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는 첼루나 공주님도 텔레스 전하의, 즉 이 가문의 적이라는 뜻입니까?”
기괴한 느낌이었다. 뜨거운 얼음이 몸속에 콸콸 흐르는 느낌. 분노는 차가우면서도 뜨거웠다. 데아론은 모리안을 똑바로 쏘아보며 씹어 뱉었다.
“그리고 저 역시 이제 가문의 일원으로 황녀 전하의 기사가 되어 공주님을 적대해야 한다는 뜻이군요.”
“꼭 적대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공주님에 대해 취할 태도는 일단 보류야.”
“보류라고요?”
“그래, 보류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아직 자세히 알려 줄 수 없어.”
텔레스 황녀가 첼루나 공주의 포섭을 시도하겠다고 말한 건 황녀와 소수 측근만 모인 자리에서 비공식적으로 밝힌 의견이었다.
모리안은 아직 그런 것까지 동생에게 미주알고주알 알려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토록 반항적인 동생이라면 더더욱.
“그나저나 데아론, 태도가 퍽 무례하네.”
모리안은 지적했다. 나무라거나 상처받은 어투가 아니라 그저 사실 관계를 읊듯 덤덤하게.
“네가 기사가 되기로 하든 말든 그런 태도는 위험해.”
모리안이 걱정하는 건 이런 거였다.
동복동생인 성녀를 등에 업고 더욱 기세등등해진 블레논이 텔레스 측을 더욱 맹렬히 공격하는 것. 그때 자신의 가문이 황녀의 약점으로 쓰이는 것.
텔레스는 첼루나 공주가 제게 협력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만 모리안은 의심이 가득했다.
주로 블레논을 지지하던 교회에서 저주를 사용했다는 정황이 밝혀졌으니 블레논 측이 오히려 타격을 입을 수도 있겠으나 만약 성녀가 황자를 편든다면 그 타격은 웬만큼 상쇄되리라.
그런 사태에 대비하여 모리안은 혹시나 황녀의 약점으로 쓰일 만한 주변 상황을 미리 깔끔히 정리하고자 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그의 사생아 동생.
그의 말마따나 데아론 텔로아는 이제 역할이 필요했다. 그를 부끄러운 사생아에서 다른 번지르르한 무언가로 승격해 줄 그런 역할.
<그 아이를 내 기사로 삼을까 생각 중인데, 어떻게 생각해?>
몇 달 전 황녀가 무도회에서 했던 말이 발상의 근간을 마련했다.
<이름을 쌓기에 가장 무난한 방법이잖아.>
그래, 기사. 만약 데아론에게 재능만 있다면, 그리고 적당한 의지만 있다면 황녀는 데아론을 기사로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럼 나름의 훌륭한 이미지 세탁이 되리라.
그런데 평소답지 않게 삐딱하게 구는 동생은 본인 이미지 세탁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모리안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왜지?’
지금 가문에서 자신의 사족 같은 위치가 만족스러울 리 없다. 나는 분명 기회를 주고 있는데, 왜?
‘그리고 하필…….’
하필이면 동생이 처음으로 반항심을 드러낸 계기가 다름 아닌 첼루나 공주라는 게 모리안의 심중에 싸한 불안감을 들이부었다.
‘설마.’
설마 그새 얘가 첼루나 공주에게 호감, 연민, 그럼 감정을 품었을까. 설마. 두 아이는 접점도 없었다.
‘잠깐만.’
모리안은 문득 데뷔 무도회를 떠올렸다.
“……무례한 태도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는 별로 기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데아론은 이제 형이 아닌 바닥을 노려보며 뚱하게 아뢰었다. 모리안은 동생을 빤히 뜯어보다 대뜸 물었다.
“네가 기사가 되기 싫어하는 이유가 설마, 첼루나 공주님을 대적하기 싫어서냐?”
데아론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아직 표정 관리와 감정 조절에 서툰 열일곱 살 소년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모리안은 그 선연한 홍조를 보고 경악했다.
