개입 없이도 데아론은 황녀의 기사가 됐다. 그의 아비와 형, 그리고 황녀 본인이 원한 대로였다.

그러나 이번 생에 상상도 못 하게 성력을 얻은 첼루나는 이 변화가 변수로 작용하여 다른 사람, 즉 데아론의 미래까지 꼬아 놨을까 봐 불안했다.

‘이번 생에도 데아론은 기사가 돼야 해.’

첼루나는 결심했다.

데아론이 사교계에서 그나마 사람 취급을 받게 된 건 그가 황녀의 기사가 되면서부터였다. 그 계기를 그한테서 빼앗고 싶지 않았다.

‘마수 토벌에 보내기는 싫지만.’

일단 기사로 만들어 놓고, 그때 가서는 어떻게든 걔가 마수 토벌에 참가하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내 호위병으로 빼돌린다든가.

내 호위병이라. 경호를 핑계로 데아론을 제 곁에 사시사철 붙잡아 두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커서 속이 뜨겁게 울렁였다.

“……후작과 얘기해 보지.”

텔레스가 답했다. 사실 그녀는 이미 모리안과 이 얘기를 한 적 있지만 그런 것까지 아직 첼루나에게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첼루나는 황녀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일단은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나저나 첼루나. 뭐 하나만 물어보자.”

“네, 전하.”

“네 성력. 정말로 몰랐어? 오늘에야 처음 발현된 거야?”

텔레스는 동생을 똑바로 보며 추궁했다. 첼루나는 한 톨의 거짓도 없이 대답했다.

“오늘이 처음입니다. 정말로 몰랐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보다 훨씬 놀라운 일을 이미 한 번 겪었지.

회귀. 시간을 거슬러 두 번째 삶을 시작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말해 봤자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기적을 첼루나는 이미 경험해 봤다.

자신이 성녀라는 미친 사실을 의외로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미 말도 안 되는 경험을 한 번 해 본 덕분일지 몰랐다.

‘성녀의 존재는 역사에 기록이라도 남아 있지, 회귀는 살면서 들어 본 적도 없다고.’

오히려 자신이 성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회귀의 가능성을 상상하기보다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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