“그것보다는 그냥, 가문의 도구로 쓰이기 싫습니다. 이제 와서요.”
데아론은 고집스레 받아쳤다. 이 대답도 완벽하게 사실이었다.
첼루나가 가장 주된 원인이긴 했지만 공주와 별개로 형의 제안은 몹시 불쾌했다.
지금껏 내내 투명 인간 취급하다가 이제 와서 가문을 위한 역할을 운운하다니.
데아론은 착할 뿐이지 마냥 무른 건 아니었다. 그리고 멍청하지도 않았다. 지금 형의 제안이 매우 뻔뻔한 내용이라는 것쯤은 그도 모를 수가 없었다.
‘형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방금 한 말이 끔찍하게 철면피하다는 걸 본인은 알까 몰라. 원래 가해자는 제 잘못에 퍽 무딘 편이니. 애꿎은 피해자만 고통받는다.
“도구라니.”
모리안이 부드럽게 말했다. 사실, 그는 자신의 태도가 매우 염치없다는 것을 잘만 알고 있었다. 자괴감보다 절박함이 더했을 뿐.
“네가 가문에 소속감을 느낄 기회를 주는 거다.”
황녀뿐만 아니라 동생을 위해서. 모리안은 진심으로 손 내밀고 있었다.
“생각해 봐, 데아론. 네 출신은 평생 너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거야. 그걸 상쇄할 만한 무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지나치게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지나치게 냉정한.
안 그래도 상처 많은 열일곱 살 동생에게 함부로 뱉을 말은 절대 아니었다.
“네가 기사가 되고 정식으로 황녀 전하께 속하게 되면 아무리 내 어머니라도 네게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다른 누구도 너를 비웃을 수 없어.”
그는 동생의 마음을 할퀴면서까지 설득했다.
여태 동생에게 잘해 주고 싶었으나 그 방법을 몰라 잔인하게 방관했던 그는 이제 와서, 이제라도 동생에게 기회를 주기 원했다.
동생이 자신과 거의 동등한 위치에 설 기회. 후작의 비루한 사생아가 아니라 황녀 전하의 당당한 기사로 탈바꿈할 기회.
“아버지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다. 잘 생각해 봐.”
데아론은 절망을 느꼈다. 형님이 권하고 아버지가 수락하신 일. 그렇다면 어차피 내게는 선택권 따위 없잖아.
오늘 여러모로 심란하고 화나는 가운데 처음으로 형에게 건방지게 군 소년이지만, 그건 잠깐의 충동에 가까웠다. 그는 다시 관성적인 무기력에 사로잡혔다.
어머니를 잃고 지난 2년간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자존감을 낮추는 법만 배웠다.
가장과 장남의 이중 압박 아래서, 의지를 잃고 꺾이는 건 너무 쉬웠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게 소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었다. 곧바로 알겠다고 답하지 않는 거.
“그런데, 너.”
모리안이 불쑥 불렀다. 데아론은 음산한 기분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왜, 또 뭐?
“……아니야.”
모리안은 중간에 마음을 바꿨다.
대체 너와 첼루나 공주는 서로 무슨 사이며 그분을 향한 네 감정은 뭔지 캐물으려 했으나, 왠지 그랬다간 역효과만 날 것 같았다.
“이제 방에 올라가도 좋아. 검은 이리 주고.”
드디어. 데아론은 기꺼이 검을 반납했다. 형에게 꾸벅 인사한 뒤 후다닥 사라지기 전, 떠오르는 의문이 있어 소년은 멈칫했다.
“만약 제가 검을 배우겠다고 하면, 누가 저를 가르칠 건데요?”
데아론이 물었다. 모리안은 잠시 동생을 보다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내가.”
엑. 데아론은 대놓고 얼굴을 찡그릴 뻔했다. 막판에 급히 표정을 다잡긴 했으나 모리안은 동생의 눈빛을 스친 뜨악함을 생생히 목격했다.
“알겠습니다.”
데아론은 떫게 중얼댄 뒤 이제야말로 돌아섰다. 형과의 검술 교습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차라리 독학을 시도하는 게…….
‘아니야.’
데아론은 내적으로 깜짝 놀라 황급히 도리질했다. 교습과 독학을 저울질하는 사고 자체가 이미 대전제를 명확하게 했으므로.
기사가 되고 싶어. 그의 내밀한 갈망이 속삭였다. 어릴 적부터 품었던 환상이잖아.
공주님과 왕자님, 전사와 요정의 흔한 동화. 그중에서 특히 소년을 매혹한, 총명과 용기로 악당과 맞선 기사들의 설화.
연무장에 들어선 순간, 또한 검을 낚아챈 순간, 과거의 동경이 되살아났다. 강렬하게.
<자랑하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나 정도 실력의 검사가 가한 공격을 한 번에 막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야. 심지어 태어나서 한 번도 검을 제대로 배운 적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데 너는 그걸 해냈어. 몸이 알아서 반응했다는 거다.>
심지어, 형의 그 칭찬 아닌 칭찬이.
<재능이 없다면 모를까, 있다는 걸 알아냈는데 일부러 썩힐 수는 없지.>
소년에게 재능이 있다고 했다.
지난 2년간 여기서 소년이 배운 건 스스로 비하하는 것뿐이었는데. 처음으로 칭찬 비슷한 걸 들었다. 재능이 있다고.
‘고작 그런 걸로.’
데아론은 부끄러워졌다. 칭찬 한 번 들었다고 호구처럼 넘어가다니, 난 자존심도 없나? 애정에 굶주린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데 사실, 바로 그거였다. 데아론은 애정에 굶주린 어린애였다. 어른들의 차가운 잔인함에 그대로 노출된 외로운 아이.
‘……공주님.’
그토록 외롭고 허기진 그에게 지난 2년간 처음으로 손 내밀어 준 사람이 첼루나 공주였다.
그녀와 달빛 아래서 춤췄던 두 달 전의 밤은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그토록 달콤한 온기를 선물해 준 사람과 내가 과연 맞설 수 있을까? 도의적인 문제를 떠나서, 도저히 그럴 의지를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만약 정말로 기사가 되면…….’
동시에, 데아론은 바로 그 첼루나 공주 때문에 모순적이게도 흔들렸다.
<생각해 봐, 데아론. 네 출신은 평생 너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거야. 그걸 상쇄할 만한 무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형은 그에게 말했다. 이건 그에게 기회라고. 반쪽짜리 사생아라는 불미스러운 꼬리표를 다른 떳떳한 이름으로 대체할 기회.
<네가 기사가 되고 정식으로 황녀 전하께 속하게 되면 아무리 내 어머니라도 네게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다른 누구도 너를 비웃을 수 없어.>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오히려 공주님께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황녀 전하의 기사인걸.’
정신없이 앞날을 상상하던 데아론은 곧 다시 낙심했다. 그래, 해 봤자 황녀 전하의 기사다. 그게 내 아버지와 형님의 뜻이니.
황후 전하의 소생이신 황녀 전하, 황비님의 소생이신 공주님, 블레논 황자 전하, 성녀, 기사. 소년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리고 아직 그는 몰랐지만, 가장 복잡한 부분은 조만간 해결될 예정이었다. 그가 그토록 그리는 공주 본인에 의해.
첼루나는 교회에서 한참 뒤에 환궁했다. 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황제께 먼저 인사드리기도 전에 텔레스 황녀부터 찾았다.
그녀의 그런 행보는 몹시 정치적이었고 첼루나 본인도 이를 잘 알았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첼루나는 언니에게 공손히 예를 갖췄다. 더는 예전처럼 살짝 모자란 척 연기할 필요 없이 그저 거침없이 우아한 태도였다.
“그래. 이렇게 만나니까 참 반갑다, 그렇지?”
텔레스도 동생을 상대로 구태여 나긋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황녀는 그저 진지한 눈빛으로 공주를 맞이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첼루나는 단숨에 대답했다. 텔레스는 웃지 않았다.